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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무원은 ‘보초’다?
    6.3 대선과 맞물려 국민의 시선은 여기에 쏠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지만, 최근 한 통신사 해킹 사고와 관련하여 가입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개인정보 유출 염려와 몰래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는 금융사기 걱정이 크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한은형은 해킹 사고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유심칩을 갈게 된 경위를 시간대별로 글을 썼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아침부터 대리점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보며 11시 30분 그 줄에 합류했다. 오후 1시 반에 번호표를 받고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렸다. 3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유심칩을 교체했다. 버텨서 해냈다. 하지만 뭘 해냈나? 내가 유심칩을 교체해서 얻은 이익은 없다. 겨우 현상을 유지했을 뿐이다. 미미한 안심을 얻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현상 유지’ ‘미미한 안심’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긴 시간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고작 해 낸 일이 무엇을 얻거나 이룬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한 것에 대한 소감을 실감 나게 썼다.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공연히 에너지를 썼을 때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공무원은 보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공무원이 보초라니? 옛날 낮과 밤, 평일과 공휴일을 구별하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무실을 지켜야 했던 시절에 길든 인식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도 크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서도 그냥 ‘5분 대기조’ 상태로 말이다.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뒤떨어진 행태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하듯 그랬다.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보초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거나 어떤 결과물을 내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근무 중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하여 보초가 놀거나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리를 뜨거나 다른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 뚫리면 큰 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민원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원실을 비울 수는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상황이 없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직원이 밤을 지새우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냥 논 것인가? 당직원은 없어도 되는가? 평온하더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이 24시간 대기하는데 화재나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근무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보초론’을 유지한다. 한편, 국민은 공무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손과 발을 움직이며 무언가 하는 모습과 결과를 바란다. 성의 있는 자세를 원한다. 가령 민원인은 기다리고 있는데 공무원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지루한 모습을 보인다면 불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길게 느껴진다. 때로는 별것 아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시대는 공무원의 의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공무원법과는 별도로 공무원으로서 지향하는 선언이고 추구하는 규범으로 ‘공무원 헌장’이 있다. 1980년 처음 제정된 ‘공무원 윤리헌장’은 공무원들은 암송해야 했다. ‘이 생명은 오직 나라를 위하여 있고, 이 몸은 영원히 겨레 위해 봉사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헌장은 ‘충성과 성실은 삶의 보람이요 공명과 정대는 우리의 길이다’라고 이어졌다. 마치 비장한 지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2016년에 ‘윤리’가 빠지고 ‘공무원 헌장’으로 개정되었다. 새 헌장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며 ‘창의성’, ‘전문성’, ‘다양성’ 등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고쳤다.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바뀐 것이다. 아울러 사생활 보장과 비효율적인 근무 문화를 개선하려는 제도적 조치도 마련되고 있다. 최근 부산 동래구의회는 근무 시간 이후에는 급하지 않은 업무 연락을 금지하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자연 재난이나 사회적 재난, 당직, 비상근무와 특별한 행사 때 사전 협의로 조율된 경우는 예외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고 근로와 사생활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규정이 마련되는 등 근무 환경에 제도적 변화가 일고 있다. 다만 이러한 추세가 공무원으로서의 본분을 흐리거나 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작가는 이번 해킹 사건으로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왜 힘들어야 하나’하는 의문을 품었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은 국민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든든한 버팀목이요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국민과 공무원 서로의 인식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며 공유되어야 할 것인가? 공무원은 언제나 보초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국민이 공무원을 보는 눈은 ‘할 일 없는 보초’로 인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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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효 이야기
