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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6] 해미면 귀밀리||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에 자부심 커
    # 마을회관 입구에 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의 영광을 나타내는 현판들이 자랑스레 걸려있다. 해미면 귀밀리(이장 김용규)는 마을에 귀한 것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하여 귀할 귀(貴)자와 빽빽한 밀(密)자를 마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귀밀리란 이름을 간직해 온 것을 보면 틀림없이 지명에 얽힌 사연이 있음직하지만 이에 대해 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은 옛 부터 이 마을이 사람살기에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터라 타지방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 이였기 때문에 마을 자체가 귀하다 하여 귀밀리라 불려 지게 됐다고 한다. 실례로 1939년 발생한 대 가뭄에도 이 마을은 충남도에서 유일하게 풍작을 이룰 정도로 천혜의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어 당시 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흉년이 들었지만, 풍부한 용수로 이 마을만큼은 풍년가가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귀밀리가 자연조건에만 의지해 탄생한 것은 절대 아니다. 1966년 70ha 논들을 관청의 중장비 지원 없이, 리어카 50대를 동원해 삽과 괭이만으로 일궈낸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귀밀리의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정 10년째 되던 1991년에는 도비를 지원 받아 마을입구 도로상에 인영문을 세워 마을주민들이 큰 자랑거리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안전 문제로 철거하고, 지난 10월 7일 제막식을 가진 범죄 없는 마을 표지석이 주민들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 해미병영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던 이 마을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증명해주고 있는 큰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또한 귀밀리 바로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개삼포라 하여 수 천석의 노적가리를 쌓아 놓고 방아를 찧어서 운반하던 무역항이 있었지만 광복 후 차츰 쇠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 귀밀리 사람들 오랜 세월을 두고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자부심 가득한 주민들이지만 인근에 공군비행장이 들어선 뒤로는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고 있어 푸념도 늘어만 가고 있다고 한다. 귀밀리 주민들의 갖은 희로애락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김용규(59) 이장 = 전국 어디에도 귀밀리처럼 범죄 없는 마을에 오랜 기간 동안 지정된 곳은 없을 겁니다. 명절 때 자녀들이 집에 오면 어르신들이 범죄 없는 마을이란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당부를 하고 계실 정도니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마을 출신은 결혼 할 때 선도 볼 필요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주민들의 심성 고움은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강덕(60) 새마을지도자 = 어렸을 적에는 마을이 제법 컸는데 지금은 34가구에 70명 정도가 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아졌습니다. 농촌 현실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비행장 문제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맞벌이 부부라 자녀를 맡기고 싶어 해도 비행장 소음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동네에서 꼬마들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무슨 대책을 세워줘야지. 나중에는 빈집만 가득하게 생겼어요. ▲김용구(64) 1반장 = 예부터 큰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서로 의견 이 맞지 않아도 순리대로 풀어나갔지요. 그러다 보니 이 마을 젊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싸움을 모르다 보니 마음씨가 고와서 어른 공경 잘해 효도마을이란 칭찬도 듣고 있죠. 이정도 되면 복을 받아야 할 텐데 비행장 땜에 땅값 떨어져, 가축도 못 키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최일남(60) 2반장 = 비행장 말고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비행기 날아다니기 시작한 후론 마을주민들 목소리가 커져서 다른 마을에 가서 대화하면 싸우는 줄 알아요. 더구나 처음에는 몰랐는데 오래 살다보니 귀에 난청이 생겨 잘 듣지를 못해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어요.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철환(55)씨 = 혼란스러웠던 광복시절이나 6.25에도 사람 다치는 일없이 온전하게 마을이 보존됐습니다. 그 덕에 마을주민들이 서로 원망하는 일없이 오순도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하천부지에 농사짓는 문제로 시끄럽다보니 간혹 낭패를 보는 사람도 있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좋은 방향으로 시정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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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13
