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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지킴이 85] 팔봉면 어송2리 문창주 이장||“농사지어 부자되겠다는 농부 없습니다”
    팔봉면 어송2리 문창주(62ㆍ사진)이장에게는 타인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나 앞장서 끌고 나가는 지도력 등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주는 그에게서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겉보기에도 부드럽고 속은 더 부드러운 문 이장에게 문제없이 마을을 이끌어가는 비결을 물었다. “저는 남에게 강요해서 무슨 일을 관철시킬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라는 게 내주장만 갖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상대편과 의논하고 협상해서 마무리해야지요. 그래야 만이 모든 일에 뒤끝이 없습니다” 문 이장은 이런 자신의 지론을 가정사에는 물론 마을일에도 그대로 적응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답답해하는 주민들도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20여년 만에 다시 이장 일을 보고 있는 문 이장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올해 초 이장을 다시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접한 레미콘 공장에서 공장을 증축한다고 나서는 바람에 마을이 발칵 뒤집혔죠. 마을주민들이 흥분해서 감정이 격해졌지만 그런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마을 지도자분들과 참 많이 의논하고 상대편 회사와도 많은 의견을 나눴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남의 의견을 더 많이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문 이장은 결국 양편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답을 찾으며 문제해결에 한층 가까워진 상태다. 도시밥 이라고는 한 그릇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100% 시골사람 문 이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당부를 남겼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어 놓으면 소득이 보장됐지만 지금은 쌀을 제외한 작물들이 가격이 들쑥날쑥해 보장이 없습니다. 농사지어 부자 되겠다고 생각하는 시골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힘들여서 재배한 농산물이 최소한의 생산비는 건질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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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03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9] 인지면 차2리||해방 이후 도지사 등 수많은 공직자 배출
    추수를 끝낸 넓은 들판은 마을의 발전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지면서 주민들에게 희망의 내일을 기약해 주고 있다. 인지면 차2리(이장 이천우)는 조선시대에는 노지면 우산리라 불렸다. 그 후 1895년 행정 개편에서 차리, 임서리, 용연동으로 나뉘었고 20년이 지난 1914년에 3개 마을이 합쳐져 차리가 되었다. 차2리 인근의 서각산 주변에는 서우망월형의 명당이 있다는 구전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만산도라는 풍수서에 의하면 ‘서산에서 서쪽으로 이십리 지난 지점에 무소(코뿔소)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의 명당이 있는데 정승과 장군 같은 인물이 나와 영화를 누릴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영향인지 해방 이후 이 마을에서는 도지사, 국회의원, 군 장성을 비롯해 60여 명이 넘는 공직자가 배출된 진기록을 갖고 있다. 마을 어른들은 또 옛 명칭이 용연동(龍淵洞)이라 했는데 용이 승천한 연못이 있다는 마을로 큰 인물이 계속 배출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 특별한 소득원이 없어 다른 마을에 비해 빈촌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생강, 마늘 등의 특수작물을 재배하면서 서산지역의 대표적 부촌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생강 한 짝의 가격이 쌀 열 짝과 맞먹을 정도로 농산물의 시세가 좋았던 시절에는 아이스크림 장사들이 아이들이 가지고온 6쪽마늘 한통과 아이스크림 한 개를 바꿔주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수입농산물에 의해 생강과 마늘의 가격이 하락하고 있어 특수작물의 재배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겪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천우 이장을 중심으로 어려운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인터넷상에 마을 카페를 개설하여 마을 농산물 홍보, 농산물 직거래 등을 시도하고 있고, 고구마 주말 체험농장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직은 초창기 단계라 확연히 드러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 줄 새로운 희망이라는 생각 아래 마을주민들이 똘똘 뭉쳐 노력하고 있어 새로운 미래형 농촌의 모습을 보여줄 마을로 기대되고 있다. 차2리 사람들 어렵던 시절에도 한집에서 6남매를 모두 대학에 진학 시킬 만큼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는 마을이지만 지금은 인근의 초등학교에 입학 할 아이가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귀한 동네가 됐다. 