    5월은 가정의 달이고 5일 어린이날에 이어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새삼 효를 생각합니다. 효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은 십계명 중 인간이 지킬 첫 번째 계명을 부모 공경으로 꼽으셨습니다. 인간의 근본이 바로 효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효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효도의 종말을 고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역대 최고의 불효 시대라는 글도 보았습니다. 한때는 아파트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 시골 부모님이 찾아오기 어렵게 한다는 말도 있었고 부모를 요양원에 버리고 갔다는 기사도 가끔 봅니다. 오죽하면 불효자에 맞설 ‘불효자 방지법’까지 법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촛불처럼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서산이 낳은 지게 효자로 널리 알려진 이군익 박사입니다. 이군익 박사를 알게 된 건 필자가 서산시인회 회장을 맡고부터입니다. 물론 그의 효행은 일찍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92세 아버지를 지게에 태워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이야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알려졌습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효가 사라진 중국에 경종을 울렸다’라는 기사와 함께 한중삼국문화교류회에 초청받아 한국의 효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박사의 효 이야기는 매년 어버이 주간만 되면 늘 회자(膾炙)합니다. 필자도 어버이 주간 설교를 준비하다 이군익 박사가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더구나 지난 5월 8일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열린 제53회 어버이날 기념식에서 2025년 효행 실천 부문 대통령 표창을 받은 된 걸 축하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야기 좀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좀처럼 말을 아꼈습니다. 그저 묻는 말만 짧게 대답하며 자식으로 응당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을 받게 된 뒷이야기라도 해달라 사정했더니 짧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효도를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한 가지 공통된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이군익 박사도 같았습니다. 대화 내내 겸손함이 몸에 밴 듯했습니다. 메일에도 그런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글 끝에 “이번 대통령 표창의 영광은 제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그 뜻을 함께 나누는 모든 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멀리서나마 고향 어른들의 응원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도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제 고향 서산에서 팔봉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모든 분의 가정마다 언제나 건강과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조 한 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효의 나라 대한민국 동방의 불꽃이요/삼천리 금수강산 효자 효부 넘치는데/ 과분한 대통령상에 몸 가릴 곳 없어라’ 아흔을 넘기신 아버지는 아들의 등짝에 난 피멍을 보시고 다음 날 지게를 타지 않으시겠다고 고집하는 글을 읽고 울컥했습니다. 아무리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아름답다고 한들 자식 사랑만큼 크겠습니까? 물 위에 둥둥 떠다니던 우렁이 껍데기를 보고 울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이 못난 지식을 위해 우렁이처럼 속 다 빼주시던 부모님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자십회(朱子十悔) 중에 으뜸은 부모 돌아가신 후 후회라지요. 가물치는 새끼를 수천 마리를 낳고 난 뒤에는 기력이 쇠하여 눈이 먼다고 했습니다. 먹이 사냥이 어려워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데 이때 부화 된 어린 가물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어미 입속으로 들어가 먹이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미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그런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는데 가물치만도 못한 죄가 큽니다. 효자 지게는 대전 뿌리 공원 앞에 있는 한국 효문화진흥원의 제5전시실 효 나눔 실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한노인회 서산지회장이신 우종재 회장님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뒤늦게 알고 축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노인복지와 효행 실천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지요. 서산의 겹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효의 고장. 내 고장 서산이 자랑스럽습니다. 요즘 화제의 영화 ‘효자’를 보고 나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 부모님께 어떤 마음을 전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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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영월을 찾아서 –1-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가 강원도 영월이었습니다. 영월엔 비운의 주인공 단종과 김삿갓 두 분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읽으며 영월에 가고 싶었고, 김삿갓 방랑기를 읽으며 영월을 생각했습니다. 마침 한국문인협회 서산시지부에서 문학기행 장소가 영월로 결정되었을 때 소리를 지를 만큼 기뻤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4월 19일. 일어나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들고 나오며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땅을 찾아가는데 어찌 하늘도 무심할까 싶었습니다. 7시 정각, 관광버스는 문인협회 회원 24명을 태우고 영월 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차창을 때립니다.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이내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운의 단종을 생각하고 술과 글을 벗 삼아 살다 간 방랑시인 김삿갓을 생각했습니다. 슬픔의 유적지 영월. 이들을 품은 영월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습니다. 상념에 잠겼다가 차창을 바라보니 빗방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산 휴게소에 오니 햇살마저 비쳤습니다. 3시간 반 정도 달려 드디어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한 암벽이 있어 마치 육지의 섬 같은 곳입니다. 배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천연 감옥이었습니다. 세조는 어떻게 이런 곳을 발견해 단종의 유배지로 삼았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어소(御所)에서 해설사를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소나무, 바위, 초가집, 비석 등등 심지어는 샛길까지 각각의 서사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소나무 길을 걸으며 청령포에 얽힌 세 사람의 주인공들을 생각했습니다. 단종. 그는 조선 6대 임금입니다. 아주 짧은 동안(1441~1457년) 살다 간 비운의 왕입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자라서 왕이 되었습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 소헌왕후도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이 자란 단종은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더구나 아버지 문종마저도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 그는 숙부 세조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이곳 영월 땅 청령포에서 외롭게 살다가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까요? 