  • [마을기행 45] 운산면 갈산4리 서정마을아파트||서산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 마을…지난해 12월 신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갈산4리는 운산지역을 대표하는 마을로 커 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진은 아파트 전경. 운산면 갈산4리(이장 홍성남)는 서산관내 마을 중 역사가 제일 짧은 마을이다. 작년 12월, 갈산1리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이 마을은, 농촌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볼 수 있게 된 아파트 단독마을이다. 생활패턴과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기존 농촌지역과 잘 융화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고심하던 끝에, 아파트주민들은 분리를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분리는 이별이 아닌 새로운 만남의 출발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일 열린 운산면주민화합체육대회에 당당하게 갈산4리의 이름을 걸고 출전한 서정마을아파트 주민들은 처녀 출전에도 불구, 29개 부락 중 6위의 기록을 세우며 운산주민들에게 갈산4리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아파트주민들 또한 이번 체육대회를 계기로 예전의 어정쩡한 존재가 아닌 우리도 운산면의 가족이라는 인식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설립 후 처음 맞는 행사인지라 모든 준비가 전무했던 갈산4리는 수저 하나에서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며 주민간의 화합이 훨씬 돈독해졌다. 아파트라는 주거구조의 특성상 주민화합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이런 불리한 점을 극복해 나가며 운산면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안정된 마을모습을 갖추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은 마을이기도 하다. 갈산1리에서 분리되기 전인 지난2006년, 아파트관리사업자의 부도로 인해 서정마을아파트 주민들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겪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았던 위기의 시간을 탄탄한 부녀회조직과 입주자대표회의 노력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어려운 시절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은 주민들이기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더 따듯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산의 막내 마을에 걸맞게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듯 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갈산4리는 운산지역을 대표하는 마을로 커 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진은 아파트 전경. 갈산4리 사람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지난 2년 여간 갖은 고초를 겪은 갈산4리 주민들은 더욱 단단해진 인화력을 바탕으로 서산 제일의 마을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땐 간난 아기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주민들의 희망찬 포부를 들어 보았다. ▲홍성남(47) 이장 = 아파트 단독 마을이다 보니 농사짓는 가구가 극히 드물어 다른 이장님들처럼 능숙하게 일처리를 못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애로점입니다. 하지만 이번 체육대회에서 6위를 차지하며 단합된 모습을 보여줬더니 다른 마을 이장님들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신임 이장으로 마을주민들을 단합시키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계획입니다. ▲박재숙(54) 주민자치회장 = 부도가 난 뒤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된 마을 살림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 안 된 전기세 체납 문제가 있어 마음 한쪽이 무겁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부도 사태를 호되게 겪은 주민 중에는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신 분들이 간혹 있어 안타깝습니다. 주민 전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진심이 통할 거라 생각합니다. ▲김희곤(51) 서정마을아파트 관리과장 = 5년 전부터 아파트 관리업무를 해오고 있는데 주민들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 이만큼 정상화를 시켜 놓을 걸 볼 때마다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도색 시기가 지났는데 아파트 사정상 못하고 있어 늘 아쉽습니다. ▲정덕영(61) 주민자치회 고문 =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해낸 장한 주민들과 같이 살고 있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아파트 주변으로 발전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산의 첫 관문인데 너무 초라해 이미지에도 별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최홍균(55) 2동 대표 = 주민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고, 앞장서서 일하고 계신 마을 대표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어려움이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로 변하리라 생각합니다. 단독 마을로 승진했는데 좀 더 의젓하고 멋지게 변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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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07
  • “서산시 여성축구단에 시민들 적극적인 관심 절실”
    ▲지난 2일 오전 본사 회의실에서 김동주 기자의 진행으로 변웅전 국회의원, 강춘식 서산시생활체육협의회장을 비롯한 서산시여성축구단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산시여성축구단 활성화 방안’에 대한 간담회가 이루어 졌다. 축구는 가장 다이내믹한 스포츠다. 공이 그물에 철렁 꽂힐 때의 짜릿한 쾌감은 축구를 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축구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전국에서 여성축구교실과 여성축구단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적으로 서너 곳에 불과하던 여성축구단은 여성축구 인구가 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서산시 여성축구단도 이러한 열풍과 함께 선수를 모집하여 2003년 2월에 정식으로 발족됐다. 그리고 만 6년 후 서산시여성축구단이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본선진출의 쾌거를 거두었다. 이에 서산타임즈는 서산시여성축구단의 활성화와 여성축구 저변확대 방안을 찾기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특히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본지 박종석 기자는 여성축구단원들에게 새 유니폼을 구입할 수 있도록 즉석에서 성금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2일 서산타임즈 회의실에서 본지 김동주 기자의 진행으로 개최된 간담회 발언 내용을 정리해 본다. <편집자> ■ 간담회 참석자 현황 ▲변웅전 국회보건복지가족위원장 ▲강춘식 서산시생활체육협의회장 ▲최기을 서산시생활체육협의회 사무국장 ▲오한교 서산시여성축구단 감독 ▲가봉진 서산시여성축구단 회장 ▲가명풍 서산시여성축구단 2대 회장 ▲이영우 서산시여성축구단 선수 ▲김연정 서산시여성축구단 선수 ▲김성자 서산시여성축구단 선수 ▲강기정 서산시여성축구단 선수 ▲최광열 서산시여성축구단 선수 ▲박종석 본지 기자 서산시여성축구단 전국 제패할 날 올 것 ▲변웅전 국회의원 = 서산시여성축구단이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전국규모 대회에 참가하여 본선에 올랐다는 뉴스를 보았다. 