마을을 도시 못지않게 발전시켜 사람들이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오도록 만들고 싶다는 희망의 소리와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천우(50) 이장 = 마을을 지나는 도로가 확포장 되면서 인접한 모든 부락에는 마을 진입로가 개설됐는데 유독 저희 마을만 제대로 된 진입로가 없어 마을주민과 마을을 찾는 손님들이 큰 불편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산국도관리청 등에 개선을 요구했지만 교통사고 발생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묵살하고 있어 주민들의 불만이 높습니다. 하루 빨리 개선책이 마련되어 주민들의 통행권이 확보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성남(70) 경로회장 = 특수작물 시세가 한창 좋을 때는 농촌도 살만했지만 지금은 수입농산물이 범람해서 농촌 가계가 어렵습니다. 풍수가 좋은 탓인지 인지면에서 경로회원이 65명으로 제일 많은 장수 부락입니다. 옛날처럼은 아니더라도 농촌 경기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윤수견(50) 부녀회장 = 9년 전에 귀농했습니다. 귀농을 생각하시는 분들께 한 말씀 드린다면 농촌생활이라는 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굳은 마음만 있다면 농촌생활처럼 멋진 일도 없다고 봅니다. 마을부녀회장에 인지면 생활개선회회장도 맡고 있는데 도시에서 살 때 보다 더 바쁘고, 활기차게 살고 있습니다. ▲박영수(53) 개발위원장 = 이 마을로 터전을 옮긴지도 23년이 지났으니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제가 느끼는 마을의 가장 좋은 점은 마을주민들이 한결 같은 단합된 모습으로 마을일에 열심히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각박한 세상이라 농촌 인심도 예전 같지 않지만 우리 마을만큼은 변치 않는 인심이 있어 늘 푸근합니다. ▲한태교(76)씨 =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으로, 요즘 시골학교에 학생이 없어 폐교가 느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철새들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신들이 알아서 날아 오 듯 우리 농촌도 살기가 괜찮아진다면 다시 사람들이 모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날을 빨리 만들기 위해 농촌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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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03
  • 마을지킴이(84) 음암면 율목2리 임창빈 이장||‘마을 발전 위해 마지막 고집 부리고 싶어’
    음암면 율목2리 임창빈(65ㆍ사진) 이장은 타고난 농사꾼이다.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는 그가 말하는 농군의 철학은 의외로 간단하다. “계산기 두드려 가며 농사짓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에 맞게 변화는 해야겠지만 약삭빠른 것보단 우직하게 열심히 하는 게 농사짓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죠. 평생 농사를 지어본 결과 열심히 하면 손해는 절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8남매의 장남으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일이 농사였다고 생각하는 그는 농촌의 앞날이 어둡지 만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젊은 시절 남의 논을 150마지기까지 임대해 지어본 적이 있다는 임 이장은 농촌을 등한시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고 있다. “소규모로 농사를 지어온 과거 우리세대들은 그동안도 어려웠고 앞으로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10년 뒤면 고령화된 농촌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대규모 경작 체제로 변화될 것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올바른 정신만 갖고 농촌에서 도전한다면 도시 월급쟁이 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농부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큰 임 이장은 17년 동안 이장을 맡아 오면서 마을을 위해 남다르게 봉사 해왔다. 특히 임 이장은 지난 1989년도에 농촌공사에서 난색을 표하던 마을경지정리 사업을 당시 국회의원을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관철시켜 고집 있는 이장으로 마을에서 소문이 높다. 올해가 마지막 임기라는 임 이장은 마을을 위한 마지막 고집을 하나 더 부리고 있다. “마을 내 도로가 너무 좁아 버스가 다니질 못하고 있습니다. 1.7km 정도 포장하면 되는데 예산이 항상 문제죠. 옛날처럼 부지런히 쫓아다녀 마지막으로 마을을 위해 일을 한번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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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8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8] 운산면 고풍리||서산지역의 무릉도원으로 불리기도 해
    고풍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마을 표지석. 옆에서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더욱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운산면 고풍리(이장 장춘남)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군장동, 운곡리, 무릉동, 고색리 등 4개 마을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협곡으로 농토가 작고 토질이 메마른 동네라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의미로 풍년 풍(豊)자를 마을 이름에 넣은 것 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확실한 기원은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군장동이란 마을이 서산지방에서 외부로 출입할 때 지나는 경로로 사용되어 크게 유명세를 탔지만 1975년 고풍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마을의 구전에 따르면 과거 이곳에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어 군장동(軍藏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최근 인접한 원평리에서 신라와 백제의 주도권 다툼이 한창일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이 발견되면서 이 전설은 역사로 바뀌었다. 