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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여.
등록자
붉은전선타도구국
등록일
2012-03-25 18:57:10
조회
1314

 

 

 

[.....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반민주 제도와 악법을 폐지....국정원, 기무사 등 ...민주적 통제를......

 

 .....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여....

 ..... 대체복무제 도입, 군인 인권 보호 등 군의 민주화, 민주적 통제를 ......


 ....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을 이행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

 

 

 

  [    통합진보당 강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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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표적 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반민주 제도와 악법을 폐지하고, 국정원, 기무사 등 특수권력기관의 시민생활 침해, 사찰행위를 전면 금지하며, 민주적 통제를 강화한다.


법원,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국가권력기구를 민주적으로 개편하고, 공직비리수사처를 신설하며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을 분할하는 등 검찰개혁 및 사법제도 개혁을 확고히 추진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정상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해 포괄적 국가인권정책을 수립하고 평등권 실현과 차별 시정을 실효성 있게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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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등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평화체제를 조기에 구축한다. 이와 연동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여 동북아 다자평화협력체제로 전환한다. 국군의 해외 파병을 금지하고, 선제적 군비동결과 남북 상호 군비축소를 실현한다.

 

37. 3군의 균형 있는 발전과 무기도입을 비롯한 국방조달의 투명발전과제고하는 등 국방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한편, 대체복무제 도입, 군인 인권 보호 등 군의 민주화,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인간안보를 실현한다.

 

38. 7?4 남북 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존중하며,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을 이행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한다.

 

39. 기존에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과 협정을 개정?폐기하며, 미·중 등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과 함께, 진보적 국제연대를 적극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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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goupp.org/raw2
                  
 
  
 
 Home > 소개 > 당헌/강령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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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

 

 

[....남침 후 한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데모에 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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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전략을 추구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되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문서였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다.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등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다.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모두가 환상이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다.

매년 80만 ~ 100만톤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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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은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속이고 " 민족,민주연합정부"를 세우자느니,

평화와 중립 정책을 쓰자느니 하는 위장된 구호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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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트콩은 1968년 "구정공세"라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며

이러한 공세를 당하고도 월남의 일부 지식인과 전직 관료들은 사이공과 후에에서

이른바 "월남 민족.민주.평화세력 연합"이라는 것을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을 적극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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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한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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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한국군이 국경부근과 위험지역에서 철수하려하자 월맹군이 후퇴로를 막고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습니다. 미공군과 해군이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들의 후퇴로를 열려하자 월남의 언론이 벌집을 쑤신듯 난리를 쳤습니다. 폭격을 하게되면 월맹영토를 폭격하게 될지도 모르고 평화협정을 위반한다며 오도방정을 떨었습니다. 폭격은 민간인을 죽이는 야만행위라며 언론과 사회단체가 비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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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이 미국의 경제제제로 궁핍해지자 역시 언론이 난리를 쳤습니다. 월맹을 도와야 한다며 같은 민족이 굶어죽는다며 이럴때는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한다며 난리를 쳤습니다.

 

월맹사람과 손을 잡거나 같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모습으로 방송에 나오고 국민들이 그 장면을 보고 월남국민들이 월맹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평화롭게 지내자고 생각했습니다. TV와 방송의 젊은 기자들은 방송을 만들고 거기에 국가가 통제를 가하면 국민의 알권리를 국가가 침해한다며 반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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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베트남 공산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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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30일 소련제 월맹군 탱크 845호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월남기(旗)가 내려지고 월맹기가 올랐다. 사이공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 탱크와 304사단 보병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자유베트남은 패망 이전 수년간 시종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했던 '공산프락치'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3년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됐고, 그 해 3월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 철군했었다. 그 이후 2년 만에 완전 공산화 된 것이다. 미군철수 후 대화로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평화협정문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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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시발점은 바로 이 베트남전 참전에서였다. 미군의 계속적인 한국주둔을 조건으로 한 월남 파병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체성(正體性)과 시장경제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월남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은 부패척결과 반미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연중 계속된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티우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애국을 표방하는 1백여개의 좌익단체와 통일운동단체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시작했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양산되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도주의 운동가 등이 티우 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1975년 자유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무릎을 꿇기에 앞서 이들에게 당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正體)이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호치민이 1930년 창당)과 인민혁명당(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 웬후토가 1962년 창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전체인구의 0.5%인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이 베트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 5만여 명의 월맹 간첩들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 간첩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미군 철수와 베트남 패망 이후였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바로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순수한 애국자연(然) 했고, 미국에서의 반전(反戰)운동에 결정적인 불씨를 지폈다.


간첩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반미 반전평화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침투가 쉽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기반 확대로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인사들을 '정신나간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투쟁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베트남 패망 30년을 맞는 현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은 그 추(錘)가 친북 좌익세력에게로 기울어져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와 반전평화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연일 공공연히 반미집회를 자행하고 있으며, 북한의 요구를 복창하듯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유 민주시민들은 그들에 의해 수구 냉전주의자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언론매체들이 늘고 있고,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그런 논조가 해를 거듭할수록 대세에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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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정치활동에 가담한 가톨릭 사제들

written by. 임광규

 

 

-공산주의자들의 정복을 도와주고, 가톨릭신앙의 박해를 초래한 베트남의 신부들-


1973. 1월에 파리평화협정으로 휴전이 성립될 당시의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수준은 언론의 자유, 재산소유, 자영농업, 자유상업, 죄형법정주의(형법규정에 없으면 처벌불이익을 줄 수 없는 인권보호제도), 신앙자유 등의 기준으로 보아 다른 주변 국가들(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폴, 필리핀, 대만)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전도상 이었습니다.


1973. 3월까지 남부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 완료하였습니다.

 

말이 휴전이지 북베트남(월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은 각자 공산주의체제와 자유사회체제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각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는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대통령이고, 1973. 8월 선거에서 티우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주당(Dan Chu)이 승리하여 1974. 1월에 헌법을 개정하고 1년 9개월 후인 1975. 10월에 대통령 선거를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과 그의 남부 침투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전면 군사공격을 하기 전에,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혼란을 가져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순서였습니다. 이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을 격퇴 분쇄하는데 월남공화국이 실패한 것입니다.


언론자유와 인권보호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월남공화국이 내부혼란, 와해를 막으려면 지식인들의 통찰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수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혼란과 와해의 기획, 조직, 투쟁에 가담한 것입니다.

 


가톨릭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영신생활을 돌보던 구엔 녹 란(Nguyen Ngoc Lan)신부가 반전과 평화(反戰과 平和)를 외치면서『반대』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공산전체주의와 누가 살아남고 누가 먹히느냐의 결전을 벌이고 있는 월남공화국 수도 사이공에서 가톨릭 사제복을 걸치고 평화와 무장해제를 주장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역시 가톨릭 사제인 찬 틴(Chan Tin)신부는 교도소개혁위원회의 이름으로 인권운동과 반전투쟁(反戰鬪爭)을 하면서 월남정부의 대공방어전쟁(對共防禦戰爭)을 비판하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들은 멋모르는 많은 사제와 신도들의 지지와 추종을 이끌어 냈습니다.


