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5년, 또 전장…귀양 보낸 정충신 불너 8도 부원수 임명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9)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9)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이때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를 평정하기 전에 척화 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후방의 조선을 쳐서 후환을 없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왕자 아민에게 3만 대병을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한다. 왕자 아민은 항장(降將) 강홍립을 앞세우고 대군을 몰아 노도와 같이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안주를 위협하니 평안 병사 의춘군 남이흥이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한 폭사를 했다. 적병들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계속 남진(南進), 황해도 평산성에 육박하여 도성을 협박하니 겨레의 비운은 또 찾아온 것이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년) 조선 땅은 다시 전장(戰場)으로 변하고 백성들은 다시 남부여대, 피난 보따리를 꾸려서 이 산골 저 산골짜기를 헤매야 했다. 인조는 도성을 비우고 강화도로 몽진(蒙塵)하였다.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니 그 누가 이 국난을 막아 낼 것인가! 나라 일이 위급하면 옛 충신(忠臣)을 생각한다고 귀양 보냈던 정충신을 다시 불러 8도 부원수로 임명하고 연약한 수병(手兵) 몇 천 명을 거느리어 후금의 대군을 막게 했다.
정충신은 이 큰 국난을 몸에 지고 일어나 갑주(甲冑)를 감고 정청(征淸)을 위해 명도(名刀)를 빗겨 들고 마상에 올라 수병(手兵)을 지휘하여 전선으로 달려 나가니 이는 임진년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白衣從軍)과도 같다 하겠다.
이렇게 출진한 정충신은 또 한 번 타고난 의(義)와 지략으로 적을 막게 되었다. 허약한 군사를 재촉하고 독려하여 마침내 황해도에 출진하였고 한참 진을 치고 후금군과의 혈전을 준비하는데 그때 오성대감의 사위 윤옥도 그 진중에 있었다. 부원수는 윤옥으로 윤량관을 삼았는데 갑자기 난리를 만났을 때라 곡식을 운반하는 길이 막혀서 군량을 대지 못함에 부원수는 군령을 내려 운량관을 잡아들여 대하에 꿇리고 문죄한 후에 내쳐서 베이려 한다. 윤옥은 잡혀 올 때에 죽을 지경을 당할 줄 이미 짐작하고 그 장인 오성 대감이 배소에서 써주었던 서찰을 찾아 몸에 지녔다가 부원수에게 올렸다.
정 부원수가 건네는 서찰을 받아보니 겉봉에 ‘부원수 막하’라 쓰여 있는데 분명히 오성 대감의 필적이라, 부원수는 오성 대감의 필적을 대하니 마음이 감동하였는지 편지를 떼어 보지도 않고 윤옥을 방면하면서 군량을 곧 대라 하였다. 한 조방장이 부원수에게 말하기를 “군률이 엄하지 못하여서는 여러 사람을 진항(鎭抗)하지 못할 터인데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윤옥을 용서하여 주시는가요?”고 말하였다. 부원수는 초연한 기색으로 “내가 차라리 군법을 세우지 못한 허물을 당할지언정 오성 상공의 지고하시던 은공을 져버릴 길이 없소이다. 저 운량관은 오성 상공의 사위요. 이 서찰은 바로 오성 대감의 서찰이니 오늘 이 일이 있을 줄 알고 써주신 바이라 어찌 군률만 세우기 위해 오성 상공께서 대우해 주시던 일을 저버릴 수가 있겠소.” 하였으니 이는 공(公)에도 사(私)가 있다 함이 아닌가!
조방장은 부원수 정충신에게 그 편지를 떼어 보지 아니함을 이상하게 여기어 편지를 떼어 사연이나 보시라 말하였다.
