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2)
김풍배 칼럼

크메르 루즈를 결성한 폴포트는 192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어촌 쁘렉스어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형과 함께 프놈펜에 유학했습니다. 1947년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1953년 캄보디아에 귀국하여 1960년 공산당 분파 크메르 루즈의 창설에 기여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인 호찌민 루트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 폭격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캄보디아에 반미 감정이 높아지자, 폴포트는 크메르 루즈를 결성하여 1975년 마침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캄보디아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는 사회 계층을 완전히 없애고 완전한 농업 중심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수도에 있던 300만 명의 국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습니다. 개인의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자, 의사, 교사, 종교인, 심지어는 안경 쓴 사람까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처형했습니다. 책도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적대 세력뿐 아니라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라며 그 가족과 어린이들까지 처형했습니다. 그 숫자는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인 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킬링필드는 크메르 루즈 정권 동안 집단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를 말하며 캄보디아 전역에 300여 개의 킬링필드가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이념이 남긴 교훈입니다.
필자가 갔던 왓트 마이는 절이며 위령탑, 화장터, 납골당, 고아원 등의 복합적 기능을 가진 사원입니다. 승려복을 걸친 어린 동자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잔혹한 고문과 학살 장면들의 그림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당시에 용케 살아남은 화가가 자신이 보고 체험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합니다. 칼로 목을 찌르는 장면, 한꺼번에 구덩이 밀어 넣는 장면, 일일이 다 그 참혹상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웃을 수 없었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공포였습니다” 킬링필드 생존자의 고백입니다.
필자의 눈에 비친 캄보디아인의 얼굴 첫인상에서 보았던 그늘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조금 더 걸어가니 당시에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과 뼈 들을 안치한 건물이 나왔습니다. 유리창으로 훤히 내다보였습니다.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그걸 보며 자란다고 생각하니 머리끝이 주뼛했습니다. 얼른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비통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는 순간, 십자가의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히틀러 같은, 폴포트 같은 인물이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배워야 합니다. 폴포트도 히틀러도 정권을 잡기 전, 민초들은 얼마나 열광하였나요.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폴포트는 겉보기에는 말투가 부드럽고, 침착했으며 말할 때 다른 사람을 꾸짖는 일이 없고, 잘 웃으며 따뜻하고 친절하며 기품이 넘치는 아주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라고 합니다. 악마는 바로 이렇게 세상을 속입니다.
악한 지도자를 선택한 국민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왔나요. 캄보디아의 명(明)과 암(暗)의 현장을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같은 돌부리에 넘어지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캄보디아 시엠립 거리에서 만난 개들이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개도 목줄을 한 개는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윤회사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개는 전생에서 가장 친했던 이웃이라 했습니다. 폴포트도 어떤 개의 모습으로 누구의 곁에서 어슬렁거릴까요?
이제는 스마트 폰만 열면 어떤 정보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보며 느끼는 감동과 현실감은 여행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필자에겐 잊지 못할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김풍배(목사, 시인, 소설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