부부의 연을 맺은 정순왕후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요? 해 질 무렵 ‘노산대’라는 바위에 걸터앉아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의 생이 그토록 비극적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조를 생각해 봅니다. 권력이 무엇일까요? 그는 수많은 충신을 죽이고 심지어는 피를 나눈 형제들까지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나름대로 왕위 찬탈의 명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명분도 추악한 권력 쟁취의 역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천하의 권력을 쥐었다 할지라도 어린 조카를 폐위하고 머나먼 영월 땅으로 유배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사약을 내려 죽게 했으니 어떻게 마음이 편했을까요? 형님 문종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은 없었을까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말없이 눈물 흘리는 꿈을 꾸었다 하니 마음이 편했을까요? 더구나 그 많은 충신의 원혼인들 그를 편하게 놔뒀을까요? 결국 그는 피부병과 각종 병마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 엄흥도를 생각합니다. 그는 강원도 호장(戶長)이었습니다. 세조의 명으로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어명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강을 건너와 단종의 말동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을 때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속에도 엄흥도는“爲善被禍 吾所甘心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는 말을 남긴 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씨들의 선산에 모시고 나서 모든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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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PR과 자랑
    옛날에는 자기 자랑을 매우 부끄러워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자랑하는 것조차 덕스럽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누라와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자기 PR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도를 넘어 자기 자랑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팔불출이라 여기는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은 대를 이어 손자까지 자랑합니다. 엊그제 차를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가 이웃 테이블에서 오십 대 주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억지로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며 자기 자식들을 자랑했습니다. 어느 분은 스마트 폰을 꺼내어 손녀가 재롱 떠는 동영상을 일행들에게 보여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단체 카톡방에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자랑하는 글을 자주 봅니다. 자기 글이 어디에 실렸다느니, 자기 시화가 어디에 걸렸다느니 하는 등 모임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까지 올려놓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회 있을 적마다 자기 업적을 자랑합니다. 모든 걸 자기가 다 했다고 합니다. 물론 자랑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랑이 자존감을 높이고 타인으로 동기 부여의 계기가 된다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달라서 부담감이나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그걸 자제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요, 자존감이라 생각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자기 자랑의 심리 상태는 열등감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나를 인정해달라는 욕구, 우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꽉 차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깡통이 아예 비었든지, 아니면 꽉 채워졌다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무언가 조금 들었을 때 제일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제일 부잣집은 양조장집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잣집인데도 양조장 댁은 늘 수수한 옷차림이었습니다. 남들 다하고 다니는 액세서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그녀를 무시하거나 낮춰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에 농협의 모 지점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예금유치가 지점장 근무 평가의 절대적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고액 예금주는 책임자의 중점 관리 대상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몇 천만 원을 예금한 분은 사무실에 들어오면서부터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가끔 지점장에게 노골적으로 술 접대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몇 억 원을 예금하신 분은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왔다 가셨습니다. 물론, 사무실이 좁은 관계로 창구를 피해 지점장실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거래가 끝나면 아무 티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나갔습니다. 잠언에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영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의 신앙 칼럼에서 영국인과 한국인과의 모습을 비교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은 겉으로 울고 영국인은 속으로 운다고 했습니다. 기뻐할 일이 있으면 영국인은 겉으로 축하해주고 한국인은 속으로 축하한다고 했습니다. 영국 여성들은 화장을 잘 하지 않아서 얼굴에 주근깨가 그대로 보이는데 한국인은 화장하지 않은 본 얼굴을 대하게 되면 새로운 신자가 온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영국은 오랜 기독교 문화 속에 살아왔기에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시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정보화 시대요, PR 시대를 살면서 남에게 알리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서울 어느 거리에서 ‘이 편한 치과’ ‘속 편한 내과’란 간판이 있다고 합니다. 재치 있는 이름이므로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근사한 간판을 걸었다고 해도 의사의 실력이 못 미친다면 고객은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지나친 자기 자랑으로 타인의 마음에 불편함을 주지는 말아야 겠습니다. <gigic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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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나에게 맞는 전립선치료는 무엇일까?