부원수는 대답하기를 “서찰을 떼어 본다 해도 사연은 없을 것이오”했다. 조방장이 의아하여 편지를 달라고 하여서 자기가 떼어보니 과연 글씨 없는 간지 한 폭이라 이는 할 말이 없으니 생각하여 하라는 뜻인데 부원수가 떼어 보지도 않고도 빈 편지인 줄 알았으니 그 역시 큰 총명함이 아닌가! 그도 그렇거니와 오성 대감은 어찌 이렇게 정 충신이 꼭 부원수가 될 줄 내다보고 자기 사위의 운명을 짐작했을까? 과연 신인(神人)들 끼리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강홍립을 설득시켜 청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부당하다 꾸짖으니 후금 왕자 아민(阿敏)도 조선군의 만만하지 않음과 평소 정충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철군을 하고 정충신은 군사를 이끌고 평안도 용만까지 수복 진군하여 백성을 안돈(安頓) 시켰다.
그 후 한동안 용만에 머물면서 해상의 잡적을 소탕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읖었다. “夢中 嶺大兵………………環珮 丁丁下玉階”
(꿈 가운데 대군을 이끌어 평생 원전인 오랑캐를 평정하니 정말 봄날이 저물었도다. 솔솔 뿌리는 봄비는 거리에 가득하고 온 사람이 개선가를 제창하며 만인이 즐겨 하도다. 일천 관원이 승전을 축하하고 만산은 경사를 환호하며 허리에 찬 환패 소리는 쟁쟁하여 옥섬돌에 내리더라.)
정말 그의 충혼이 눈물겨울 뿐이다. 정묘호란 후에는 병으로 누워있었건만 임금은 여러 번 불러내어 오위 도총관, 비번사 당상 등의 요직을 맡기고 정헌대부의 높은 품계를 내렸다.
정충신은 항상 북쪽의 나라 일을 걱정하여서 병중의 노구를 이끌고 여러 번 헌책을 했건만 후금의 정세에 어두운 조신(朝臣)들은 숭명론(崇明論)만 고집하였다. 정충신의 헌책(獻策)을 저버린 결과 후금과의 관계는 또다시 험악해지고 국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난리를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별안간 구슬피 우는 소리가 새 문안 대궐에서 울려 나왔다. 이 뜻밖의 일에 소문에 소문이 이어져 온 장안은 술렁, 술렁, 육주비전(六注比廛) 상인들은 문을 걸어 닫고 철시를 했다. 웬일인가?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고 눈들만 휘둥그레 할 뿐이었다. 대내(大內)의 자세한 소식이 차차 무예청 별감, 내시, 나인, 대갓집 하인의 입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중전께서 산후 별안간 승하하신 것이다. 올해 춘추 마흔둘이라 원래 노산(老産)인 까닭에 산실청에서 그대로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창황한 중에 무슨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풀리고 어영청 군사가 새 문안 대궐에 결진했다. 훈련대감과 어영대장이 궁성을 호위하려는 것이다. 온 백성이 백의백립(白衣白笠), 설움의 물결이다. 온 백성이 망곡(望哭)한다 하고 치상(治喪)에 분주하여 을해년 마지막 달인 섣달그믐이 다 가는 줄도 모르게 병자년 새해를 맞이했다. 양반들은 분참봉(分參奉) 바람에 눈이 빨갛고 갓방 주인은 백립 파는데 재미를 붙이고 장안, 장외의 남녀노소는 국장(國葬) 구경에 정신이 빠져 세월 가는 줄도 모르게 이월이 닥쳐왔다.
막 왕비 한씨의 인산(因山)을 치룬 뒤에 청나라의 누루하치의 아들 청 태종 홍타이지한테서 괴상한 이름을 가진 사신들이 왔다.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등 백구십 여명이나 되는 사절단이었다. 옷은 모두 청빛인데 소매는 하도 길어서 손등을 덮는 까닭에 곰배팔 같기도 하고 팔죽지가 떨어진 사람들 같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은 검은 마고자에 앞뒤에다 대망(大蟒)을 수놓아 입었는데 앞이마 쪽은 반달 모양 같이하고 뒤통수는 빗질하여 빗은 다음 어슷비슷 엎어 따서 걸어 다니는 대로 머리꼬리가 발꿈치에 치렁거린다. 당 감투를 쓴 자도 있고 공릉 비단으로 만든 검은 모자에 붉은 꼭지를 단 자도 있다. 정묘호란에 누루하치와 형제의 의를 맺은 다음에 이상한 옷을 입은 청나라 사신이 오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많이 온 일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어염에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불안해하였다. 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통사가 홍제원까지 나가고 접반사가 모화관까지 나가 용골대, 마부대 일행을 접반하고 동학골 북평관으로 안내하였다.
