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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09.01.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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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교를 배경으로

중국의 길림성에 있는 용정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근간으로 우리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성지이다. 중국속의 작은 한국 땅으로 불러지고 있는 용정은 김구, 저항시인 윤동주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용정은 지난 여름방학에 전 교직원과 함께 한 중국체험 연수 중 가장 가슴 저린 곳이다.

용정은 중국속의 한국으로 불릴 만큼 우리 선조들과 조선족 3세들이 약 70%가 살고 있는 조선족자치구이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정부에서 용정을 조선족자치구로 지정 한 것은 지방정치를 현명하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용정이 조선족자치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공공기관 및 상가들의 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간판의 앞자리나 위쪽에 한국말이 먼저 들어가 있다. 대부분의 간판들이 한국말 밑에 중국말이 들어가거나 한국말 옆에 중국말이 쓰여 있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도 모두 조선족3세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중국은 우리국민들이 여행을 다녀오는 나라 중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여행에는 가는 사람마다 나름의 목적이 있다. 그 나라 문화의 색다른 경험과 체험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열사의 혼이 서려있는 용정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용정은 조선족 자치구…총인구 70%가 조선족


용정은 주로 조선족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족 거리’이다. 연변의 대부분의 도시들은 공업과 상업을 위주로 하는 한족, 만족들이 거리를 형성한 다음에 그 거리의 한 모퉁이에 조선족거리가 점차 이루어졌다. 그것을 조선족들은 이주 후 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도시보다 농촌에 살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연변으로 이주할 때 교통중심이 용정에 집중하면서 기름진 벌판을 개척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1910년대 전반기부터 무산, 횡령, 종성일대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조선족 주민이 급격히 증가되었고, 새마을운동으로 오늘의 용정으로 발전했다. 조선족인구는 가구 3.775호, 인구 18,653명으로 용정 총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족거리인 자치구로 거듭나게 되었다.

용정은 또 연변의 경제, 무역중심지였다. 일찍부터 연변에 침입한 일제는 연변을 그들의 상품, 원료약탈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천로경편철도를 부설하였다. 천도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연변각지의 농산물과 특산물은 용정을 거쳐 조선과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일본의 저렴한 상품들은 조선을 거쳐 용정에 들어온 후 다시 연변각지로 수송되었다. 사방의 상인들은 용정으로 모여들어 무역이 연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용정은 조선족들의 문화발생지이며 중심지이기도 하다. 1900년대에 연변에서 처음으로 명동중학, 여학교 등 반일사립학교가 용정에 건립되었고 명동중학교의 반일 민족교육방침을 연변각지 사립학교에 전파하였다. 각종 신문사와 문화기관이 건립되고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용정에 와서 문학 활동과 교직에 종사하는 것으로 민족을 되찾기 위한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시로 유명한 윤동주시인도 용정에서 배출되었다.

이와 함께 용정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러한 동북항일투쟁 과정에서 많은 애국 열사를 배출했다. 1923년부터 1937년까지 간도일본총영사관 산하의 경찰이 체포한 독립운동투사들의 수는 무려 8,717명에 이르며,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경찰이 살해한 항일투사도 7,297명이나 된다.


용정의 전설 속 우물


우물 터 자리에는 마름모 꼴 모양의 네 기둥위에 기와를 올렸으며, 우물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청룡문양을 새겨 넣고 龍井地名起源之井泉(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쓰여 있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우물 터 바로 옆에는 큰 우물이 있었음을 상징하는 100여년 이상 된 능수버들이 오랜 역사와 전설의 살아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 버드나무가 지구촌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용정 우물터에서 전해지는 전설은 먼 옛날 해란강기슭의 한 작은 마을에 부지런하고 마음착한 아름다운 조선족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늘 강가에서 빨래를 하였는데, 어느 날 아이들이 강에서 작은 잉어 한 마리를 잡은 것을 발견하였다. 처녀는 거의 죽어가는 잉어가 불쌍하여 아이들의 손에서 잉어를 구출하여 물에 놓아주었다. 그런데 이 잉어는 동해용왕의 셋째아들로 ‘천의’를 위반하여 용왕은 그를 작은 잉어로 변하게 하여 강에 버려졌다. 잉어는 착한 처녀의 손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은 은덕에 감복하여 처녀가 빨래하러 올 때마다 처녀 앞에서 헤엄치며 노닐었다. 처녀는 이 작은 잉어가 애들한테 다시 잡힐까봐 걱정되어 조심스레 마을의 우물에 넣었다. 그날 저녁 잉어가 걱정되어 살그머니 우물가에 가보았더니 총명한 눈빛을 가진 젊은 총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총각은 다름 아닌 잉어가 변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둘은 달빛아래 아름다운 그림자를 남기며 뜨거운 사랑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에는 아픔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들의 혼인을 처녀의 부모님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모든 순결을 바친 처녀는 죽어도 잉어총각과 함께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처녀가 우물에 뛰어드는 순간 우물 속으로부터 한 마리 청룡이 치솟아 오르며 처녀를 받들어 안고 하늘나라로 사라졌다. 이때부터 용이 날아오른 우물이라 하여 이 우물을 용정이라고 불렀고 처녀가 살던 마을을 용정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용정우물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일본제국주의의 민족 탄압이 혹심한 상황에서도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자기의 시와 올바른 삶을 바친 천부적인 저항시인으로 조국애가 하늘을 찌르는 시인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일제통치 속에 시련당하는 겨레를 개탄하면서 민족에 대한 자아반성과 참회의식, 굳은 민족의 지조와 순절정신, 미래에 대한 열정적 동경, 속절없이 솟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던 이에 대한 끝없는 추억 등 광범위한 생활내용을 다각적으로 다룬 내용들이다. 윤동주시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시인으로 살다가 옥사하였다.