고 딘 디엠을 지지하던 가톨릭 사제 찬 후 탄(Tranh Huu Thanh)신부까지도 1974. 9월부터『인민의 반부패운동』이라는 깃발을 들고 티우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티우 대통령을 위시한 월남정부는 가톨릭 사제의 그런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인프레와 불경기로 시달리게 되고, 미국도 월남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고 있을 때, 이 가톨릭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은『월남민주공화국』과 그 산하조직인『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기획, 조직하여 사이공을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벌이게 한 식량요구데모, 공무원 처벌요구데모에 합세한 것입니다.

 

휴전이 발효한 1973. 1월부터 8월말까지 8개월 동안 월남정부군 41,000여명이 전사하고, 4,000여명이 실종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매일같이 직장을 달라, 식량을 달라는 데모가 사이공거리를 휘저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식량과 의복을 요구하고, 해고무효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제2도시 다낭 길거리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1974. 11. 1.에 란 신부가 사이공 시가지 데모 중에 경찰에 구타당하였고,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 티우 정부에 항의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자, 공산군과 싸우던 월남공화국 군인들이『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생명을 바치는가?』라고 회의를 품게 되고 사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월남민주공화국』군대가 진격하자『월남공화국』군대는 어이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고, 1975. 4월 30일에 월남공화국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월남은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재산과 기업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형법정주의의 법치를 잃어버리고, 가톨릭 신앙이 공산당의 허가와 제한을 받는 처지로 떨어진 것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은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이 번영하는 경제 대신 공산당이 통치하는 극빈국의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누구에게 호소할데도 없는 사회주의 관료제의 더 지독한 부패체제로 타락하여 갔습니다.

 


베트남을 공산전체주의의 족쇄로 몰아넣는데 크게 기여한 란신부는 그런 후 사제를 그만두었습니다. 두고두고 표창 받아야 할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월남민주공화국』당국은 란 신부 같은 분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1990. 8월 5일부터 가택연금 시켜버렸습니다. 월남공산전체주의 승리에 도움을 준 틴 신부는 통일『월남민주공화국』당국에 의하여 1990.에 형을 선고받고 1993.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틴 신부가 언론자유의 월남공화국 시절에 떠들었던 반정부(反政府)의 1/5도 안 되는 발언을 한 점(데모는 고사하고 그냥 공산당원들의 과오를 지적한 것만 가지고)이『월남민주공화국』형법의 내란죄로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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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법(Codex Iuris Canonici) 제285조 제1항이『성직자들은 개별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신분에 부적합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같은 제2항이『성직자들은 불미한 것이 아니라도 성직자 신분에 안 맞는 것은 피해야한다』고 규정한 것(1983. 1. 25.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개정 반포함. 그 이전의 가톨릭 교회법 제138조 제139조도 같은 규정을 하고 있음)은 2000년의 파란만장한 가톨릭 역사를 겪어오는 동안 교회와 교황성하들이 거듭 확인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1973. 1월의 파리평화협정 때부터 1975. 4월 30일 월남공화국 패망 때까지 2년 3개월여 동안 베트남의 똑똑한(세속적인 뜻에서) 일부 신부들이 정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제 겨우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하는『월남공화국』을 조져댄 것입니다. 이런 적대진영 안의 자해분자(自害分子)들을 두고 레닌은『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무렵 1972년에 남미 페루의 G 구티에레스 신부가 발표 출판한『해방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정의』를 내세우는 신부들이 공감을 하였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해심 깊고 참을성 많은 교황 바오로6세는 심한 관절염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어 갔지만,『민주주의』와『혁명』을 실천하는 사제들에게 그들의 일탈(逸脫)을 차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제들의 거센 반대의 소음 때문에 교황의 경고가 일반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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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가 스스로의 정의감이 순수하다고 확신하면서, 이 세상의 불쌍한 인민을 구출하겠다고 혁명과 정치에 나서는 경우,『잘하지도 못하고』『잘되지도 않는 것』이 가톨릭 역사의 뚜렷한 경험입니다.

성직자가 스스로의 정의감을 믿고 사회체제를 바꾸자고 발언하기 시작하면 『그 분야의 경험』이나『그 분야의 전문이론』이 없으므로『직관』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직관은 지구가 돌지 않고 태양이 도는 것으로 봅니다.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만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 5월 12일에『사제는 사제여야 한다. 정치는 평신자의 책임이다』라고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konas)

 


이 글은 임광규 변호사(前 반핵반김국민협의회 운영위원장)가 카돌릭 평신도들이 운영하는 '광야의 소리'(http://www.aware.co.kr/)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 입니다.


200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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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

 

 

[....남침 후 한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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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엄청난 지원에도 불구하고 월남은 1975년에 망했다.
천만에 이르는 이들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끌려가 서서히 죽어갔다.


106만여명의 난민이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보트를 타고 도망쳤다.
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월남 정부에는 간첩이 많았다.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인도주의자로 위장했다.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수천만 민족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죽고, 갇히고, 신음하고, 도망한 이후에야 알려졌다.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다.
티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 후에야 알려졌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여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 말이 미국에 반전여론을 자극했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했다.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며 파리 평화회담에 반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악착같이 데모를 주동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전략을 추구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5년간을 끌어오던 베트남전이 종식되었다.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 종이조각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문서였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다.

캐나다,이란, 헝가리, 폴란드 등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다.
월맹의 외무차관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다.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모두가 환상이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다.


매년 80만 ~ 100만톤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부정부패에 망했다.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에는 수많은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 속에는 혁명정부 청사까지 들어서 있었다.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내용이 단 하루만에 여기에 보고되었다.
티우가 공산 프락치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


가장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하여
정치인, 관료들이 간첩이었다.
이는 망한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들이다.
정보기관에 가장 많은 간첩이 들어 차 있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경제 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무드에 들 떠 있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좌익이 시민, 종교단체를 장악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팀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
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정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암살과 각종의 압력들이 사회적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어
그들의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이 침묵했다.