이번에 사신으로 나온 연유를 물으니 용골대는 한(汗)인 홍타이지의 친서 이외에도 다른 봉서(封書) 두 통을 내놓았다. 친서는 춘신문안(春信問安)과 아울러 이번에 승하한 왕비 한씨의 국휼치조문(國恤致弔文)이며 치제물목단자(致祭物目單子)이다. 접반사가 나중에 내놓는 두통의 봉서를 보니 피봉에 한 통은 금국집정팔대신이라 쓰고 또 한 통에는 몽고제왕자(蒙古諸王子)라 적바림한 뒤에 앞면에는 봉(奉)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 적혀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접반사는 정색을 하며 “어찌해서 너의 나라 대신과 몽고 왕자들이 무엄하게 상감께 글을 바쳤느냐?”라고 탓하고 나무라니 용골대가 썩 나서며 “우리 한(汗)의 공덕이 높아서 치면 반드시 이기고 싸우면 반드시 굴복하니 명나라로 이젠 운수를 다 했소. 그래서 안으로 팔 대신과 밖으로 항복한 몽고 왕자들이 지금 한(汗)을 추대하여 황제위에 나가시게 했거니와 귀국이 이 소식을 들으면 대단히 기뻐하리라 하겠기에 우리가 함께 의논하러 온 길이오.”라며 말을 막았다.
접반사는 이 엄청난 소리에 기가 막혀 “허허! 이런 변괴가 있나. 되놈이 천자라니…” 통사를 돌아보고 입 안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접반사는 국서와 봉서를 받지 않은 채 용골대를 흘겨보고 급히 말을 몰아서 조정에 이 사유를 복명하였다. 접반사의 복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물의가 분분하였다.
“오랑캐의 괴수(魁首)가 황제가 되다니 방자하고 무엄하구나! 되놈이 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발호하니 한심한 노릇이오. 이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야 하겠소이다. 해괴하고 망극한 일이오니 즉시 오랑캐 사신을 불러 목을 베어 당당히 법을 알리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합니다.”라며 장령 홍익한이 분개하여 앞에 서서 상소를 올렸다.
한편 이조판서 최명길은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용골대가 온 것은 다만 춘신조제(春信弔祭)를 표방하여 온 것이오. 한(汗)의 글에도 별말이 없으니 화를 늦추는 방책은 어찌 생각하지 않으오리까? 후금의 사신을 불러 보신다 하여도 무관 하겠사옵고 몽고 왕자들도 꼭 반드시 박대할 것은 없고 엄하게 물리칠 것은 패서(悖書) 뿐이오이다. 사기를 한번 그르쳐 놓는 날이면 뒤에 이것을 뉘우치나 미치지 못할 일이오이다.” 하였다.
이렇게 의논이 분분한 중에 날짜는 이럭저럭 지나 용골대 일행을 북평관에 놔두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은 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다. 말을 잘 알아 듣지는 못하나 눈치만은 빠른 음흉한 용골대는 사방으로 줄을 놓아 조정의 물의(物議)를 염탐해 보니 사신의 목을 벤다는 등, 한(汗)의 편지를 받지 않는다는 등 조정이 불끈 뒤집혀 의논이 강경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용골대는 잔뜩 골이 나서 방 속에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접반사를 보내어 한(汗)의 치제(致祭)와 조상만을 받는다는 기별이 왔다. 이것은 최명길의 상소가 다소간 효력이 있어서 강경파들을 누른 것이었다.
어차피 정묘년에 화의를 맺은즉 치제와 조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될 터이나 한의 신하는 전과 달라 백여 명이고 그 중에는 무기를 가진 자들도 있으니 전례대로 대궐 안에서 조상을 받지 말고 따로 허청에 군막을 치고 조상을 받는 것이 옳다고 의논이 일치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