참 대견한 일을 해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한번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본인은 방송국 생활을 30년이나 했다. 각종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에도 많이 참여했지만 여성 경기종목을 우선하는 것이 방송계의 불문율처럼 되었던 시절 특히 1973년 흑백TV 시절 전 국민을 TV 앞에 모이게 한 경기가 있었다.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정현숙, 박미라, 그리고 이 에리사가 한국 구기 스포츠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이처럼 우리 서산여성축구단도 전국 대회를 제패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싶다. 우선 현재 처한 열악한 환경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다 같이 힘을 모아보기로 하자. 간담회 마련자체가 여성축구단 활성화 기틀 ▲강춘식 회장 = 지난 2002년 서산시여성축구단을 모집하면서 축구 불모지인 서산에서 과연 여성축구가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초대회장인 이복진 여사와 2대 가명풍 회장께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참여와 희생정신으로 봉사해주신 두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여성축구단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오늘 이런 좋은 자리를 마련해준 서산타임즈 이기우 회장과 임직원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서산시여성축구단의 활성화를 위해 이런 자리가 마련됐다는 자체가 활성화에 기틀이 된다고 본다. 거듭 감사드린다. 아울러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여성축구단원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전용구장이 마련되어 졌으면 한다. 종합운동장 보조구장을 전용 연습장으로 활용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감독에 대한 처우와 신분보장이 안 되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문제도 서산사회가 적극 고민해야할 문제다. 현재 오한교 감독의 무한 봉사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전국규모 대회만이라도 관용버스 지원을 ▲가봉진 회장 = 다른 지자체의 여성축구단의 경우 1~2명이 선수출신 인데 비해 서산시여성축구단은 순수한 아마추어로 구성되어 있다. 외형적인 면에서 서산시여성축구단이 좋은 성적을 내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우리도 1~2명의 전문 선수 확보가 시급한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질 않고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우리는 서산시의 홍보역할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최소한 전국규모 대회 출전때 만이라도 관용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국 규모 대회에 참가해 보면 다른 자치단체 선수의 경우 당당히 자치단체 로고가 선명히 그려진 관용버스를 이용하고 있어 그들이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현재 단원들의 회비로 축구단이 운영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이런 자리가 마련된 만큼 여성축구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만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너무 벅차다. 차제에 서산타임즈가 이러한 문제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산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관심 당부 ▲가명풍 2대 회장 = 먼저 축구 예찬론을 말한다면 처음에는 단순히 팬으로 축구를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여성축구 단원이 되었다. 축구를 하면 일단 아프다는 소리가 안 나올 만큼 건강해 진다. 특히 11명이 같이 하다 보니 정이 붙어 동료끼리 독려해주고 물 한잔을 마셔도 서로 챙겨주는 모습이 축구의 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면의 표 나지 않은 애로사항은 수 없이 많다. 특히 선수단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사비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선수 유니폼이나 수건 한 장도 회장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게 서산여성축구단의 현실이다. 서산시여성축구단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여성축구단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최우선이라고 본다. 서산사회 각계각층 적극적인 관심을 당부하고 싶다. 선수수급이 가장 시급…시민 무관심도 아쉬워 ▲오한교 감독 = 창단하면서 감독을 맡기 시작했다. 현재 서산시여성축구단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선수 수급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것은 행정당국의 절대적인 협조가 되어야하는 만큼 분위기가 성숙될 수 있도록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부탁드린다. 현재 서산시여성축구단은 23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15~6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연습경기 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다음은 축구단을 운영할 수 있는 예산이 문제지만 오늘 간담회에서 논의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여성축구단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서산시민들이 여성축구단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전직 회장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로 성장 ▲최기을 사무국장 = 2002년 월드컵 열풍에 힘입어 선수단을 모집하여 2003년 9월 23일 서산시여성축구단이 창단식을 가졌다. 초대 이복진 회장에 이어 2대 가명풍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가명풍 회장은 서산시여성축구단이 반듯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왔다. 여성축구단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시민들의 관심은 저절로 다가오는게 아니라고 본다. 