 

1975년 1월 8일, 드디어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이
월남 공격에 투입되었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되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부패했던 군인들이 앞을 다투며 가족을 데리고
배와 비행기로 탈출했다.
남침 후 한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4월 30일 정오, 월맹 탱크부대가 독립군을 점령했다.
5명의 월남 장군들이 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되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월남군 부대시설을 개조한 것이다.
한 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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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월맹군은 푸옥롱省의 省都인 푸옥빈을 점령했다. 월남전 사상 성도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도 탈환되지 못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고 다음 단계의 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전해의 의회 결의로 인해 포드 행정부는 이런 중대한 협정위반행위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키신저는 월맹상공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필리핀 수빅만을 출항하여 인도양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월맹의 통킹만으로 접근시켜 월맹측에 경고하는 방안을 내어놓았다. 월맹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대한 협정위반을 한 월맹은 오히려 미국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편승했다. 포드 행정부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의회와 언론은 더 큰 협정위반자인 월맹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에 덤벼들었다. 미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변명해야 할 판이었다. 미 국방부는 의회로부터 국방예산 심의를 받아야 할 시점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수빅만을 출항하자말자 하노이는 또 다시 미국이 침략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쳤다. 미 국방성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통킹만 접근계획을 취소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방어 의지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수상 팜 반 동은 “우리가 미국에 뇌물을 주어서 개입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을 구해보려고 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 가는 월남정부에 대해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을 하려고 미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비난해오던 반공의 보루 헨리 잭슨 상원의원도 “인도지나의 문제는 3억 달러의 무기구입비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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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노벨 평화상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越盟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하여 월남전의 휴전문제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수상 결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지난 1월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서명되자 전세계적으로 평화에 대한 희망과 환희가 물결쳤다. 휴전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의 理想에 맞추어 일했는 바, 국제분쟁은 전쟁이 아닌 협상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월남전 당사자들이 전쟁으로 상처 받은 인도지나 반도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월남의 휴전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인 책임을 공유할 것을 희망한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1년 반 뒤 월남의 평화협정은 월맹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깨지고 월남은 공산화 통일되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도 모르고,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생리도 모르는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두 사람에 대해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차라리 코미디이다.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反戰 시위대의 출현을 겁내 수상식엔 불참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의 수상자 결정 이유문을 읽고 있노라면 이들이 전쟁의 속성, 국가의 생리,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전략에 대해서 너무나 무식한 데 놀라게 된다. 순진하다고 할지, 위선이라고 할지.

 

키신저와 레둑토가 합의한 월남휴전협상안을 미리 읽어본 朴正熙 대통령은 柳陽洙 駐越대사에게 “이런 문안에 합의하면 월남은 1년안으로 공산화된다”면서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충고해주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柳陽洙 대사에게 티우 대통령은 자신도 朴대통령과 동감이라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키신저와 레둑토는 월남정부를 빼돌리고 월남민의 운명을 결정할 비밀협상을 진행해왔는데 그 협상안이란 것이 가관이었다.

 

그때 17도선 이남의 월남 땅에는 약14만의 월맹 정규군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월남출신의 베트콩을 지휘하고 있었다. 월남정부를 따돌리고 미국과 월맹이 합의한 휴전안에 따르면 이 월맹군의 현위치 주둔을 허용하면서 駐越미군의 全面철수를 규정했다. 더구나 월남에 세워질 연립정부는 월남과 월맹, 베트콩 3者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연립정부는 공산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정부가 될 것임을 티우도 간파했다. 티우에게 이 휴전안을 수용하도록 강요한 것은 키신저였다. 그는 재선된 닉슨 대통령이 취임식을 갖기 전에 월남평화협정을 발효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티우는 키신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티우 대통령이 요구한 보장책으로서 미국은 닉슨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깰 때는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미국 의회가 월남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동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월남은 버림받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5년 봄 월맹은 정규군을 앞세운 남침으로써 월남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안보 보좌관이던 키신저. 그는 월남에 있던 미국인들과 월남인 협조자들을 사이공 함락 전에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월맹측에게 잘 이야기하여 탄손누트 공항을 포격하지 말도록 부탁해달라”는 간청까지 했다. 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좀 세워달라는 당부였다.


자신이 합의해준 평화협정을 미국측이 지키지 못한 바람에 월남이 무너져내리고 있던 그날 키신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1999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인용)


“4월21일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은 미국이 (월맹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준수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월남에 대한 원조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비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는 티우가 협상을 통한 결과도출에 방해물이었다면서 이제는 파리협정에 의한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티우는 미국을 증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를 미워했다. 내가 월남에 있어서 미군 개입을 종결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와 명예심으로써 조국을 위해 일한 그를 존경했다.


反戰 운동가들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는 결코 평화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와 그의 조국은 이런 운명을 맞기엔 억울했다. 내가 만약 가련한 처지가 된 우방국에게 우리 의회가 원조를 중단하는 결의를 할 것이라고 예견했더라면 나는 1972년 마지막 단계의 협상에서 (그에게) 무리한 압력을 넣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후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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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은 베트콩과 월맹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었다.

이에 비해 월남군은 115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월남 공군은 1,800대나 되는 공군기를 가진 세계 제 4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도 보급도 모두 공산군보다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월남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 후퇴만 했다.

후퇴마저 제대로 못 해 수백대의 전투기를 공산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었다.

월남군이 공산군에게 넘겨준 무기는 무려 50억달러어치나 된다.

 

다낭에서는 공산군이 공격해 온다는 풍문만 듣고 군대가 배를 타고 후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도 공산군이 왔다는 소식이 없어

다시 상륙해 시내에 들어가보니 아직 공산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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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패망 2년 전인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미국과 남북베트남 3국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월남에 있던 외국군대가 모두 철수하게 됩니다. 당시 남베트남은 수적인 군사력으로는 북베트남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습니다만 쉽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월남상황을 설명해 주십시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파리 평화회담에서 남북이 앞으로 싸움 하지말자고 결의했다. 그래서 남쪽이 베트콩과 협의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절대 우리민족끼리 싸우지말자고 했는데 북쪽은 달랐다. 어떻게든 미국을 내쫓고 남북통일, 즉 적화통일 하겠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패하기도 했다. 군대가 강하고 장비가 좋고 그래도 소용없더라...경제가 암만 우위고 잘살아도 그것이 적을 막아낼 수는 없다. 결국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하는데 그게 없었다. 나도 놀랐다. 하루 아침에 베트남이 우르르 무너지는데 어쩔 도리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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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패망이후 상당기간 억류된 생활을 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체포됐을 때의 상황과 수감됐을 때의 고초, 귀환경위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치화형무소에서 보낸 5년은 정말 끔찍했다. 5년동안 한번도 면회도 안되고 햇볕은 298일만에 쪼였다. 사형수방에만 2년 1개월 갇혀있다보니 말할수 없이 처절한 생활이었다. 알다시피 치화형무소는 동양에서 가장 악명높은 형무소다.
이번에 월남갔을 때 거길 가봤는데 엣추억은 무조건 아름답다고 하잖냐...근데도 눈물이 핑 돌더라...