마을 노인들은 수몰된 지역에 맑고 큰 시내가 흘러 은어를 비롯한 수많은 어류가 회유하는 광경이 장관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또 오랜 과거부터 괴질이나 전란 속에도 마을이 온전하게 보전돼 서산지역의 무릉도원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의 저서 조선팔도비밀지지에는 ‘바위와 폭포의 경치가 매우 기묘하여 아름답고, 북쪽에 강당동과 무릉동이 있어 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라고 고풍리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호산록에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상왕의 능과 연관하여 고풍리의 남다른 풍수에 대해 기록돼 있다. 최근 한우 특화단지의 최적지로 떠오르면서 인근 2개 마을과 합동으로 사업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고풍리는 뛰어난 자연경관과 인근의 관광자원 등을 활용하여 새롭게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고풍리 사람들 긴 협곡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고풍리는 열악한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부지런함과 순박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전형적인 우리의 농촌 마을이다. 주민들은 한결 같이 “이제는 좀 발전을 해야지 않겠냐”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인순(73)씨 = 19살 때 용현리에서 시집 왔을 때는 산에 아름드리나무가 흔했어요. 개울에는 다리도 없어서 징검다리로 건너 다녔죠. 양가 모두 한문선생님 집안이라 평생을 넉넉하게는 못 살았지만 자식들이 다 커서 잘살고 있으니까 후회는 없습니다. ▲김운묵(76)씨 = 변한거야 이루 말할 수 있나, 다 초가집에 오솔길만 있었지. 지금이야 도로 다 뚫리고 해서 다니기 좋고 살기 좋아졌지. 그래도 옛날에 저수지 생기기 전에는 마을 운치가 지금보다 좋았지. 개울에서 멱도 감고 물고기도 많이 잡고, 지금은 어디서 외국종들이 들어와서 다 잡아 먹어서 어렸을 적에 보던 물고기는 구경하기도 힘들어. ▲민한기(69)씨 = 처음 시집와서는 지금 저수지 중앙으로 걸어서 다녔어요. 큰 마을이었는데 저수지 생기면서 없어졌지요. 물속에 잠긴지 30년도 지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해요. 바라는 점이 있다면 버스가 좀 더 많이 다니고 막차 시간이 늦춰졌으면 좋겠어요. 차가 없으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 예요. ▲서은철(42)씨 = 바로 인근에 용현계곡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습니다. 고풍리도 물 좋고 산 좋아 조금만 신경 써서 개발하면 멋진 관광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민들도 마을개발을 위해 여러모로 생각하고 노력해야겠지만 정보력이 없어 어렵습니다. 시청이나 정부에서 농민들의 모자란 점을 보충해 주고, 지도해줘야만 농촌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공희(70)씨 = 이대로는 앞으로 살기 어렵고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해서 마을을 발전시켜야지. 마을이 부자가 돼야 좋은 일도 많이 하지. 요즘 노인정을 새로 짓고 있는데 마을에 돈이 없으니 참 어려워요. 시에서도 몇 개 마을이 모여서 한우를 키워서 식당도 짓고 특화단지를 만들어 보라고 하는데 이것도 돈이 많이 들어가서 선뜻 하기가 어려워요. 돈이 항상 문제인데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면 길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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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7
  • ● 제60회 도민체전 서산시선수단 화보||‘서산체육 웅비의 꿈’… 아산서 기지개
    제60회 충남도민체전이 지난 24일~26일까지 아산시 이순신종합운동장을 비롯한 아산시 일원에서 개최됐다. 서산시체육회는 이번 도민체전에서 최근의 성적 부진을 딛고 다시 웅비의 꿈을 키우며 다시 기지개를 켰다. 서산시선수단의 열정의 현장을 화보로 꾸몄다. 편집자 ▲‘개회식’ 24일 오후 6시부터 시작된 개막식에는 3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막이 올랐다. 서산시선수단이 단기와 함께 박병운 총감독을 앞세워 입장을 하고 있다. ▲‘선수단 결단식’ 24일 오후 서산종합운동장 농어민체육센터에서 개최된 선수단 결단식에서 유상곤 시장, 이철수 의장, 최기홍 교육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와 606명의 선수와 임원단이 참석하여 필승의 결의를 다졌다. ▲‘금메달 주인공’ 복싱 종목에서 유일하게 서산시에 ‘금메달’을 안겨준 선수에게 이은우 수석부회장이 상대방 선수와 함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있다. ▲‘금메달 주인공’ 남자 일반부 축구 결승에서 서산시선수단은 강호 천안시를 맞아 접전을 벌여 2대0 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남원 감독과 오한교 코치 그리고 한상억, 황정훈, 이원재, 윤인수, 박정화, 김재신, 송영종, 장문연, 김덕권, 윤은호, 이준구, 최준수, 장선윤, 이태형, 박은기, 최영래, 이종남, 김선학 선수가 서산시체육회 임원들과 함께 ‘우승’의 기쁨을 나누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직적 응원’ 이번 도민체전에 서산시는 시청 풍물단과 공무원, 주민들로 구성한 응원단을 투입해 결집된 힘을 과시했다. 26일 축구 결승 경기에서 조규영(수도과장)풍물단장이 응원석 앞에서 꽹과리를 두드리며 응원을 리드하고 있다. ▲‘게이트볼’ 영원한 감독 백남승 회장이 이끄는 게이트볼은 종합 5위를 차지했다. ▲‘인지초 배구 3위’ 금년에 창단된 인지초등학교 배구부가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육상 꿈나무’ 금2, 은2, 동1개의 성적을 올린 육상꿈나무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도 유일 메달’ 역도에서 음암중학교 김병오 군<오른쪽>이 85kg급에서 70kg을 들어 올려 용상3위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보디빌딩’ 12명의 선수가 출전한 보디빌딩은 종합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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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7
