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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6.1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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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서산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호산록 湖山錄>을 통해서다. 올해는 1619년 이조정랑을 지낸 한여현 공이 당시 서산의 인문지리를 망라하여 서술한 호산록을 펴낸 지 꼭 400년 되는 뜻 깊은 해다. 호산록은 개인이 쓴 읍지(邑誌)가운데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귀중한 사료로 알려지고 있다.

호산록은 1992년 서산문화원에서 처음 번역하여 발간하고, 1999년에 재판을 냄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귀중한 문헌이 빛을 보기까지 정성을 다하여 소장해온 후손과, 번역·발간을 추진한 당시 서산문화원 김현구 원장을 비롯한 회원,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드린다. 

고려 때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뿐 아니라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와 설화를 기록하여, 조정 관료인 김부식 등이 집필한 관찬사서(官撰史書) <삼국사기>와 더불어 더없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찬(私撰)인 호산록 또한 서산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 지방의 역사, 문화, 문물, 풍토와 백성들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써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호산록은 건(乾)ㆍ곤(坤)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이라 할 수 있는 ‘건’편에는 서산의 경계, 건치연혁, 군 명칭 변경과 지위의 승강(乘降), 주요 성씨(姓氏), 향교, 성곽, 이명(里名), 산천, 토산품, 민속, 향풍, 고적 등 유무형의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였다. 하권에 해당하는 ‘곤’편에는 충신, 효자, 절부(節婦) 등 고금(古今)의 인물을 사연과 함께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우선 ‘호산(湖山)’에 관한 설명이 있다. 서산의 명칭에 관하여 보면, 백제 시대에 기군(基郡), 통일 신라 때 부성(富城), 고려 이후 서주(瑞州), 서산(瑞山), 서령(瑞寧)이 있었다. 즉 ‘호산’이라는 명칭은 없었는데, 호산록에서 서산의 별도의 이름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조 종친들이 ‘호산감’이라는 직함을 하사받고 서산에 거주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 장, 한 장 넘겨 읽으면서 옛 서산의 모습을 그려보고 선조들의 생활상을 떠올려 보며, 많은 느낌을 얻었다.

특히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 부문에서는 아리고 아팠다. ‘해호(海戶)’편에 ‘가난한 어민, 홑옷을 입은 자들이 얼음을 깨고 석화(石花, 굴)를 잡으며, 겨울 철 눈 속에 낙제(絡蹄, 낙지)를 잡는데 맨발로 언 개펄에 들어가서 천번 만번 죽을 고생을 하여 관청에 헌납하면 … 추위에 시달림을 불게하고 혹독하게 볶아대니 어민의 고생은…’구절이 눈에 띄었고, 관리들의 행태에는 가슴이 무거웠다.

선정을 베푼 태수(太守)의 사례는 지금도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 많았다. 태수에 대한 감정으로 감사(監司)에게 탄원서를 낸 교생(校生)이 옥에 갇히자 몸소 찾아가 위로하고 사과한 후 동헌 위 자리에 앉힌 다음 지적한 사항 하나하나를 새기며, ‘관리와 백성들이 아첨하고 칭찬하는 말뿐인데, 경계해주는 바른 말을 해주니 나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효자, 열부들의 뭉클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선생을 지곡(地谷)출신이라고 명정한 것도 호산록에 기록이 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으니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역사와 인물, 미풍양속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록이 없다면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지역마다 시‧도지(市‧道誌)와 시‧군지(市‧郡誌)를 비롯하여 향토지를 만드는데 힘쓰는 것은 이런 취지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산록은 되새겨 볼수록 가치가 크다. 아울러 이처럼 귀중한 사료를 오늘에 되살리는 노력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역사적 문헌을 남긴 취지에도 부합된다.

역사는 당시의 사실과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데 의의가 있고, 이를 재발견하여 오늘에 되살릴 때 가치가 있다.

이에 몇 가지 제안한다.

첫째, 재간행이 필요하다. 이를 전문판(全文版), 발췌본 등으로 나누어 발간하고 널리 보급하여 향토연구 자료로 활용함과 동시에 시민과 학생들에게 ‘서산 역사알기’ 교재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하되 알기 쉬운 용어와 해설을 덧붙이고, 가로쓰기로 편찬하면 젊은 세대가 읽기 쉽고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굳이 한자로 된 원문은 수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둘째, 당시 목민관의 업무수행 자세에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그 정신과 자세를 거울삼아 기관장을 비롯하여 공무원들이 마음에 두고 일했으면 한다. 

셋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사찬의 향토사 자료로써, 그 가치를 선양하고 길이 보존하려면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서산이 이만한 역사자료를 남겼다는 자랑과 잘 간수하여 온 노력, 그리고 번역본을 발간한 지혜를 높이 사면서 또 다른 형태로 재탄생하여 널리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 서산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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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호산록’을 되살리는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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