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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 왜 가?

김풍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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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3.12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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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 본지 칼럼리스트

톨스토이 단편집에 ‘세 은사’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볼가강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민화’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입니다.

한 주교가 ‘솔로베츠키’라는 수도원을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판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어부의 말을 듣게 됩니다. 어부는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키며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 은사 세분이 사는데 성인들이라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주교는 선장에게 그곳에 데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선장은 주저했으나 주교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작은 배를 내주었습니다.

 

주교의 배가 작은 섬 가까이 다가가자 세 사람의 노인이 보였습니다. 허리춤에 포대만 두른 키 큰 노인, 등이 굽은 낡은 성직자복(聖職者服)을 입은 아주 나이 많은 노인, 중키에 작고 누추한 소작농 옷을 입은 노인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다가간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종으로 어린 양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종들이신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고, 제 능력껏 여러분을 가르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 섬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그저 자기 자신을 섬기고 부양할 따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교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묻자 “당신께서도 삼위이시고 저희도 삼인(三人)이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주님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은사들은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왼 종일 따라 하다가 마침내 다 외우게 되자 주교는 은사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큰 배로 돌아왔습니다. 밤이 되자 주교는 갑판 위 고물 쪽에 홀로 앉아 선한 노인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빠르게 배를 향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주교는 놀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배를 따라온 건 다름 아닌 은사들이었습니다.

 

세 은사는 주교를 보자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주교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쳐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은사들은 뒤돌아서서 바다 위를 날아갔습니다. 은사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동이 틀 때까지 한 줄기 빛이 빛났습니다.

 

필자는 한때 어느 요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요양원에 입소하려면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장기 요양의 경우 5등급 이상이면 가능하고 기타 대상자의 신체 기능, 사회생활 기능, 인지 기능 등 90여 개의 항목별 판단기준에 맞으면 가능합니다. 등급 판정은 건강보험공단의 직원 면담에 의합니다. 가끔 등급 판정에 합격하지 못해 입소를 포기한 걸 보았습니다. 입소희망자의 가정을 방문할 때 보호자가 하는 말 ‘보험공단 직원만 오면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지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보험공단 직원이 오기 전 입소 대상자 어르신에게 보호자나 함께 간 요양보호사가 신신당부했습니다. “의사가 오면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세요” 어르신은 몇 번이나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의사가 오면 어떻게 하라 구요?” “모른다고 할게” 어르신은 자신 있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건보 직원 앞에서는 모른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문까지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요?” 물론 등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인간의 본능적 존엄성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 도살을 앞둔 가축처럼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책도 신문도 자료도 없는 곳에서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각자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적행위를 한 것이고, 후에 그걸 기억하여 쓴 책이 바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라는 책입니다.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르신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세 은사’를 읽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존심뿐만 아니라 요양원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걸 아신 것입니다. 거길 왜 가? 건보 직원이 다녀간 뒤 타박하는 보호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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