  • 마을지킴이(83) 팔봉면 양길3리 안석순 이장||“한과 회사 영업사원으로 불러 주세요”
    팔봉면 양길3리 안석순 이장(58ㆍ사진)은 7년째 이장을 하면서 자신을 양길3리 영업사원으로 부르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마을 특화사업으로 시작한 한과 판매에 열정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초창기 가내 제조형태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부녀회장님과 부녀회원들이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던 차에, 제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차량을 갖고 있어 부녀회장님과 함께 한과를 들고 직접 판매에 나섰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손님들이 한과를 주문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대성공 이었습니다” 한과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직접 키운 청정 농산물로 자급자족하고 있어 품질과 맛에 대해서는 전국 어느 곳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그는 마을주민들과 협의해 3년 전 한과공장을 설립했다. 그의 추진력과 적극적인 마을주민들의 호응으로 명절을 전후해서는 전국에서 밀려오는 주문을 소화해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이렇듯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안 이장과 양길3리 주민들은 어려운 농촌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된장공장을 서산시에 신청해 놓은 상태인데 서산시와 합작으로 할 것이냐, 단독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요즘 한참 심사숙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어 딱히 어느 것이 좋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마을주민들이 워낙 자신감에 차있어 무슨 사업이든 시작만 하면 100%로 성공하리라 확신 합니다” 한과에 쓰일 찹쌀도 부녀회원들과 수확해야 되고, 며칠 전 자매결연 맺은 서울 인수중학교의 초청으로 서울에도 다녀와야 해서 몸이 두개여도 바쁘다는 안 이장의 환한 웃음을 보니 우리 농촌의 어려운 현실이 잠시나마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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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0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7] 인지면 야당1리||금헌 유방택 선생 후손 서령 류씨 집성촌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에 ‘들말’ 이란 마을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인지면 야당1리(이장 양재만)는 1914년 행정개편 당시 야촌에서 야자를 취하고 원당리에서 당자를 따서 야당리가 되었다. 야당리(野堂里)는 지명 그대로 산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평야지대로 다른 마을에 비해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어 과거 어렵던 시절에도 쌀밥을 먹는 마을로 알려질 만큼 곡창지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면소재지와도 지척으로 과거부터 문물의 유입 속도가 인근 부락보다 훨씬 빨랐던 선진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서령 류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금헌 류방택 선생의 후손 중 대사성과 직제학을 지낸 위촌 류백순 선생의 후손들이다. 또한 조선 태조대왕의 넷째 왕자인 방간 회안대군의 후손들도 뿌리를 내려 살았기에 예로부터 선비마을로도 명성이 높다. 마을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논으로 사용되고 있는 토지는 과거 산과 밭 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식량수탈을 목적으로 풍전저수지 등의 수리시설을 건설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으로 개간하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로도 개간 농지가 많아지면서 지금의 넓은 평야가 됐다. 이러한 마을 이미지 때문인지 이 마을은 경작지와 연관된 지명이 많다. 야당1리 중심마을을 들말(野村)이라 부르는데 들로 구성된 평평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한다. 또 인근지역 마을을 구렛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국어사전에 기록되었듯이 ‘바닥이 낮고 물이 늘 있거나 물길이 좋은 기름진 논’이라는 뜻이다. 작금에 들어 주민들은 인접한 둔당리에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발전의 기회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도 하고 있다. 