    전립선은 정액의 30% 가량을 생성하는 생식기관으로, 방광 출구의 요도를 감싸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전립선의 크기가 커지는데, 그로 인해 남성은 점차 소변으로 인한 여러가지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소변이 잘 안나오거나 자주 마렵고, 자다가도 소변 때문에 깨는 일이 발생합니다.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점차 증상이 심해지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립선에 관련된 각종 영양제, 치료제, 수술이나 시술에 대한 광고입니다. 최근에는 비뇨의학과 의사들이 직접 제작한 기사나 영상물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일반인 입장에선 홍보 목적인지, 정보 전달 목적인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전립선에 대한 약물치료, 수술(홀렙수술), 시술(리줌)에 대한 개념과 장단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① 약물치료 진료실에서 만나는 전립선비대증 환자는 실제 일상생활에서 소변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오는 사람들이고, 그 중 70 ~ 80%정도는 투약만으로 증상이 상당히 호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약물은 약효가 있는 기간 동안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투약을 중단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② 수술(홀렙수술) 현존하는 수술적 치료 중 홀렙수술은 거의 모든 전립선 크기에서 시행할 수 있고, 적절한 시기에 수술한다면 전립선 관련 투약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효과가 우수합니다. 다만, 홀렙수술은 역행성 사정(방광 내로 사정이 되어, 요도로 정액이 나오지 않음), 발기부전의 가능성이 있어, 모든 연령에 적용하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취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환자가 마취하기 어려운 상태라면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전립선을 절제하는 방식의 수술(홀렙, TURP, 워터젯)은 모두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립선수술의 후유증이나 마취 부담 때문에 비침습적인 치료 방법(유로리프트, KTP, HPS등)이 그동안 여러가지가 개발되었는데, 대부분 5년 이상 추적 연구에서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재발하여 추가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 것이 단점입니다. ③ 시술(리줌, Rezum) 하지만 최근 리줌(Rezum)에 대한 5년 추적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장기적으로도 낮은 재발률(5%), 낮은 성기능 관련 합병증(2%)를 발표하여 주목받고 있습니다. 요도로 기구를 삽입하여 전립선에 증기를 쏘는 방식이며, 전립선조직이 3개월에 걸쳐 퇴화되면서 요도의 압박이 풀리는 원리입니다. 시술 시간은 10~20분 내외 소요되며, 기존 전립선수술에 비해 마취 선택의 폭이 넓어 상대적으로 고령에게도 시행이 가능하며, 성기능 관련 합병증도 거의 나타나지 않아, 젊은 환자에게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전립선의 형태나 크기에 따라 리줌을 시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합니다. 또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홀렙수술에 비해 많은 비용이 필요합니다. 개개인의 전립선의 형태와 크기는 모두 조금씩 다르며, 비슷한 전립선을 가졌다고 해도 환자의 여건에 따라 다른 치료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전립선비대증 치료 방법에 따라 노년기의 삶의 질에 많은 차이가 발생합니다. 가능하다면 약물, 시술, 수술을 모두 시행할 수 있는 병원, 전문의에게 적절한 상담을 받는 것이 최적의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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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서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그 후
    지난주 산악회 회원들이 강릉으로 등산 겸 봄나들이를 떠났다. 주문진 수산시장에 들르는 일정도 있었다. 필자도 같이 가기로 했지만, 갑자기 일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일행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문진 「서산건어물상회」에 들렸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주차한 곳에서 좀 떨어졌는데도 일행 열다섯 명은 일부러 찾아가서 이것저것 샀다는 것이었다. 사장에게 ‘필자 이야기를 하며 찾아왔다’고 하니 얼른 알아보며 가격을 깎아주고 덤도 주더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주문진에 갔을 때 기사는 버스를 수산시장 주차장에 세우고 물건을 사는 시간을 주었다. 필자는 동행한 10여 명을 서산건어물상회로 가자며 앞장서 이끌었다. 고향의 아는 사람이라며 이왕이면 거기로 가자고 권했었다. 6년 만에 찾았지만, 필자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일행에게 전통차를 내주고 특별히 대해주었다. 박 사장은 종종 서산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면서 팔봉 승마장 회원들도 다녀갔다고 했다. 쉽게 오가며 만날 수 있는 시대라 하더라도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서 느끼는 감정은 남다른 것이다. 당시 일행들은 흡족함을 마음에 담고 돌아왔다. 필자는 올해 나들이에는 동행하지 못했지만, 일행들은 지난해 박 사장으로부터 받은 좋은 인상을 가졌기에 또 갔던 것이었다. 물건을 골라주고 덤에 후하더라고 했다. 버스 안에서 군것질하라고 쥐 포 두 박스를 들려주는 인심도 보여주었다니 박 사장이 고마웠다. 