거기서 하루 두끼밖에 못먹었다. 국은 멀건 호박국이 전부다..호박 하나에 한 500명 정도 먹게 만들거다.원래 몸무게가 78킬로그램이었는데 나중엔 40킬로까지 살이 빠지더라. 거기다 오래 갇혀있다보니 허벅지며 팔 다리 모두 구더기같은 게 생기는데 알고보니 피하조직이 파괴되서 그렇다고 하더라. 배가 고파서 바나나 2개 먹어봤으면...이가 아파 죽겠는데 누가 약이라도 보내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지냈다. 아마 이북의 정치수용소가 그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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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독 사회 각계에서 동독에 협력한 ‘비정규 정보원’의 규모는 무려 2만명이 넘고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한 ‘의원요원’들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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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후 독일연방 정보기관(BND) 및 수사기관은 무려 7000여건의 국가반역범죄 행위를 적발했고, 동독을 위한 간첩 활동 혐의자로 300명을 구속한 바 있다. 서독 사회 각계에서 동독에 협력한 ‘비정규 정보원’의 규모는 무려 2만명이 넘고 심지어 서독의회(분데스타크) 내에서 한동안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한 ‘의원요원’들이 활동했었다고 한다`(후베르투스 크나베, ‘슈타지 문서의 비밀’). 이들 슈타지 협조자들은 특히 시민운동 단체와 언론, TV 및 대중매체 그리고 대학 및 연구소들에 집중적으로 침투, 포진하여 서독의 대 동독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의 각종 이론 개발과 선전선동술을 공작했으며, 특히 ‘동독눈치보기’를 적극적으로 유도했었다.

 

1972년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최측근 비서였던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이었다는 사실 말고도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저명했던 베를린자유대학의 한스 야콥젠 교수도 동독의 거물 간첩이었고, 송두율씨가 벤치마킹한 ‘내재적 동독 접근법’의 창시자인 피터 루츠 교수도 위장첩자였음이 밝혀져 독일 지성계를 경악시켰다. 더욱이 이 모든 간첩 행위는 서독판 햇볕정책이었던 ‘동방정책(Ostpolitik)’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집중적으로 이뤄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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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장일순 = [....지금 베트남에서는 불교와 호치민(胡志明) 세력이 연대하고 있네. 남미에서도 가톨릭이 혁명세력과 함께 전선에 선 데도 있어......]

 

 

 
 


 

     [   김지하 --- 장일순  ]

 


 1965. [....1965년 늦봄, 한일조약비준반대운동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 불교도 좋지만 가톨릭에 기대해 보는 것이 어떨까?  .....]

 


 [...합법적 개량주의적 대중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좁쌀 한 알

최성현 | 장일순 | 도솔 | 200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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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일이 생각난다.

내가 선생님을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뵙고 첫 가르침을 받은 것은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뒤인 1965년 늦봄, 한일조약비준반대운동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정당이나 정치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간디와 비노바바베의 실천실례에서 배우자. 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회 변혁의 정열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지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불교도 좋지만 가톨릭에 기대해 보는 것이 어떨까? 

1962년에서 1964년까지 2년에 걸쳐 바티칸은 대규모 공의회를 열었다. 최고 명제는 개인 구원과 함께 노동 문제나 제3세계 문제 등 사회 참여를 결정한 것이다. 가톨릭과 민중민족사상을 한번 결합해 보자!"


 원주에서 교황들의 회칙과 공의회 공부 모임이 계속되고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합법적 개량주의적 대중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야말로 아집과 과격과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대중에 대한 봉사운동을 시작했으니 그것이 이미 '밑으로 기어가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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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壹淳 [조용헌 살롱 / 조선일보 2006.03.14 ]

 

‘원주의 도사’라고 불리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1928~1994).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나는 인물이다. 무위당이 생전에 남겼던 향기는 그의 지인들과 제자들을 통하여 멀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시인 김지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쓴 이현주 목사, 판화가 이철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전 영남대 교수, 해월(海月) 전문가인 박맹수 원광대 교수 등이 무위당과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이다.

김지하는 중학교 때 원주에 거주하면서 무위당과 인연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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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지하 회고록에서.  ]

 

 

1965.장일순 = [...지금 베트남에서는 불교와 호치민(胡志明) 세력이 연대하고 있네. 남미에서도 가톨릭이 혁명세력과 함께 전선에 선 데도 있어. ....]

 

132. 청강 (靑江)

 

1965년 초여름 언젠가 원주(原州)에서 감옥에서 출옥한 지 불과 몇달이 안되는 장일순(張壹淳)선생을 만나 술과 밥을 먹은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이미 한일조약(韓日條約)의 국회비준(國會批准)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된 뒤이다. 분명 시간적으로 뒤인데도 의미적으로는 그 앞에 위치한다. 기억이란 가치론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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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강 선생과 손을 잡고, 얼푸시 그분을 모시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마 그 날 술에 대취(大醉)했던가 보다. 선생에게, 내가 너무 좋은 나머지 건방을 떤 모양이다. 악어 형이 나를 밖으로 끌어내서 한대 쳤다. 그러자 나는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동규 형이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또 다시 껄껄 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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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직후의 총선에서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원주에서 출마도 했으나 5·16후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오신 뒤부터는 생각이 달라지셨다고 한다. 그날 술이 좀 깬 뒤에 이런 말씀을 했다.

 

“지금 베트남에서는 불교와 호치민(胡志明) 세력이 연대하고 있네. 남미에서도 가톨릭이 혁명세력과 함께 전선에 선 데도 있어. 카밀로 토레스 신부(神父)가 그 예야.

이것은 아마 새 시대의 새로운 조류(潮流)라고 생각해.


지금 가톨릭에서는 1962년부터 지난해 1964년까지 3년간 제 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를 열고 인간의 개인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함께 추진하는 문제를 검토했다고 하네. 아직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나 몇 년 안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아. 벌써 여러해 전에 교황(敎皇)들의 사회와 정치와 노동문제들에 대한 칙서가 발표된 일이 이미 있으니까.


감옥에서 많이 생각하고 또 나와서 생각한 것인데 이제는 정치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돼. 정당 같은 것으로는 소용 없어. 종교를 우회해야 하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에 사활이 걸렸네.

이미 동양에서는 인도의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예(例)가 있지. 힌두교와 인도철학을 배경으로 영국식민주의에 저항하며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천민(賤民)계급을 해방하는 여러 운동을 전개한 예가 있으니까.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불교도 중요시하지만 우선 가톨릭, 그것도 새로운 혁신적 가톨리시즘에 기대를 건다네. 전 교황 요한 23세께서 영면하시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나!

“답답하다
창문을 활짝 열어라!”


“지금 가톨릭은 어둡고 답답해. 그러나 이제 창문을 열기 시작하면 개인 구원과 사회 변혁의 새로운 에너지원(源)이 될 거야. 그 힘을 타고 개혁과 민주화와 통일의 길을 찾아 보세. 그 과정에 우리 나름의 새로운 사상과 노선과 세력과 근거가 나타나지 않겠나!”

