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행복
김풍배 칼럼

더 오르고 싶어 기를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더 가지고 싶어 노심초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더 자랑하고 싶어 안달할 때도 있었습니다. 눈앞에 어른거렸고, 조금만 노력하면 손에 잡힐 듯해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오르기도 했고 잡아보기도 했고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성취감도 맛보았고 보람도 있었고 자랑거리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느낀 만족과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눈앞에 또 새로운 언덕이 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생의 오르막까지 늘 부족한 듯했고 늘 목마른 듯했으며 채워지지 않는 불만으로 살아온 듯합니다. 행복한 기억보다 고생했던 생각이,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더 큰 세월이었습니다.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행복하기 위해서, 만족하기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아니면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어쩌면 정의할 수 없는 생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이제는 내리막 생이 되었습니다. 더는 오를 길도 없고 채울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날개가 찢기고 다리가 부러졌으며 눈이 멀고 귀도 어두워졌으니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원하겠습니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권력, 재물, 명예는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고, 보이는 건 낡은 육신과 목숨 연명할만한 연금과 문득 외톨이가 된 자아가 있을 뿐입니다.
욕망과 욕심. 두 가지가 다 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전에는 욕망과 욕심을 전혀 다르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욕망(欲望)은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것, 또는 그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욕심(慾心)은 분수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바랄 욕(欲)에 마음(心)이 들어가면 욕심 욕(慾) 자가 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마음을 더하면 바로 그것이 욕심이 되고 탐심이 되고 탐욕이 됩니다. 자기만을 위한 마음이 되고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욕구야말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발전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결국 욕망의 선한 기능은 사라지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욕망과 욕심의 평형이 무너질 때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순간이 됩니다. 이기적 욕심이 선한 욕망을 누르게 될 때 균형은 무너지고 평온을 잃게 됩니다.
내리막길이 되니 참 평안합니다. 행복의 등식을 생각하면 당연히 오르막 생이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작 행복은 내리막 생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를 길이 없으니 애쓸 일도 없고 채울 것도 없으니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 없으니 초조하지 않습니다.
입을 옷이 있고 누워 잘 집이 있고 삼시 세끼 밥 먹을 수 있으니 참 평안합니다. 적은 것에 감동하고, 사소함에 행복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안합니다. 체념은 마음을 덜어놓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체념. 결국 그 체념이 행복을 몰고 왔고 평안을 안겨주었습니다. 힘과 부와 명예가 나를 떠났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참 평안(平安)이 바로 역설적 행복이 아닌가요?
반소식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증(飯蔬食飮水 曲肱而沈之 樂亦在其中)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구부려 베고서 잠을 자는 궁핍한 생활일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라 했습니다. 공자는 이 말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와 귀는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라고.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도 그러할진대 보잘것없는 필부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모든 걸 체념하여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니 참 평안과 행복이 저녁노을처럼 감싸줍니다.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 어찌 거기에 참 행복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