윤동주 시비

비암산의 일송정


용정에서 서쪽방향으로 약 3km쯤 되는 산등성이에 올라 다시 남쪽으로 굽어보면 우뚝 솟은 비암산이 있다. 이 산 꼭대기에는 10m되는 깎아지른 듯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억세게 자란 소나무가 있었다. 1938년에 있었던 이 소나무는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용정사람들은 이 고색찬연한 일송정을 푸르른 기상이 대한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기원하는 대상과 장소로 여기고 우러러 보았으며, 여인들은 일송정의 바위를 기자석(祈子石.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삼았고, 농부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뿐만아니라 이 비암산은 혁명투사들과 항일투사들의 비밀활동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용정의 각 학교 학생들이 진달래가 피는 봄날과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일송정으로 소풍을 가곤 하였다. 애국학생들은 이 일송정 아래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시낭송과 반일가를 불렀으며 일송정을 일제의 통치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성스러운 형상으로 찬미하기도 하였다. 이 일송정을 동포들이 영물처럼 숭상하는 것을 알아차린 일제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1930년대 초반에󰡒용정에 든 수재는 일송정 귀신 탓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그 후 일본총영사관의 군경들은 고의적으로 비암산 부근에서 사격연습을 하면서 일송정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송정은 여전히 푸르른 기상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군은 밤중에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후추가루를 가득 채워 넣고 쇠못을 박아 죽어버리도록 하였다. 이후부터 우리 민족이 그토록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일송정 푸른 솔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더니 1938년에 이르러 영영 말라죽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중국정부 당국에서 이곳에 일송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시인 윤해영의 노래 말로 알려진「선구자」는 원래는「용정의 노래」였다는 것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용정 출신으로 나라 잃은 슬픔에 망연자실하던 중에 심기일전의 자세로 나날이 꺼져가는 동포들의 저항심을 회생시켜 보려고 이 가사를 썼다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면, 어느해 겨울 작곡자인 조두남선생에게 몹시 병약해 보이는 젊은 윤해영이 찾아와서 자신이 쓴 「용정의 노래」가사에 곡을 붙여주기를 부탁해 놓고 갔는데 그 후 청년은 여러 해가 지나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조두남선생은 끝내 그 청년(윤해영)을 보지 못하고 만주 땅을 떠났다. 남한에 정착한 선생은 행여나 하고 그 청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소식이 없어 뒤늦게나마 원작제목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고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용정을 무대로 한 이 노래 속에는 민족정기와 정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


민족의 자랑 대성중학교


용정중학교 교정에는 대성중학교 옛터가 남아 있다. 대성중학교는 20년대 초기에 용정의 유지인사들이 중학교를 건립 할 것을 제안하면서 희사금을 모아 용정시 제4구에 2층 벽돌집에 목조 10칸으로 된 교사를 짓고 1921년 10월 8일에 정식으로 개교식을 가졌다. 개교식에는 5명의 초빙교사와 청년 50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20년대 후기와 30년대 초기에 용정 여러 학교 학생들은 반일 투쟁의 선봉군으로 나섰다. 1930년 1월 23일 용정의 여러 학교 학생들은 광주학생들의 반일투쟁을 성원하는 성대한 시위행진을 진행하였는데 대성중학교 학생들이 앞장에 섰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일본영사관에서는 사복한 순경을 학교에 파견했다. 그들은 수시로 수업 중에 교실에 뛰어들어 몇 명의 학생들을 함부로 붙잡아가서는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였다. 2월 어느 날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학생들을 몽땅 영사관 마당에 끌어다가 찬 땅바닥에 3시간 동안이나 끊어 앉히고 주모자를 검거하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누구도 굴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투항하고 해방이 된 후 대성학교졸업생들이 복교사업을 진행하여 교원 10여명을 초빙하고 600여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9월 12일 대성중학교 옛 터에서 두 번째로 복교식을 거행하였다. 1956년 9월 16일 대성중학교는 용정의 5개 중학교와 합쳐 길림성용정중학교로 만들어졌다. 영광스럽던 반일투쟁의 발원지였던 대성중학교는 무수한 독립열사들과 국내외의 수많은 지성인들을 배출한 요람으로 오늘도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고 있다.

대성중학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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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중국 속 우리의 땅 ‘용정’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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