 

한기호 형과 이동규 형이 다 함께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판단 이전에 많이, 깊이, 넓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리라 다짐했다. 혹 이것이 내가 찾는 ‘내면의 평화와 외면 사회의 변혁의 통합’ 곧 ‘요기 싸르’의 길은 아닐까.


술은 이미 다 깨어 버렸다. 청강 선생이 다시 술을 권했다. 청주를 큰 자장면 그릇에 따라 주셨다.
다 마셨다. 또 따랐다. 다 마셨다.
따르고 마시고 따르고 마시고.


캄캄한 내 마음 허공에 반짝 푸른 별 뜨듯 영롱한 몇가지 생각들이 사뭇 샛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이 내 생애(生涯)에서 중요한, 매우 중요한 날이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들어 사는 좁은 방구석으로 들어가 누웠다.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이날 이후 이른바 ‘원주캠프’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요기 싸르’에의 꿈! 그 가능성에 미소를 띤 채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어갔다.

 

 

 


194. 물 흐르는 곳

 

지친 나는 원주에 내려가 청강 선생과 이 모든 문제들을 의논했다.

“잠시 여기 와서 있게.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지.”


원주 봉살미 아래 봉산동 청강 선생의 자택(自宅)에 내가 머무르던 무렵이다. 교황들의 여러 회칙과 방대한 공의회 문헌들을 읽으면서 지내던 무렵이다.


홍수가 날 때 외에는 물이 말라 나날이 더러운 개굴창으로 변해가는 봉천 냇가에, 노을 무렵 혼자 앉아 우연히 지녔던 꼬투리 연필로 담배 속종이에 꾹꾹 눌러 쓴 한편의 시는 나의 종교우회론에 의한 가톨릭 입교(入敎)와 지방 소도시 거점론에 의한 정치사상으로서 전혀 새로운 원주캠프의 개척 그리고 당(黨)으로서의 전선이론, 전선 당운동의 개척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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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 선생과 함께 간디즘과 비노바 바베의 경제노선, 몽양(夢陽)과 중도좌파의 검토, 가톨리시즘과 동양종교, 그리고 마오쩌둥과 한국의 합법적인 주민·시민개량운동, 민중민족노선 등에 관해 매일 끊임없이 토론했으나 결론은 꼭 하나였다.

혁신적 가톨리시즘을 토대로 한 민중민족노선, 합법적인 신용조합운동이나 합법적 근로자·농민운동 속에서 점차 진정한 민족의 새 이념과 통일의 주체를 길러내는 것, 그것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종교우회론, 소도시거점론, 당으로서의 전선론이 검토되었으며 인간의 내면적 혼(魂)의 평화와 외면의 사회적 변혁의 통합이 총체적인 목표로 설정되었다.

 

이른바 원주운동의 명제(命題)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원주 사람들과 가톨릭쪽, 그리고 서울의 내 친구들과 언론계 혹은 야당 일각 등에 대한 설득과 조율의 시간을 벌어야 되었다. 나는 용기를 가지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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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가 주류가 돼야 한다.....]

 

 


    2011.6.

 


[   강기갑 -- 백낙청 -- 진보의 합창 -- 문성근 -- 신영복 -- 오종렬   ]

 

 

[....진보의 합창은 진보정치가 주류가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가 축사를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명예대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등 각계 인사가 영상 축하메시지를.......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가 참석......]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573

 

시민정치 캠페인 '진보의 합창' 공식 출범

지난 3일 출범대회서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 선언


    
 승인 2011.06.07         
 

 

최근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가 최종 합의문을 이끌어 낸 데 이어 이를 견인하고 압박해 나갈 시민정치 캠페인 ‘진보의 합창’이 공식 출범했다.


진보의 합창은 지난 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신언직·이정미 진보의 합창 공동집행위원장의 사회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범대회를 가졌다. 진보의 합창은 출범선언문을 통해 “지난 1일 연석회의가 역사적 합의를 도출했다”며 “분열의 상처를 딛고 성찰과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 낸 값진 성과이자 승리”라고 평가했다.
 


진보의 합창은 진보정치가 주류가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이제 진보정치가 희망이 돼야 한다”며 “빛과 소금의 정치세력이 아니라 진보정치 주류화로 정치지형을 재편하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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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합창은 4월20일 1차 제안을 시작으로 이달 현재 1천562명이 제안자로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1만명의 합창단을 기반으로 진보정치 캠페인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날 출범대회는 연석회의 최종합의를 축하하면서 흥겨운 분위기로 진행됐다. 조국 서울대 교수와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가 축사를 했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명예대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등 각계 인사가 영상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권영길·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그맨 노정렬씨가 정치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1.8.  [   문성근 -- 민노당  ]

 

 

  [.... 이 세력(혁신과 통합 그룹)을 믿으면 된다....

   .....제3세력과 힘을 합치면 민주당을 얼마든지 강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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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당들은 대통합에 부정적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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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한-EU FTA나 KBS 수신료 등에서 보여준 민주당의 태도, 불신할 만하다. 그러나 민주당을 믿지 말고, 제3지대에서 연합정당으로 모이자는 이 세력(혁신과 통합 그룹)을 믿으면 된다. 민주당을 믿으라는 게 아니라, 이 세력을 믿으라는 거다. 제3세력과 힘을 합치면 민주당을 얼마든지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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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5190


 
"6월항쟁도 했는데 야권통합 못해?
진보정당 명망가 중심 사고 버려야"

[인터뷰] '백만민란' 1년 맞은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
 
11.08.23

 

 

 

 

 


      노사모 문성근 = [.... 선거 때마다...정당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찍었죠......]

 


 [....동학농민혁명 이후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이루자.....]


 [....우금치...거기서 2만명이 횃불을 들고 서울로 진격하는 집체극을.....

       그는 아예 횃불 대신 낫을 들고 나갈 참이란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44250.html


유쾌한 ‘민란’씨, 야당 묶어세울 ‘죽창’ 들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야권단일정당’ 100만 민란 운동 문성근씨

 
 
  김의겸 기자 고나무 기자 이종찬 기자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 일가의 혈관에는 동학농민군의 피가 흐르는가 보다. 문 목사는 생전에 “통일은 동학전쟁 때 못 이룬 농민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절규하곤 했다. 큰아들 문호근은 가극 <금강>의 초연 연출자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그리면서 분단의 아픔을 짚은 작품이다.

 

셋째아들 문성근은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지지를 호소하며 “동학농민혁명 이후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이루자”고 가는 곳마다 외쳐댔다. 그러니 문성근씨가 총선과 대선이 있는 2012년까지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자며 이 운동에 ‘100만 민란’이란 불온한 이름을 붙인 건 새삼스러울 게 없는 거다.