여성축구단 스스로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한다. 선수들의 바램…많은 여성들과 함께 축구 하고파 ▲이영우 선수 = 지금 바람이 있다면 많은 여성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강기정 선수 = 직장생활을 이유로 연습경기에 많이 참석하지 못해 선수단에 늘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현재 선수단 유니폼 컬러가 너무 단순하다. 유니폼을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최광열 선수 = 본인 승용차에는 늘 선수단 유니폼을 외부에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다닌다. 단 한명이라도 축구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 본다면 전화를 걸어 문의할 수 있도록 전화번호도 적어 놓았다. 지금까지 한 통의 전화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서산시여성축구단 홍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즉석에서 새 유니폼 지원…선수 저변확대에도 노력 ▲박종석 기자 = 오늘 간담회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해 보면 선수의 저변확대와 오 감독에 대한 처우 개선, 전 회장단 등 활용 방안, 예산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었다. 특히 강기정 선수가 유니폼을 지원해주었으면 한데 대해 오늘 바로 개인적으로 지원해 주겠다. 그리고 앞으로 신문사에서는 물론이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선수의 저변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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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07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4] 고북면 초록1리||명창 ‘고수관 선생’출생지로 알려져
    명창 고수관의 생가자리에 기념비가 서 있다. 고북면 초록1리(이장 이대근)는 1914년 행정 개편 당시 초록리, 연하리, 가구전리의 일부를 합병하여 만든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연암산(해발 440m) 기슭에 자리 잡은 까닭에 새초풀이 파랗고 무성하게 자라 ‘새프르기’라 불렀다 하는데 후에 이것이 한자표기에 따라 초록리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초록리는 조선시대에도 55가구 175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다. 비탈진 산기슭의 지형적인 불리함에도 이 마을이 번창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예로부터 이곳이 옹기제조와 쇠를 끓여 만들어내는 야철업이 크게 발달해 지금의 산업단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생산된 제품을 과거에는 조랑말로 운반하였다하여 조랑말리란 지명까지 생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번창함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노인들의 기억을 빌리자면 그 당시는 공장의 인부들과 옹기와 솥을 파는 중간상인들, 그리고 장사꾼들로 항시 붐벼 면 소재지보다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공장터와 집터들이 모두 다 밭으로 바뀌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산업단지의 영광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조선후기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고수관이 새로이 조명되면서 마을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1764년(조선영조40)에 태어나 19세기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수관은 초록리 48번지에서 태어나 명창이 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고수관은 춘향가중 사랑가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임금을 웃겨 후한 상을 하사받기도 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충남인물 100인선에 오르기도 한 고수관을 기리는 기념비가 마을에 세워져 있다. 고수관 기념관 건립이 당초 약속보다 늦어져 주민들은 실망하고 있지만, 차후에라도 기념관이 건립되면 마을이 옛날처럼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방관식 기자 초록1리 사람들 ▲이대근(62) 이장 = 마을 전체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내에서는 소규모 채소 농사만 짓고 있습니다. 알타리무나 논밭 농사는 인근 부락에 가서들 경작하고 있죠. 시장님 공약사항으로 명창 고수관 기념사업이 선정되어 마을주민들이 기대가 컸는데 요즘 후순위로 밀려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후에라도 기념관이 설립되고, 사업이 본격 추진되면 특색 있는 농촌마을로 변모하기 위해 부지런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신월례(84)씨 = 장요리에서 시집 왔는데 그때는 말도 못했어요. 강원도나 여기나 똑같았지 뭐. 그래도 옛날에는 마을이 컸는데 지금은 다 노인들만 살고 있으니 동네에 뭐 특별한 게 있나. 다들 회관에 나와서 화투도 치고 이야기하며 노는 재미지. 앞으로도 세상은 살기 좋아진다는데 농촌도 같이 잘 살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홍기남(91)옹 = 여기서 나서 자라고, 시집가고 늙어서 죽게 생겼어요. 평생을 이 마을에서만 살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지 크게 변한거야 있나요. 그래도 옛날에는 집이 빽빽했었는데 다들 이 밑에 초록2리나 딴 마을로 옮겨들 갔지. 앞으로야 누가 이런 시골로 이사 오겠어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정답게 살아가야지. ▲김대흑(83)씨 = 어렸을 때는 이 동네가 살만했지. 그 당시 다른 품값은 형편없었는데 무쇠솥 지고 광천이나 홍성장까지 날라다 주면 쌀 한말은 줬어. 다른 일 하느니 이일 하는 게 수입이 훨씬 좋았지. 그런데 솥 공장을 운영하던 3대가 손자, 아버지 순으로 세상을 뜨는 거야, 그러면서 점점 쇠락해져 갔지. 더군다나 이곳 공장은 작업을 다 수작업으로 했는데 그 당시에도 신기술이 들어오면서 경쟁에서 떨어진 거지. ▲장수흥(73)씨 = 박대통령 살아 초가집, 흙집 다 개량하고, 마을 도로도 다 등짐으로 퍼 날라 포장했어요. 옛날에는 소달구지는 고사하고 지게 하나 지고 다니던 길이 마을에 있었지. 산속에 있다 보니 공기 좋고, 물도 좋고 다 좋습니다. 특히 이 마을 지하수는 산꼭대기에 팠기 때문에 수질 좋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이렇게 좋은 마을 환경 때문인지 효자마을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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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9
  • [특별기획] 한민족 상상력 원천 소나무||“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용처럼 꿈틀거리는구나!”