야당1리 사람들 예부터 넉넉한 살림살이와 함께 선비마을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에게 박하지 않은 인심을 베풀어 왔던 야당1리는 지금도 옛날의 전통을 이어오며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올해도 대풍이라며 환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정원호(74) 노인회장 = 당진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지 반평생(50년)이 지났어요. 7년째 서산향교 전교를 맡아 보고 있는데 이 마을처럼 노인 공경 잘하고 이웃 간에 화목한 마을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세상이 자꾸 각박해지고 사나워져만 가고 있어 늘 걱정인데 우리 마을이라도 예전의 미풍양속을 간직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이병순(74)씨 = 양대리에서 시집 왔어요. 지금이야 옆 동네지만 옛날에는 길이 나빠서 친정 가기도 수월치 않았죠. 처음 시집와서는 밤에 무서워 나다니기도 어려웠어요. 지금이야 그때에 비하면 신세상이지요. 세상은 좋아지는데 농춘은 자꾸 살기가 어려워지니 영문을 모르겠네요. 요즘 농산물 값이 워낙 없어 힘들어요. ▲조재홍(76)씨 = 여기서 나서 줄곧 자라 이 마을일은 잘 알지요. 옛날 고생한 거야 말 할 필요 없고 지금 우리 동네에 가장 시급한 것은 논 수로를 고쳐야 해요. 이게 서산시에도 말하고 농촌진흥공사에도 이야기하고 해도, 다들 남에게 미루기만 하지 선뜻 알아서 해주는 곳이 하나 없어요. 요즘은 다 늙은이들만 농사짓고 있어 수로 제초작업하기도 힘든 지경이니 빨리 개선해 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유영곤(78)씨 = 나 어렸을 적에 일본사람들이 풍전저수지를 축조하고, 농수가 풍부해 지니까 마을 땅을 다 논으로 개간했어요. 그때도 땅이 좋아 수확량은 많았지만 일본놈들이 다 뺏어가서 자기 쌀도 숨겨 놓고 지냈지요. 나 어렸을 적에야 먹고 살기 어려웠고 워낙 시골이라 자전거도 구경하기 어려웠으니 무슨 추억거리가 있겠어요. 일만 열심히 했지요. ▲유병구(87)씨 = 한 30년 전에 마을 도로를 넓혔죠. 그리고 10여 년 전에 포장했고, 그전에야 사람하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전부였지.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자기하고 싶은 말 다하며 살 수 있게 된 게 가장 좋은 것 같아. 일제시대나 해방 후에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었나, 조심스러웠지. 그래도 요즘은 나 같은 농부도 할 얘기 다하고 사니 좋은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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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0
  • “충남지역신문협회 사무실 당진으로 오세요”||민종기 당진군수, 10월 정기회의 참석 각별한 관심 나타내
    “충남지역신문협회 사무실을 당진으로 이전하세요. 대지와 건물은 물론 관리비까지 지원하겠습니다.” 민종기 당진군수가 지난 14일 당진군 동경일식에서 개최된 충남지역신문협회(회장 이평선) 10월 정기회의에 참석 지역신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며 이 같이 말했다. 민 군수는 또 “우리는 충남도민으로 하나”라며 “각 지역에서 지역발전과 충남도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는 지역 언론인들의 노고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날 회의에는 최동섭 당진군 의회 의장과 이맹연 농협 당진군 지부장, 최희택 충남생활체육협의회장 등이 참석 도내에서 참석한 충지협 회원들을 환영해 주었다.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대해 지역신문의 입장을 정리하는 기획보도에 대해 활발한 협의가 이루어졌으며, 이와 관련 이명수 국회의원과의 간담회를 추진키로 했다. 11월 정기회의는 11월 11일 개최된다. ▲지난 14일 당진에서 개최된 충남지역신문협회 10월 정기회의에서 민종기 당진군수(서있는 사람)가 참석하여 환영의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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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14
  • ■사진으로 보는 3일간의 해미읍성 병영체험축제||2008년 10월의 서산…‘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병영을 보다’
    2008년 10월의 해미읍성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회귀한 듯했다. 10일 서산시청에서의 충청병마절도사 출정식을 시작으로 막을 올린 2008년 해미읍성병영체험축제가 12일까지 3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번 축제에는 서산시민을 비롯해 전국에서 10만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3일간의 축제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을 화보로 꾸며보았다./편집자 ▲조선군사 출정식 10일 오후 2008서산해미읍성병영체험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충청병마절도사 출정식을 마친 300명의 조선군사 복장에 군마와 화포, 화차 등으로 무장한 군사들의 행렬이 시가지를 지나고 있다. 충청병마절도사역을 맡은 인기탤런트 윤문식씨가 병사들에게 출정을 명하고 있다. 전통무술 배우기에 참가한 어린학생들이 자세를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 민속주막 주모는 축제기간 3일 내내 바빴다. 모녀가 서툰 동작으로 도리깨질에 도전하고 있다. 옛날 병사들이 먹던 주먹밥도 이렇게 맛있었을까? 한 한생이 자기가 만든 주먹밥을 맛있게 먹고 있다. 굴렁쇠는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아기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공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 축제의 가장 인기스타는 원숭이 엿장수 이였다. 기중기 위 명당자리를 차지한 어린이들이 서커스 공연에 박수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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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13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6] 해미면 귀밀리||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에 자부심 커