 

문성근은 내친김에 더 나아간다. 다음달 13일 회원 2만명 돌파 기념 콘서트를 여는데, 장소가 우금치다. 30만명의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500명만 살아남았다는 핏빛 땅이다. 거기서 2만명이 횃불을 들고 서울로 진격하는 집체극을 벌일 거란다. 그는 아예 횃불 대신 낫을 들고 나갈 참이란다. 원한 서린 곳에서 다시 꿈틀거리며 부활하자는 것이다. 120년 전 패배의 땅이 우금치였다면, 그에게 뼈저린 실패는 2007년 대선일 수도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떨어져 숨진 부엉이바위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가 지난 8월28일 서울 대한문 앞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나눠주는 ‘100만 민란’ 회원 가입서는 동학군에게 들려주었던 죽창인 셈이다.


문씨와의 인터뷰는 14일 서울시내 커피숍에서 했다.


- 왜 하필 ‘민란’이라는 표현을 썼나요?

“백낙청 선생인가한테 설명을 드리다가 어느 순간 ‘이 운동의 성격은 민란입니다’라고 얘기했죠. 말해 놓고 보니 ‘아! 민란이 핵심이구나’라는 느낌이 확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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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저는 선거 때마다 후보는 될 사람 찍고 정당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찍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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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크탱크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은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승리하는 비법’을 주제로 ......]


[...‘혁신과 통합’(가칭)을 9월 6일 창립할 계획이다.......]

 


진보진영의 ‘진지’로 떠오른 노무현재단

박국희 조선일보 정치부

 


회원 20만명, 매달 회비를 내는 회원만 3만여명, 지난해 후원금만 약 50억원. 9월이 되면 설립 2주년을 맞는 노무현재단의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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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은 지난 2009년 9월 23일 설립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꼭 4개월 만이었다. 초대 이사장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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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 인사들 결집체


문 이사장을 필두로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이재정 전 국민참여당 대표, 정연주 전 KBS 사장 등이 임원을 맡고 있다. 그밖에 각종 사업별로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등 참여정부 인사들이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주군을 잃고 갈 곳 잃은 친노(親盧) 진영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노무현재단이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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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는 노무현재단을 내년 총선과 대선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조직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노무현재단 자체가 바로 정치조직으로 탈바꿈되거나 그 자체만 가지고 정치활동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친노를 포함해 정치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세력들이 재단을 모태 삼아 새로운 단위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고 했다.

실제로 노무현재단은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재단의 전국화를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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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총리는 문 이사장 등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통합 추진 모임 ‘혁신과 통합’(가칭)을 9월 6일 창립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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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친노 세력의 싱크탱크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은 8월 23일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노무현 정책학교’를 운영한다.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승리하는 비법’을 주제로 문재인, 이해찬, 한명숙, 조기숙, 변양균, 문정인, 성경륭 등 참여정부 인사와 친노 교수들이 강사진으로 참여해 재정, 외교·안보, 민주주의 등에 대해 강의한다. 연구원 관계자는 “총선 출마를 희망하는 친노 진영의 인사들이 주요 대상자”라며 “현재 60여명이 등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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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저 동녘 200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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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진보의 미래’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육필 원고이다. 노 대통령은 생전에 이 땅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한 권의 책을 엮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1부는 그 미완성 원고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국가의 역할’,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 ‘보수의 주장, 진보의 주장’, ‘한국의 진보와 보수’, ‘시민의 역할’ 등 노무현 대통령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느낀 문제의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2부 ‘진보주의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참모진과 학자들에게 구술한 내용이다. 연구 모임은 2008년 12월에 시작해 서거하기 직전인 2009년 5월까지 이어졌는데, 원고는 주제별로 나누어 재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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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5.

 


[....참여연대가 민주노총 짝사랑을 더 세게 했으니까요.(웃음) 앞으로 재벌개혁 등 민주노총과 함께 결합하는 활동을 자주 벌였으면 좋겠네요." - 참여연대 박원순......]

 

[....울산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낮에는 낙선운동을 했고, 밤에는 민주노동당에 가서 선거운동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07085    
 
  
 
"우린 서로 짝사랑만 했어"

개혁의 쌍두마차, 민주노총과 참여연대의 만남
 

00.05.08
 
 

 
"너무 일방적으로 그쪽을 짝사랑을 했던 것 같네요"

"아닙니다. 이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쪽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 대화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대화내용이 아니다. 5월 8일 오후 12시 광화문에 있는 한 횟집. 오랫동안 서로를 짝사랑했다는 민주노총(위원장 단병호)과 참여연대(공동대표 김중배,박상증, 박은정)가 만났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두 단체는 서로가 상대방을 '짝사랑'했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총선과정에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민주노동당) 당선 운동하고, 참여연대는 낙선운동하고... 민주노총에서 너무 일방적으로 참여연대를 사랑하고 있던 것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한 마디로 애증관계였었죠" -민주노총 이수호 사무총장

 

"민주노총에 대해 불만은 없습니다. 짝사랑의 강도로 이야기 하자면 참여연대가 민주노총 짝사랑을 더 세게 했으니까요.(웃음) 앞으로 재벌개혁 등 민주노총과 함께 결합하는 활동을 자주 벌였으면 좋겠네요." -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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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낮에는 낙선운동을 했고, 밤에는 민주노동당에 가서 선거운동을 벌이는 부적절한 운동을 펼쳐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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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참여연대 김중배 대표가 말을 받았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가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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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4.


 
낙선운동의 과실, 진보정당이 따먹길 바랬다

박원순 변호사 열린 인터뷰 2

 

 
0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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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운동은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한 운동이었다. 나는 누차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그럼 누굴찍으란 말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도 말을 못했고,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도 대안은 될 수 없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당의 역할이라고 본다.


기존의 보수, 부패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새로운 정치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따라서 진보정당이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를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또한 다른면으로는 진보정당에서도 포부를 크게 갖고 선거에 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정당을 하겠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민주노동당이 정당을 하겠다면서 한두명만 당선시키겠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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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05421
 
 
 

 

 

 


 *   2007.2. [  박원순 -- 민노당  ]

 

[....박원순_ ......

 ....브라질의 룰라가 집권했는데 우리라고 못하라는 법 없다.......]

 


    첫화면 > 당활동 > 이론과 실천 > 2007년 2월호  
   

   [대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비전, 철학, 컨텐츠가 필요하다”
 
 

지난 12일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이상현 민주노동당 기관지위원장은 ‘2007년 대선정국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내용으로 대담을 진행하였다. _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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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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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국민승리21 시절에 얼마 후에 집권하느냐고 물었더니 한 20년 얘기하던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20년 얘기하면 집권 안하겠다는 것과 같다.

브라질의 룰라가 집권했는데 우리라고 못하라는 법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게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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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3.5.

 


[.... 한 목소리로... '친노 세력에 의한 구 민주계 학살'이라고 규정.......]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640871&g_menu=050220


 
"친노 계파의 호남·민주계 학살"…민주 공천 후유증  
 
공천 탈락 최인기·강봉균·조영택 반발, 무소속 출마도 배제 안해


2012.03.05.
             