    어버이날 부르는 노래 가사 중에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머님 같은 나무’가 바로 소나무다. 소나무는 또 서산시의 시목(市木)이기도하다. 소나무의 용도는 실로 다양하다. 솔숲을 이뤄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 할 뿐만 아니라 곧고 쭉뻗은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해서는 목재로, 뒤틀린 것은 추운겨울 저녁 아랫목을 뜨끈하게 지피는 땔감용으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목피(송기)가 먹을거리로, 솔잎은 약재로, 송화는 다식으로 등등. 무엇하나 버릴 것 없는 우리 한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소중한 나무로 기억돼 온 것. 이뿐이겠는가. 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소나무 아래나 솔숲을 찾으면 머리끝까지 치솟은 화기가 내려가고 신장의 물 기운이 올라가는 명상의 원리인 수승화강(水昇火降) 이 절로돼 우리들에게 건강을 찾아주곤 한다. 소나무를 위한 명상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의 바람줄기 하나까지도 사랑해 왔다. 옛날 시인무객들은 솔바람 소리를 송뢰(松瀨)ㆍ송운(松韻)ㆍ송도(松濤도)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름다운 음악처럼 감상했다. 그중에서도 눈 내리는 날 밤에 듣는 설야송뢰(雪夜松瀨)를 으뜸으로 쳤다. 이때 소나무 소리를 들으면 우주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우주와 나 자신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솔바람 소리는 극한의 추위를 견디고 고난을 이겨내는 가운데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돌아보게 하는 관조의 미학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주와 같은 무량광대한 두뇌의 확장(상상력)과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관조(집중력)로 창조된 역설의 미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모진 겨울바람이 오히려 소나무를 우주의 소리와 같아지게 하는 거문고와 같은 우리의 전통악기 소리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어 그 관찰의 지혜가 놀랍기까지 하다. 솔바람 소리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땅이 척박한 돌 틈이나 바위 산비탈 등 성장하기에 부적합한 땅을 골라 자라기 때문에 다른 나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굴곡의 조형미’를 지니게 된다. 이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소나무의 뒤틀림은 바위산 등 주변자연과 절묘한 조화와 균형의 미를 이뤄 깊은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 만큼 그 자태의 아름다움은 뛰어나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소나무를 푸른 용이 하늘에 뜬 구름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들은 때로는 소나무 껍질(松皮)을 용의 비늘로 보고 그 몸통을 꿈틀거리며 하늘로 승천하는 붉은 적용(赤龍)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바다 수평선에서 하늘높이 떠오르는 오색빛 태양의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소나무라는 것이다. 선인들은 소나무의 굴곡의 조형미에서 인생살이의 묘미(처세술)도 여기서 찾고 있다. 자양분이 많은 토양에서 올곧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는 ‘금강송’이나 ‘황장목’이라해 옛날 궁궐 창건과 복원, 보수용으로 잘려 나갔다. 때문에 올곧고 쭉뻗은 잘생긴 소나무는 100여년 이상된 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돌틈 등 토양이 척박한 곳에서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리며 자라 굴곡진 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 앞에 그 고운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잘생긴 소나무에서도 그 늠름한 기품을 읽었지만, 굴곡진 소나무에서도 그 ‘균형미’와 ‘조화미’를 통해 무한한 ‘생명력’과 ‘상상력’을 생각해낸 것이다. 소나무와 나의 정신세계가 하나가 되는 ‘송선일체(松禪一體)’의 깊은 명상세계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소나무 보호 봉산제도 조선시대 산림정책은 소나무 정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대 전반에 걸쳐 사람들로부터 자연과 일반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에 따른 질서가 있었다. 군왕을 기점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의 산에 대한 인식까지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백성들의 인식 속에서 자리매김 됐다. 때문에 수많은 나무 가운데 소나무가 으뜸인 것은 그 생태에서 보듯이 ‘곧음’이나 ‘쓰임새’ 또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계절에 관계없이 푸름을 잃지 않는 그 ‘의연한 모습’. 그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에 조선 사대부들은 사군자에 포함시킬 정도로 소나무에 매료돼 있었다. 그래서 유교국가인 조선이 소나무를 귀중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장기간의 전란과 국정문란,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산림이 황폐해지고 소나무마저 남벌하게 되자 나라에서는 소나무 관리정책까지 마련하기에 이른다. 조선 19대 숙종(1674∼1720) 때에 이르러 국가 용도의 목재를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우량한 소나무림을 조사해 집중관리하는 봉산(封山)제도를 펼친다. 소나무는 국가 기간산업이라 할 수 있는 도로와 교량, 조운선, 군용선, 주택용 자재는 물론 궁궐이나 공공관서의 필수 건축자재 외에도 수많은 용도로 쓰이는 목재였던 것이다. 봉산으로 지정된 곳은 주로 강과 해안에 산재해 있으며 소나무의 크기와 부피로 보아 수로와 해운통로를 이용하지 않고는 운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나무가 최근 엄습해 온 기후온난화로 인한 솔잎혹파리, 소나무재선충 등 각종 전염병으로 우리들에게서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예부터 우리 선인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그 숭고함을 주고 있는 소나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나면 틈틈이 동산을 찾아 소나무 밑에서 삶을 뒤돌아보고 미래를 점검해 보는 깊은 명상의 세계에 빠져들기를 권해 본다. 박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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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9
  • 마을지킴이(79) 운산면 거성1리 윤형섭 이장||“민주적 절차로 주민 합의 이끌어 내”