굳이 찾아간 회원들도 고마웠다. 박 사장에게 전화하여 정담을 나누었다. 서산건어물상회와 인연은 7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 간다. 설악산 등산을 마치고 일행을 태운 버스가 주문진 수산시장 거리를 지날 때 창밖으로 ‘서산건어물’이라는 상호가 보였다. 버스는 얼마를 더 가서 어느 건어물 가게 앞에 세웠다. 기사는 ‘잘 아는 가게’라며 이왕이면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필자는 반가운 이름 ‘서산’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빠듯한 시간을 셈하며 잰걸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무더위에다 서두름까지 더한 걸음은 온몸에서 땀을 솟아나게 했다. “상호가 서산이라서 찾아왔다”라며 눈에 띄는 대로 몇 가지를 들고 가격을 묻자, 가격표에서 얼마를 뚝 접어주고 명란젓 한 병을 안겨주었다. 한 고향이라는 공통분모의 정이 느껴졌다. 늦을세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니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었다. 당시 <서산타임즈>에 ‘서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라는 제목으로 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지난해 다시 찾았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 태어난 고향에서 자라고 일하며 일생을 마쳤다. 평생 100리 밖을 나가본 사람은 20%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도시로 나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친척이나 후배를 부르기도 했다. 향학열이 높아지고 직장을 찾아 도시로 나가고 객지로 떠났다. 그곳에서는 고향 사람끼리 모여 향우회를 만들고 수시로 만나면서 끈끈한 정을 쌓았다. 고향 소식을 나누고 향수를 달랬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계의 문화’가 엷어졌다. 향우회, 동문회, 종친회가 예전에 비하여 점점 시들해졌다. 서로 의지하려 하지 않고 고향이나 고향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적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주의가 늘어나는 원인도 있다. 홀로 지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향심의 유전자는 남아있다. 일제 치하에서 가수 백년설은 눈(雪)을 바라보며 ‘고향 설’ 노랫말을 썼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에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짠하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오/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소매에 떨어지는 눈도 고향 눈// 눈 위에 부서지는 꿈도 고향 꿈/ 길 위에 흩어지는 꿈도 고향 꿈/ 인정은 서툴러도 눈은 정다워/ 고향을 그려보니 고향을 만져보니/ 가슴 쓰리다.” 필자가 서산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서산읍 인구는 2만 8천명쯤이었다. 설령 인사는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라 하더라도 안면이 있었다. 대부분 서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학교에 다녔던 연유였다. 서로 친분을 맺고 교유하며 지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세거민보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굳이 고향 사람, 타향 사람을 가리고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도 아니다. ‘서산건어물상회’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외지에 나갔을 때 고향 사람을 만나면 더 반가워하고 힘껏 도우며 지냈으면 하는 것이다. 객지에서 나름 터전을 잡을 때까지의 노고를 인정하고 애향심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출향인들도 서산건어물 박 사장처럼 고향 사람을 만나면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다른 하나는 외지에서 서산으로 와서 기반을 닦은 분들은 고향 사람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줌으로써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면 좋을 것이다. 인연을 확대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진항의 서산건어물상회에서 떠올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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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용서의 힘
    꿈꾸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실이었던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배다른 형들은 그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년은 곧잘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은 ‘꿈쟁이’라고 하며 더욱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가 17세 되는 해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들에 나가 가축을 돌보는 아들들과 가축의 안부가 궁금해서 소년에게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그를 발견한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궁리했습니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마른 웅덩이에 넣었지만, 이도 못 할 짓 같아 노예상에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돌아가 소년이 입던 옷을 보여주었습니다. 