 
 

[채송무기자] 민주통합당 호남 물갈이의 대상이 된 의원들이 이번 공천 결과에 대해 '민주계·호남 죽이기'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의 정부 각료 출신인 전북 군산의 강봉균, 광주 서구갑 조영택, 전북 전주완산갑 신건, 전남 나주화순의 최인기 의원은 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공천 결과는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원칙도 기준도 없는 전형적 코드, 밀실공천"이라고 비판했다.

 

공천 탈락 의원들은 한 목소리로 이번 공천을 '친노 세력에 의한 구 민주계 학살'이라고 규정했다.


이들 의원들은 "강철규 공심위는 결국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며 "당은 공천을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했지만 특정 계파를 위해 압도적 지지율 1위 후보들을 밀어냈다. 이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나"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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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을 김재균 의원도 기자회견을 열어 "4.11 총선을 통해 당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특정세력은 이미 공천 심사 전부터 누구를 탈락시킬지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공천 탈락의 기준과 원칙을 꿰맞췄다“며 "이번 공천심사는 오로지 특정 정치 세력의 옹졸한 계파 챙기기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공천 탈락 의원들은 이날 "무소속 출마 여부를 지역 유권자와 지지자와 논의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해 지난 18대 총선과 같은 무소속 연대 출범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호남지역 소속 의원 28명 가운데 단 4명에게만 최종 공천권을.......]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20305000531 
           
      
민주, 호남 현역 4명만 살아남았다...관료ㆍ구민주계 쑥대밭, 편파공천 논란


2012-03-05
         

 

 

민주통합당이 5일 호남지역 소속 의원 28명 가운데 단 4명에게만 최종 공천권을 넘겨주는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반면 구 민주계와 정체성ㆍ도덕성 논란을 빚었던 의원 6명을 공천에서 배제했고 나머지 대다수 지역구도 경선 관문을 통과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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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 발표된 공천과 관련, 벌써부터 말이 나오고 있다. 한ㆍ미 FTA 비준안 처리 과정에서 중도적 입장을 보였던 강봉균 의원(전북 군산), 최인기 의원(전남 나주ㆍ화순) 등이 나란히 공천에서 탈락함에 따라 ‘협상파 학살’ 논란 등 편파 공천 후유증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 공천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김진표 원내대표 역시 관료출신ㆍ협상파의 대표주자라는 점에서 거취가 주목된다.


강 의원은 즉각 “그동안 당론에 충실했다”고 반발했고, 최 의원 측은 “말만 앞서는 정치인보다 실제로 당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본인이나 부인의 부적절한 처신도 공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건 의원(전북 전주 완산갑)은 국정원장 재임시절 불법 감청ㆍ도청을 했던 사실이 공천 탈락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재균 의원(북을)은 부인이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사실이 걸림돌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호남지역에서는 박상천 장세환 의원 등 2명이 이미 불출마를 선언했고, 정세균ㆍ김효석 의원 등 4명은 수도권에 출마한다. 광주동구 지역은 선거인단 불법모집 의혹으로 무공천 지역이 됐다. 이날 공천 탈락자(6명)를 포함하면 현재까지 민주당의 호남권 물갈이 대상 지역은 모두 13곳으로 늘어나는 셈으로, 호남의 지역구 수(30곳)를 고려하면 이미 50%에 육박하는 공천 물갈이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23곳은 경선 지역으로 지정돼 현역 의원들의 물갈이 폭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직 의원들이 경선에 참여하는 지역구(광산구갑 등 3곳)도 있어 현역 의원들이 마냥 경선 승리를 낙관하긴 어렵다. 한편 민주당의 호남 공천에서 살아남은 현역의원은 박지원, 이용섭, 우윤근, 주승용 등 4명에 불과하다.

 

 

 

 


[..... 주류에 의한 비주류 탄압으로 경선 기회조차 주지 않고.....

  .... 친노·486 인사가 득세하고, 비주류가 배제......


  .... 구 민주계가 완전히 배제된 공천을 ...면접은 형식일 뿐......]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640531&g_menu=050220

 

민주통합당 공천 갈등 '확산일로'…舊 민주계 등 반발 거세  
 

한광옥 탈당 "한풀이 정치로는 정권 교체 안돼", 무소속 연대 가능성도 제...

 

2012.03.02. 금 15:01 입력
 
             
 
 

[채송무기자] 민주통합당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역대 선거마다 공천을 둘러싼 갈등은 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당 주류에 의한 비주류 탄압으로 경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반발이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민주통합당의 공천에 대해 비주류 인사들은 친노·486 인사가 득세하고, 비주류가 배제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이들은 향후 상황에 따라 탈당 후 무소속 연대 등 집단행동에 나설 뜻을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한광옥(사진 왼쪽) 상임고문이 2일 탈당 기자회견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상임고문은 탈당 기자회견에서 "4.11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노세력은 당권 장악을 위한 패권주의에 빠져 개혁을 통해 정권 교체를 갈망하는 국민의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고 당의 공천을 맹비난했다.


한 상임고문은 또 "민주계 인사들은 98년 대선 당시 역사적인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고 정권재창출을 통해 참여정부를 탄생시켰던 선거혁명의 주역들"이라며 "정치적 수난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이번 공천 과정에서 반개혁 세력으로 몰려 탈락되고 지난 대선에서 정권을 빼앗긴 세력이 반성없이 민주통합당의 주류가 된 공천은 국민에게 외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수원 팔달의 이대의 지역위원장은 "통합에 반대한 인사라는 이유로 여론조사 1위인 나를 경선도 없이 배제해버렸다"며 "지금은 경력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으면 되지도 않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이 지역위원장은 "지금 당이 구 민주계가 완전히 배제된 공천을 하고 있는데 면접은 형식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사실상 결과가 정해진 공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다른 구 민주계 후보도 "지역에서도 오래 활동해 조직도 있고, 여론조사도 높았는데, 당이 친노 후보 만으로 압축했다"며 "더욱이 그 중 한명은 선거법 위반으로 과태료 처분까지 받았는데 아무런 감점도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민주계 후보는 "당이 전통적 기반인 호남과 동교동계 세력에 대해 세력 교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며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집단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몇 년동안 고생하면서 준비를 했는데 기회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정동영 의원의 측근으로 지난 2002년 '노사모' 핵심이었던 이상호 청년위원장도 공천에서 배제됐다.


이에 2002년 활동했던 노사모 일꾼들이 2일 영등포 민주당사에서 성명을 통해 "뇌물 수수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까지 공천을 주고, 여성위원장은 단수공천을 주면서 청년위원장을 2번이나 지낸 이상호를 배제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최소한 경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당 공천을 비판했다.