    동네 할머니들에게 꽃미남으로 통하는 운산면 거성1리 윤형섭(46ㆍ사진)이장은 작년 12월에 이장을 맡아 일을 보고 있다. 아직 노련한 선배 이장들에 비해 경험이 떨어지는 터라 미숙한 점도 많지만 남다른 열정과 성실함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높은 신임을 얻고 있다. 이렇듯 높은 신임 뒤에는 마을 주민 하나하나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애쓰고 있는 윤 이장의 노력이 있다. “지난 5월에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후 1,500만 원의 지원금이 나와 마을 주민들과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한우를 입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거 하나 결정하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이라 그런지 몰라도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하나로 묶는다는 게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의견을 앞에 두고 당황했던 윤 이장은 독단적인 결정보다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주민간의 합의를 도출해 냈다. 이런 윤 이장의 마을운영 스타일 덕에 거성1리 에서는 주민간의 불협화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윤 이장은 주민간의 화합을 바탕으로 1,100여 평의 논을 임대해 마을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마을 공동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마을 운영의 자립도를 높이고 주민들의 소득 향상을 가져오는 게 윤 이장의 최종목표다. 그러나 윤 이장의 야심찬 계획과는 달리 농촌 현실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어 많은 고민거리들과 부닥치고 있다. 농촌 IMF라고 불리는 요즘 시기를 헤쳐 나갈 방안을 찾고 있지만 묘책이 보이질 않아 농촌을 지켜나가고 있는 젊은 농군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한때 농촌이 살길은 기계화라고 해서 많은 농기계들을 정책적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농기계를 운영하는데 돈이 더 들어가요. 고유가 영향도 있지만 예전부터 기계유지 비용이 너무 비싸게 들어가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정책이 좋아도 농민들이 소화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귀 담아 듣는 정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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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3
  • [서산의 발견-마을기행 43] 해미면 황락리||지네 난동 피해 막기 위해 해미읍성 쌓아
    해미면 황락리(이장 김종락)는 동편으로 높은 가야산이 있어 아침 해가 제일 먼저 비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조선시대에는 일악동리라 불렸다. 그 후 1895년(고종32) 일락동과 황조촌으로 나뉘었다가 1914년 행정개편을 거치면서 황락리로 불리게 되었다. 가야산 주봉인 문다래미가 서북으로 분기하였다가 다시 서남으로 뻗어 내려온 형국 사이에 위치해 성왕산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고, 신라 때의 고찰인 일락사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며 사계절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들이고 있다. 일락사는 663년(신라문무왕3)년 의현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과거에는 대찰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고찰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유형) 193호와 200호인 대웅전과 요사체인 현음당, 삼층석탑이 있다. 옛날에는 일락사 바로 밑에 10여 호가 사는 마을이 있어 절골 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이 마을 4반 지역에는 황조촌이라 불리는 마을지명이 있는데 중국에서 넘어와 정착한 진씨들이 종족촌을 이뤄 거주하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마을이 지네형국을 한 몽수례산과 닭의 형상을 한 당산이 쫓고 쫓기는 풍수를 형성하고 있어 지네의 난동을 막아 피해를 없애기 위해 지네 머리 부분에 해미읍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이점을 악용하여 해미읍성 뒷부분인 분무골재를 잘라놓아 지네가 죽어 그 뒤로는 해미지방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1991년 황락저수지의 준공으로 사석지대였던 이 마을은 천수답과 밭을 모두 논으로 개간했고, 해미시장과 근접한 이점을 활용한 축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등 새로이 변모하고 있어 조만간 큰 인물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갖게 만드는 마을이다. ▲1991년 황락저수지가 준공되면서 마을 논밭이 모두 옥토로 바뀌었다. 풍성한 가을맞이를 앞둔 마을 전경. 황락리 사람들 과거 자갈밭 이였던 마을을 옥토로 바꾸어 놓을 만큼 부지런함을 자랑하는 황락리 주민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 2000년도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마을 중간을 가로지르며 개통되어 많은 변화를 맞이한 주민들은 마을 도로 정비와 상수도 개설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박순희(89)씨 = 나이 들어 다리가 불편해지니 지팡이가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동네 인심이야 다 자기 동네 인심 좋다고 그러지 나쁘다고 할 사람이 있나. 사람들이 참 선하고 순박해서 그런지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살았어도 큰 소리 들리는 걸 못 봤어요. ▲홍성윤(78)씨 = 나 어렸을 적에야 진짜 어려운 시절 이였지요. 그 당시야 먹을 것이 풍족했나, 입을 것이 있었나, 다들 고생하며 살았어요. 요즘이 전보다야 낫게 사는 건 사실인데 이게 가슴에 별로 와 닿질 않아요. 농촌이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구석이 있어야 살만 하구나 느껴지지…. ▲김영신(78)씨 = 홍성에서 시집와 지금껏 살았어도 마을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사람만 늙어서 매일 병원에 다녀야 하는 게 변했다면 변한 것 이지요.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소망이 하나 있다면 시골 노인양반들 아프면 병원이라도 마음 놓고 갈 수 있게 나라에서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김종팔(71)씨 = 예전에는 이 마을 전체가 자갈밭 이였는데 논으로 다 개간했죠. 마을 주민들이 워낙 부지런들 타 지역까지 나가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 주민들 소원은 마을 안 도로를 확포장 하는 건데 3년 전부터 논의해서 이제 조만간 결정이 날 것 같습니다. ▲진두섭(79)씨 = 고려 때 중국에서 넘어와 9대째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야 일족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객지로 다 나가고 몇 없습니다. 이 마을에는 규모가 큰 축산농가가 많이 있는 까닭에 지하수가 심하게 오염됐습니다. 축산농가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상수도가 들어올 시기가 됐다고 마을 주민들이 모두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관계기관에서 책임 있는 조치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방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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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3
  • 어린이 서산타임즈 발간에 즈음하여||발행인 이기우
