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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7.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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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편집국장

 요즘 극장가에서는 히어로물이 인기다. 아이언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미국국적이다. 미국은 영웅을 사랑한다. 그래선지 영웅 호칭도 잘 붙여준다. 미국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 자기 일이 아닌데 과감히 나서는 것만으로 영웅소리 들으며 박수 받는 장면이 왕왕 등장한다. 나서서 한 일의 성패를 떠나서 말이다.

며칠 전 서산시 한 공무원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같이했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 매사에 나서기 좋아하며 에너지가 넘쳐 좋은 일이라면 앞뒤 안 재고 앞장서는 공직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서산이 아니라 미국서 태어났더라면 한 번 쯤은 시민 영웅으로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그런 인격의 소유자다.

저녁을 마칠 때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무원 일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그의 불만은 두 마디로 요약됐다. “공무원의 복지부동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도 그러고 있다”

그는 민원이 들어오면 자기부서 해당 업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게’ 첫 번째 순서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처리해주는 게 맞아도 근거 규정이 없다면 그 민원은 처리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규정에도 없는 일을 왜 했냐, 문제 생기면 책임질 거냐고 추궁당할까 두렵단다. 나대는 사람으로 찍히면 진급에도 악영향이 온다. 무슨 일이든 안 하도록 자신이 다듬어졌단다. 공무원 모두가 그런 건 아닐 테다. 그러나 자기조직은 확실히 그렇고 다른 곳도 대체로 그럴 것이라며, 팩트와 추정을 뒤섞어 술기운과 함께 쏟아냈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한국사회 전반이 그렇다. 앞장서 어떤 일을 성공했을 때 받는 칭찬보다, 괜히 나서서 실패했을 때 받는 비난이 압도적으로 큰 곳이 한국이다.

군사정권에서 파생된 집단주의가 튀는 행동을 죄악시하게끔 했다는 분석도 있다. 모두가 눈치 볼 때 나서봤자, 잘 해야 본전이다. “지가 뭔데 나서”라며 시기질투가 따라오기도 한다.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질타를 각오해야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행동규범은 학교와 군대, 직장 등을 거치며 우리에게 내면화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일을 벌이는 사람보다, 팔짱끼고 품평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부작위 편향성(omission bias)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나중에 발생할 손실보다, 움직였을 때 당장 발생한 눈에 보이는 손해를 더 아까워하는 심리상태다. 이런 심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체된다.

미국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 난해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앞장서는 행동을 격려하는 문화는 부럽다. 실패하더라도 선한 동기와 과감한 용기 자체를 높이 사주는 사회.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런 역동적 사회가 만들어 내는 작위이익(作爲利益)이 정체된 사회가 아낀 손실보다 ‘언제나 크다’고 강조한다.

물론 책임과 권한이 명확한 업무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도 안 된다. 책임이 불분명하거나, 해법이 모호한 문제가 있을 때 활기 있게 나서는 사람을 격려하는 문화를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중요한 일은 책임소재와 해결방안이 애매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조직문화가 정착되려면 행정기관 평가나 공무원 인사고과 방식도 바뀌어야 할 테다. ‘의욕과 용기’ 그 자체에도 보상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현재 운용중인 ‘적극행정면책제도’도 확대보완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시민들에겐,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공무원이야말로 그 어떤 히어로보다 멋지고 사랑스럽다.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에 비할 바가 아니다./이병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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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무원의 ‘취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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