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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3.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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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jpg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생애 첫 직장, 첫 출근 하던 날 내게 주신 아버지 말씀이었다.

나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으니 흐린 물이 되란 말이 아닌가? 내 상식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백성으로 사시면서 터득한 지혜려니 하고 지나쳤다. 아버지 시대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은 투명하고 공정한 맑은 물이어야 한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란 말도 있지 아니한가?

입사한 지 거의 1년이 되어갈 무렵, 책임자(참사)가 바뀌었다. 처음 분은 매우 인자하였다. 그러나 바뀐 책임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빈틈이 없고 깐깐하고 엄격했다. 어느 날, 결재 서류를 보다가 버럭 화를 내었다. 결재판을 내던지며 “이걸 서류라고 들고 와?” 순간 당황해서 사죄하고 결재판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서류를 살펴봐도 틀림이 없었다. 동료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직장을 고만두기로 했다. 급여도 시원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아내와의 약속(1년만 하기로)도 있었기에 잘 되었다 싶었다. 이튿날, 결재 서류에 사직서 봉투를 얹어 참사에게 갔다. “이게 뭔가“ “오늘부터 고만두겠습니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방에 들어가 보니 그분이 앉아 있다. 그분은 위장이 좋지 않아(수술하심) 도시락을 드셨는데 육개장이 놓여있다. 좋은 군인이 되려면 훈련을 잘 받아야 하는 것처럼 좋은 직원이 되려면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장래가 있어 보여서 의식적으로 그랬으니 이해해달라고 사죄했다. 머뭇거리며 수저를 들지 않는 나를 보고 그 매운 육개장을 드셨다. 자식 또래 직원에게 사과하는 모습도, 고춧가루 범벅인 육개장을 드시는 모습도 내겐 충격이었다. 식사 후 사직서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어디가 잘 못 되었는지 물었다. 기안 용지에 쓴, 내 글씨 탓이었다. 받침 ㄷ자를 ㄴ자로 쓴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본뜻을 깨달았다. 글씨를 잘못 쓴 것, 결재판을 내던진 것, 욱하고 사표를 낸 것, 자식뻘 직원에게 사과하는 것, 위험을 무릅쓰고 매운 음식을 먹은 것, 그런 일들은 정상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숨 쉴 공간이다. 아버지가 하신 ‘맑은 물’은 숨 쉴 공간이 없는 걸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엊그제 식당에서 4명의 친지와 칼국수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 중 하나가 화장실에 가려고 나가다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나가 봤더니 한 젊은 친구가 우리 일행의 신발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있더란다. 신발을 찍지 말고 차라리 문을 열고 보라고 했단다. 댓돌을 보니 신발이 5개가 있었다. 하나는 주인 것이라 했다. 신고하면 돈을 준다나?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코로나 자가 격리 지침을 위반하고 병문안을 한 딸에게 150만 원의 벌금을 물린 기사를 보았다. 딸은 미국에서 입국하여 2주간 자가 격리 중이었는데 2시간가량 거주지를 벗어난 혐의였다. 아버지는 닷새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짠 카펫에 일부러 흠 하나를 남겨 놓는다고 한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한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한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 부른다.

제주도에 갔을 때 돌담을 보았다. 돌과 돌 사이가 비어 있었다. 그래야 태풍에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바울 사도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신처럼 완벽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더러는 빈틈도 있어야 사람 냄새가 난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 줄 수 있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보통학교조차 나오지 않은 아버지가 어떻게 채근담의 말을 인용할 줄 아셨을까? 천국에 가신지도 벌써 20여 년이나 되었다.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지는 아침이다./시인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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