    # 마을회관 입구에 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의 영광을 나타내는 현판들이 자랑스레 걸려있다. 해미면 귀밀리(이장 김용규)는 마을에 귀한 것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하여 귀할 귀(貴)자와 빽빽한 밀(密)자를 마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귀밀리란 이름을 간직해 온 것을 보면 틀림없이 지명에 얽힌 사연이 있음직하지만 이에 대해 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은 옛 부터 이 마을이 사람살기에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터라 타지방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 이였기 때문에 마을 자체가 귀하다 하여 귀밀리라 불려 지게 됐다고 한다. 실례로 1939년 발생한 대 가뭄에도 이 마을은 충남도에서 유일하게 풍작을 이룰 정도로 천혜의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어 당시 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흉년이 들었지만, 풍부한 용수로 이 마을만큼은 풍년가가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귀밀리가 자연조건에만 의지해 탄생한 것은 절대 아니다. 1966년 70ha 논들을 관청의 중장비 지원 없이, 리어카 50대를 동원해 삽과 괭이만으로 일궈낸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귀밀리의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정 10년째 되던 1991년에는 도비를 지원 받아 마을입구 도로상에 인영문을 세워 마을주민들이 큰 자랑거리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안전 문제로 철거하고, 지난 10월 7일 제막식을 가진 범죄 없는 마을 표지석이 주민들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 해미병영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던 이 마을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증명해주고 있는 큰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또한 귀밀리 바로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개삼포라 하여 수 천석의 노적가리를 쌓아 놓고 방아를 찧어서 운반하던 무역항이 있었지만 광복 후 차츰 쇠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 귀밀리 사람들 오랜 세월을 두고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자부심 가득한 주민들이지만 인근에 공군비행장이 들어선 뒤로는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고 있어 푸념도 늘어만 가고 있다고 한다. 귀밀리 주민들의 갖은 희로애락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김용규(59) 이장 = 전국 어디에도 귀밀리처럼 범죄 없는 마을에 오랜 기간 동안 지정된 곳은 없을 겁니다. 명절 때 자녀들이 집에 오면 어르신들이 범죄 없는 마을이란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당부를 하고 계실 정도니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마을 출신은 결혼 할 때 선도 볼 필요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주민들의 심성 고움은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강덕(60) 새마을지도자 = 어렸을 적에는 마을이 제법 컸는데 지금은 34가구에 70명 정도가 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아졌습니다. 농촌 현실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비행장 문제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맞벌이 부부라 자녀를 맡기고 싶어 해도 비행장 소음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동네에서 꼬마들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무슨 대책을 세워줘야지. 나중에는 빈집만 가득하게 생겼어요. ▲김용구(64) 1반장 = 예부터 큰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서로 의견 이 맞지 않아도 순리대로 풀어나갔지요. 그러다 보니 이 마을 젊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싸움을 모르다 보니 마음씨가 고와서 어른 공경 잘해 효도마을이란 칭찬도 듣고 있죠. 이정도 되면 복을 받아야 할 텐데 비행장 땜에 땅값 떨어져, 가축도 못 키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최일남(60) 2반장 = 비행장 말고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비행기 날아다니기 시작한 후론 마을주민들 목소리가 커져서 다른 마을에 가서 대화하면 싸우는 줄 알아요. 더구나 처음에는 몰랐는데 오래 살다보니 귀에 난청이 생겨 잘 듣지를 못해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어요.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철환(55)씨 = 혼란스러웠던 광복시절이나 6.25에도 사람 다치는 일없이 온전하게 마을이 보존됐습니다. 그 덕에 마을주민들이 서로 원망하는 일없이 오순도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하천부지에 농사짓는 문제로 시끄럽다보니 간혹 낭패를 보는 사람도 있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좋은 방향으로 시정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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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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