    어린이는 모두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어린이 스스로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들은 또 호기심이 많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구도 작지 않으므로 이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나아가 우뚝 설 때까지 ‘사회를 제대로 보고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갖도록 해 줘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감으로 서산타임즈가 4개월간의 준비과정을 마치고 어린이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될 「어린이 서산타임즈」를 선보이게 됐습니다. 어린이서산타임즈는 서산지역 9개 초등학교 33명으로 구성된 ‘어린이 기자단’이 3회의 연수과정을 모두 마치고 직접 기획하고 편집회의를 거쳐 발행 되었습니다. 신문이 발간되도록 적극 협조해 주신 각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과 어린이기자단 학부모 여러분 그리고 본지 이병렬 편집국장을 비롯한 지역기자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물론 시작은 미약합니다. 기사가 어설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산에서 태어나 서산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기자들이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이기에 기쁘게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들 어린이기자들에게 더욱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십시오. 또 취재 요청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응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제 매월 1회씩 발간되는 어린이 서산타임즈에 실리는 새 소식들은 세상사는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로 바꾸어 들려주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뉴스가 어린이가 주인인 신문답게 성인 신문에서는 다루지 않는 세상을 다루려고 합니다. 다른 학교나 다른 학급에서 실시하는 독창적인 수업이나 특별 활동을 지면을 통해 보면서, 어린이들은 또래 친구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남을 돕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만 아는 어린이가 아닌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어린이로 자라도록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어린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과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재능을 발견하고 그 능력을 끄집어내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린이 대부분은 각자 자신의 속에 감추어진 ‘보물’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어린이서산타임즈는 어린이들 속에 감춰진 재능이라는 보물을 끄집어내는 역할도 맡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이서산타임즈가 어린이기자들과 함께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도록 서산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2008년 9월 25일 발행인 이 기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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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19
  • “우리학교 교장 선생님 최고!”
    본지 어린이기자단이 소속 학교 교장 선생님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호에는 각 학교 어린이 기자단이 석림초 정석훈 교장선생님, 언암초 한기송 교장선생님, 학돌초 김태우 교장선생님을 만나 어린이기자단이 궁금한 것들을 여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인터뷰 진행에 협조해주신 세 분의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편집자] ■ 언암초 한기송 교장 선생님 [기자단] 언암초 교장 선생님이 되면서 첫 느낌은 어떠셨나요? [교장선생님] 물론 매우 좋았단다. 예의 바르고 좋은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니 마음이 들떠 있었고, 고향 동네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자단] 앞으로 꾸려나갈 언암초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교장선생님] 지혜를 갖고 성실하게 꿈을 갖는 지혜로운 학생들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과학 동아리 활동, 외국어 활동, 독서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기자단] 교장 선생님이 생각하는 우수한 선생님은? [교장선생님] 학생이 잘못을 했어도 이유를 물어보고, 더 소중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또 학생들의 특징을 알고, 그것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우수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자단] 그럼 교장 선생님이 생각하는 우수한 학생은요? [교장선생님]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큰 그릇을 가질 수 있는 학생이지요. 인내력을 갖고 극기를 가진 학생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해요. [기자단] 교장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우리학교 자랑거리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교장선생님] 인사 잘하는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우리학교 어린이들처럼 인사를 잘하는 학교도 드물 거예요.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사 잘하는 것 이예요. [기자단] 마지막으로 언암초 학생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교장선생님]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부모님도 잘 만나고, 공부하기 좋은 터에 있는 학생이기 때문에 행운이 많이 따라 줄 것입니다. 인터뷰=김유정/박하은/안세인/조예지 어린이기자 ■ 학돌초 김태우 교장 선생님 [기자단] 선생님이 되신 이유가 궁금해요. [교장선생님] 원래는 법을 전공했으나 당시에는 사회가 매우 어려워 그래서 혼란한 시기에 사람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선생님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길을 선택했단다. [기자단] 저희 같은 시절에 성적은 어떠셨나요. [교장선생님]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었단다. 그러나 항상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구나. [기자단] 교장선생님께서 보시는 학돌 어린이에 대해 한 말씀. [교장선생님]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럽고 예쁘단다. 항상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도 보기 좋고, 도서관에서 책에 푹 빠져 있는 모습도 아름답지. 또 리드합주부, 합창부, 현악부, 축구부 등 아침저녁으로 땀 흘리며 열심히 연습하는 학생들을 보면 매우 자랑스럽고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자단] 특별히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교장 선생님]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한 여러 대책을 발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요. 우리 학교 학생들도 이에 발맞추어 에너지 절약을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래요. 양치할 때 물은 받아서 사용하고, 불필요한 전등은 스위치를 끄는 등 작은 일부터 실천하면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을 가졌으면 해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도서실 환경을 새롭게 정비하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교실 복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 주었어요. [기자단] 학돌 어린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시나요? [교장 선생님] 요즘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성적과 지나친 경쟁만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무척 걱정스러워요. 