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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7.0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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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교수.JPG

 

성리학을 고려에 최초로 전수한 정신보와 서산지명을 얻게 한 정인경 선생의 업적에 대한 국제학술대회가 지난달 12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정신보(?∼1271)는 고려에 송나라의 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의 새로운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몽고의 전란을 피하여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아들 정인경(1241∼1305)과 함께 몽고군을 격파하면서 무신정권을 끝장냈다. 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이 왕권을 보위하고 끌려간 동포를 환향시키고 패전으로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아 오는 등 모든 일은 오로지 탁월한 외교와 정치로 이루어낸 것으로 아버지 정신보의 가학의 힘이며, 귀화 다문화 1세대 정인경선생의 탁월한 노력과 재능이기에 이를 재조명 한다.

이러한 생전의 공적으로 서산군의 작위를 받았으며 서산이란 지명을 얻게 되었고 1305년 타계하신 후 1306년 양렬공의 시호를 받게 된다.

1237년 정신보가 남송에서 고려로 망명한 사건과 정신보ㆍ정인경 부자의 업적은 서산만이 갖고 있는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문화와 역사이며 또한 다양한 유산의 관광자원이기에 기획하고 가공하기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운을 융성시킬 수 있는 소재일 것이다. 이에 원외랑 정신보와 성리학의 전래에 대하여 고찰하여 본다.

몽고가 크게 일어나 중국대륙을 점령하던 시대는 1206년부터 1367년까지이며 걸안, 서하, 금나라, 송나라, 바그다드, 아라비아 까지 아시아 전체가 몽고로 인하여 전쟁에 휘말리던 시대이다. 원 세조(쿠빌라이, 재위 1260-1294)는 1260년 중국 최초로 이민족의 왕조인 대원을 세우고, 1271년에는 연경에 도읍하여 국호를 원이라 칭하고 1276년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한다. 1231년~1259년까지는 몽고군의 고려 침공시기로서 고려 고종 24년 서기 1237년 형부원외랑 정신보가 고려에 망명한 시기는 몽고의 침략으로 남송이 망하기 39년 전 형부원외랑 벼슬 직에 있다가 충신은 두 나라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의로 고려국 간월도에 망명 귀화하게 된다. 이때는 고려의 풍속이 불교만 숭상하여, 정신보가 성리학으로 고려사람 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니 고려 선비들이 대단히 기뻐하며 송나라의 정주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송나라의 경우 주렴계(周廉溪, 1017-1073), 장횡거(張橫渠, 1020-1077),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정이천(程伊川, 1033-1107), 주희(朱熹, 1103-1200)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이들의 학문을 정주학 또는 그들의 성을 따라 주장정주의 학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11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인 것을 감안하고, 고려와 송이 우호적인 관계에서 인적, 학문적 교류가 활발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13세기 초 송나라에서 대학자로 명망가였던 정신보가 1237년부터 성리학의 강학과 소개를 하였다고 하겠다. 원 태조가 덕안을 함락한 후 유학자 조복을 얻고 금화에 살던 정신보의 학문과 인품의 뛰어남을 듣고 요추로 하여금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한다. 元은 몽고군이 하북덕암을 함락하고 많은 학자들을 포로로 삼아 연경(북경)으로 데려가면서부터 유학이 심어지게 되었으며, 원나라에 유학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조복(趙復)과 요추(姚樞) 그리고 허형(許衡,1209-1281)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정신보와 동시대의 유학자들이다. 요추는 하남사람으로 元나라에서 벼슬하게 되고 포로로 된 조복을 달래서 연경에 이르게 하였으며, 조복에 의해 정주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요추는 특히 원 세조와 가까운 사이로 세조를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며 연경에 태극서원을 세우고 조복을 청해 정주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조복은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요추에 의해 연경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주장정주의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요추와 조복이 신보를 회유하여 신보도 함께 몽고 태조를 도와 일할 것을 요구함에 신보가 말하기를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북정(몽고)에 신복(臣僕)할 수 없다하며 죽음으로 맹서하니 원나라 태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신보는 이와 같이 조복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남송에서 정신보가 조복에 버금가는 유학자의 위상임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정신보는 다음해 정유(丁酉)년에 소항(蘇杭)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동방의 나라 마한 서주의 간월도에 망명하여 살게 된 이유이다.

1289년(충렬왕15) 정인경이 충렬왕이 원나라 연경에 가게 되어 호위시종 할 때 정인경이 충렬왕에게 청하여 안향을 고려 유학제거(성균관관장)에 제수하게하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오도록 권하여 안향으로 하여금 주자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 유학자들과 교류하게 하고 고려 유학을 크게 부흥시키니 1237년 정신보의 성리학 전래는 안향이 1290년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온 것보다 53년 전의 일이다. 이와 같이 정신보는 남송에서 이름 높은 성리학자이며 고려의 충신이고 고려에 최초로 성리학의 강학과 소개를 한 분이다.

18세기 목만중(睦萬中)은 채모가 지은 정신보의 묘갈명을 인용하면서 정신보가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을 사숙(私淑)한 것이 틀림없고, 정신보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전수한 것이 틀림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정신보는 그간 많은 벼슬을 사양하다가 고려 원종10년(1269) 인주(의주)태수로 있으면서 원나라를 추종하는 부원배(附元輩) 최탄(崔坦)등에게 여러 번 죽임을 당할 번 하였으나, 고려 왕실 보존에 큰 공을 세우고 무신정권을 종식(1270)시키는데도 기여를 하였다. 1271(원종12년)에 별세하시니 관작(官爵)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예빈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禮賓事)요 관직(官職)이 상서형부원외랑절강정공(尙書刑部員外郞浙江鄭公)이다.

묘는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산의 95 연화산에 있으며, 서산시 송곡서원, 합천 운계서원에 배향되었고, 2002년 중국 국가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에도 배향되었다. 매년 춘․추로 음력 2월과 8월 정일에 민, 관, 유림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성/서산군 양렬공 정인경선생 기념사업회장

서산타임즈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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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와 정인경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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