이들은 "당을 위해 일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들이 밀려나는 정당이 과연 미래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당 지도부와 공심위는 국민 지지를 잃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민주통합당에 경고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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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우리(전대협)들은 사회폭력혁명세력이었다"며 "더이상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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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전대협은 사회폭력혁명세력이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동호씨는 "자신은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이라며 "이 자리에서 반성문부터 쓰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씨는 "학교 때 조국통일그룹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잘못된 사상에 입각해 살았다"며 "당시 후배들에게 한국의 승리역사를 패배역사로 잘못 가르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애국운동세력은 좌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나처럼 친북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친북주사파 실태를 잘 공부해서 실질적인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과거 우리(전대협)들은 사회폭력혁명세력이었다"며 "더이상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88년 진행된 북한바로알기운동은 왜곡된 것이었다"며 "지금 좌파와 애국운동세력은 이념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남한의 학생운동과 좌파운동을 지도하는 세력은 김정일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씨는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할 때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투쟁지침과 북한의 혁명관을 단파라디오로 듣고 그 내용을 각 대학의 토론자료로 내려보냈다"며 "애국운동진영은 남한의 좌파를 성장시킨 배후(김정일)를 찾아 집중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애국운동의 전략적 과제는 북한민주화"라며 "선진강국으로 나가기 위해 좌파에 대한 총공세를 펼쳐야 하며, 애국운동세력은 민족민주주의, 개혁으로 포장한 친북좌파의 실체를 캐내기 위해 '신북한바로알기' 대중전선체 운동에 돌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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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3.

 


[.....소위 '개혁공천'은 '우파의 약화와 좌파의 약진'.....


 .....나이가 많은 보수성향의 국회의원들은 계파를 가리지 않고 퇴출된 것이 한나라당 영남권 공천의 특징이다......]

 

 


[.....노무현 좌파정권을..축출..한 국민들은....


 .....여야 정치권은 더 좌경화 되어가는 해괴한 반민주적인 정치현상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9086&section=section20

 

여야 공심위의 '개혁공천'은 좌파혁명?

 
좌파전력이나 행적이 개혁공천에 문제된 적이 없다


 
조영환 편집인  
 

 

 
박재승과 안강민 두 공천심사위원장에 의해 주도된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소위 '개혁공천'은 '우파의 약화와 좌파의 약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은 '우파성향의 고령세대는 숙정되고 젊은 좌파성향의 신진세대가 약진하는 공천'을 개혁공천의 이름으로 연출했다. 특히 한나라당의 영남권 다선 의원들이 대거 탈락된 것은 영남권 우파세력에 대한 대학살로 평가된다.

 통합민주당에서 우파성향은 공천에서 불리했고, 한나라당에서도 우파성향은 공천에서 유리하지 못했다. 시시한 범죄경력은 공천탈락의 조건으로 문제삼으면서, 반국가적 이적행위가 여야 정당의 개혁공천에 문제된 적이 없었다. 정치적 범죄의 '낙타'인 이적행위는 삼키고 '하루살이'인 벌금형은 걸러내는 정치적 위선이 여야 정당의 소위 '개혁공천'의 기준이 되었다. '순혈 좌파세력의 강화'가 여야 공천의 기준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이다.


 
박지원, 김홍업, 김민석 등을 쳐내면서 언론으로부터 '박재승의 공천혁명'이라는 환호를 받았던 통합민주당의 공천에서 좌익행적이나 좌파성향이 문제가 되어 개혁공천의 탈락대상자가 된 공천후보는 없었다. 좌파는 우대받고 우파가 학대받는 공천에 통합민주당에서 벌어졌다는 게 김민석 최고위원과 김경제 최고위원의 불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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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을 초월하여 실용으로 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구호도 한나라당 공천에서 결국 나이든 우파성향의 다선 의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노무현 좌파정권을 묻지마식으로 축출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은 더 우경화되어 가는데, 여야 정치권은 더 좌경화 되어가는 해괴한 반민주적인 정치현상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충실한 국민과 좌파이념에 물든 정치권의 대치가 이번 여야 정당의 '개혁공천'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노무현 좌파정권의 깽판질에 진절머리가 난 국민들이 좌파세력을 퇴출시키려고 이명박 대통령을 뽑아놓았는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국민들의 뜻을 거스리면서 좌경화의 길을 걸으니, 앞으로 국민여론이 어떻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등을 돌릴지 궁금하다. 통합민주당이 더 순혈좌파세력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우파세력을 공천과정에서 축출하고 좌경화 되어가는 한나라당의 '어리석은 행로'를 국민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지 궁금하다.
 

 

여야 정당의 공천에서 '개혁의 기준'이 '고령과 다선'이라는 사실에 기득권자를 몰아내는 좌파혁명의 기준에 다름 아니다. 더 구체적인 것들을 살펴봐도, 한나라당의 공천은 나이든 우파세력을 숙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리를 수사한 안강민에 의해서 주도된 한나라당의 영남권 대학살은 이명박계와 박근혜계를 막론하고 3선이상 노년의 보수적 의원들을 70%이상 물갈이 하면서 한나라당 내의 노년 우파세력의 대학살로 규정해도 무리가 없다. 이상득(5선 73세), 정몽준(5선)과 정의화(3선)정도가 살아남고,  정형근(3선), 안택수(3선) 김기춘(69), 박희태(70), 박종근(70) 등 3선이상 고령 의원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나이가 많은 보수성향의 국회의원들은 계파를 가리지 않고 퇴출된 것이 한나라당 영남권 공천의 특징이다. 언론들이 李派냐 朴派냐의 계파적 기준으로 공천탈락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이번 공천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적 기준을 간과한 것이다. 우파성향의 원로들을 쳐낸 것이 한나라당 공천의 특징이다.

 

 다선이거나 고령이거나 보수적인 현역의원들이 대거 숙정된 이번 한나라당의 영남권 공천은 세력구도에서 이재오의 약진과 박근혜의 퇴진을 뜻한다. 한나라당은 명의적으로는 '이명박의 여당'이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재오의 한나라당'이 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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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진영(이재오 계열)은 영남권의 다선 고령 의원들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숙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던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강조한 것도 우파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한나라당 내 좌파세력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정치구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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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는 우경화된 국민들을 거역하면서 좌경화의 길을 가는 반민주적 정치세력이 여야 정당들에서 득세하고 있다.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여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존중하는 우경화가 강화되고 있는데, 정치권은 자꾸 낡은 좌파이념을 존중하는 좌경화가 강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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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이 대한민국을 완전점령 작살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대를 잇는 천만민족학살 핵공격 노예교 살인마는


'2012 통일강성대국'을 외쳐댑니다.


붉은 무리들은  모두모여  수구박멸 6.15통일만세를  합창합니다.

 

 

 

이제 대신 지켜주고 대신 싸워줄 곳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운동권망국독재를 타도해야 합니다.


운동권을 박멸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야 합니다.


선진대한 , 북녘해방, 통일대한을 이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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