우리 학돌 어린이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참된 마음을 잊지 말고,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고 있어요. [인터뷰=가지은/유보민/윤기백 어린이기자] ■ 석림초 정석훈 교장 선생님 석림초등학교 등교길에는 학생들보다 먼저 학교 앞에 나와 교통 지도를 하고 계시는 교장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 늘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꿈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 정석훈 교장선생님을 지난 9일 오후 2시에 만나보았습니다. [기자단] 먼저 우리 학교 학생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교장 선생님] 인사도 잘하고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며 늘 자기를 돌아보며 일기를 잘 쓰는 건강한 어린이들이라고 생각해요. [기자단] 그럼 우리 학교의 어떤 부분이 가장 자랑스러우신가요. [교장 선생님] 우리 학교 학생들만큼 인사를 잘 하는 학생들은 없을 겁니다.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인사하는 우리 학생들이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서산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인사를 잘하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자단]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 [교장 선생님]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다양한 방과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기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당부하고 싶어요. [기자단] 저희 기자단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교장 선생님] 우리 학교의 크고 작은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특별히 아름다운 미담 사례 등을 찾아다니며 기사로 작성해주면 고맙겠어요. 이날 인터뷰를 마친 우리 기자단은 학교를 위해서 늘 고민하시고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교장선생님의 모습 속에서 학교를 더욱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했다. 우리 학생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정석훈 교장선생님께서 날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간절히 바란다.[인터뷰=안해림/이은주/ 김민송/한충의 어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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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19
  • 어린이기자들이 본 유상곤 시장||“서산의 미래는 걱정할 필요 없다”
    유상곤 서산시장은 지난 8월 13일 오후 서산시청을 방문한 ‘서산타임즈 어린이기자단’을 만나 “기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열심히 활동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서산시청 탐방에 나선 서산타임즈 어린이기자단은 유상곤 시장과 대화를 통해 유 시장의 어린시절과 시장으로서의 서산시 미래에 대한 포부를 들었다. “시장님 봉급은 얼마나 되나요”, “시장님은 어릴 때 싸움을 잘하셨나요”등 당혹스런 질문도 “서산시의 미래 발전에 대한 계획은 무엇인가요” 등 제법 당찬 질문도 쏟아졌다. 이날 대화를 마친 어린이기자들이 느낀 유상곤 시장의 모습을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주> 지난 8월 13일 서산시청을 방문한 서산타임즈 어린이 기자단이 유상곤 시장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안해림 어린이기자(석림초 5-1)=우리 서산시를 너무 사랑하고, 서산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정확하한 것 같다. 앞으로 서산의 미래발전계획은 어려운 분들, 장애인들을 돕는 것과 노인문제, 인재육성, 기업유치와 함께 환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유상곤 시장님은 서산에 대해 많은 생각과 많은 일을 하고 있어 감사한 생각을 들게 했다. ◆윤기백 어린이기자(학돌초 4-5)=아주 좋으신 분 같다. 한번 만나보니 정말 우리 서산의 미래를 책임지실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우리 서산의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김수지 어린이기자(서동초 5-2)=시장님은 돈을 많이 버시는 것 같다, 연봉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약 6천만원이 넘는다고 하셨다. 또 시장님은 어린 시절에 싸움을 못했지만 끈질기다고 하셨다. ◆송나은 어린이기자(서산초 5-3)=오늘 서산타임즈 어린이기자단이 시장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매우 기뻤다. 시장님은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에 빠져들게 하였고 많은 교훈을 주셨다. ◆이은주 어린이기자((석림초 5-1)=여러 곤란한 질문에도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고 우리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잘해 주셨다. 시장님은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고교때 공부를 잘 안해서 대학 갈 때는 한번 떨어 졌다고도 말씀하셨다. 시장님은 우리에게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시장님이 앞으로도 쭈욱 우리 고장을 발전시키셨으면 좋겠다. ◆유보민 어린이기자(학돌초 5-6)=처음에는 시장님을 만난다고 해서 무뚝뚝하고 무서울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어린이기자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셨다. 시장님이 서산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세인 어린이기자(언암초 6-2)=시장님이 꿈을 갖고 이루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꿈을 위해 노력하고 성공한 점을 본받고 싶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여 이루었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점에서 시장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조예지 어린이기자(언암초 6-1)=시장님은 큰 꿈을 갖고 이렇게 시장까지 되셨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역시 시장님처럼 큰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봉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봉사의 깨달음을 얻게 하고 싶다. 이 밖에도 어린이기자들은 유상곤 시장에 대해 “참 다정하시고 마음이 넓은 것 같다(김성환 어린이기자)”, “잘 웃으시고 침착한 것 같다(정지윤 어린이기자)”, “재미있고 재치도 있으신 것 같다. 그리고 책임감도 있는 것 같다(김은혜 어린이기자)”, “시장님은 곤란한 질문에도 바로바로 대답을 해주시며 침착하신 것 같다(이지혜 어린이기자)”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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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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