짐승의 피를 묻힌 옷을 본 아버지는 짐승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슬퍼했습니다. 노예상은 그 소년을 왕의 경호실장 집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하는 일마다 형통했습니다. 마음에 든 주인은 그를 집안일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관리하는 가장 가까운 종으로 삼았습니다. 마님은 청년에게 자꾸 눈길을 주더니 하루는 그를 자기 침실로 가자고 유혹했습니다. 마님은 청년의 옷을 붙잡고 잠자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옷도 버린 채 그녀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이를 분히 여긴 그녀는 남편에게 청년이 자기를 덮치려 했다고 모함했습니다. 경호실장은 청년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 신하 둘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술 맡은 관리였고 하나는 음식을 맡는 사람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리가 꿈을 꾸었습니다. 포도나무가 세 가지가 있는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 꿈이었습니다. 청년은 그가 사흘 후에 복직할 거라고 해몽했습니다. 실제로 관리는 사흘 후 복직하여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청년을 잊어버렸습니다. 2년 후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매우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강가에서 올라와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피골이 상접한 암소 일곱 마리가 토실토실 살진 일곱 마리 암소를 잡아먹는 꿈이었습니다. 통통하게 잘 익은 이삭 일곱 개를 쭉정이 이삭 일곱 개가 먹어 치우는 꿈도 꾸었습니다. 답답한 왕은 꿈을 해몽하는 신하를 찾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마침 술 맡은 관리가 해몽을 잘하던 청년이 생각나서 왕께 아뢰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 꿈을 해몽하게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그는 왕에게 두 가지 꿈은 같은 뜻이라며 일곱 해 동안 풍년이 들 것이고 이어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 것이니 슬기로운 사람을 뽑아 잘 대처하라 조언했습니다. 이에 왕은 그를 총리로 삼아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혀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나라에서 두 번째 높은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기독교인이라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란 걸 아실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7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년이 들자 나라 성읍 곳곳에 차곡차곡 곡식을 보관했습니다. 곧이어 말할 수 없는 흉년이 7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애굽뿐만 아니라 중동 곳곳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가고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된 이복동생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가 두려워 목숨을 구걸하자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의 용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용서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승리다’라는 영국 속담처럼 용서는 어쩌면 가장 큰 복수일지도 모릅니다. 고난주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은 아담이 지은 원죄로부터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희생이셨습니다. 용서합시다.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일도 당할 수 있고 평생 잊지 못할 상처받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는 건 마음에 칼을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시시때때로 칼은 날을 세워 마음을 후벼놓습니다. 그때마다 아파하며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용서는 마음에 들어 있는 칼날을 빼버리는 일입니다. 용서는 바로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미움과 상처를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수가 아닐까요? 고난주간, 용서의 참 의미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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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관심이 세상을 바꾼다
    봄이 왔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봄의 한가운데를 장식하는 건 벚꽃이라 하겠습니다. 아주 짧은 동안 와르르 하얀 웃음으로 세상을 물들였다가 미련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벚꽃.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칠세라 벚꽃을 찾아 나섭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벚꽃 군락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곳은 단연 삼화목장(지금의 서산 한우목장)이었습니다. 벚꽃이 피면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가 아름다운 벚꽃 향기에 취해 봄을 즐겼습니다. <서산소식> 3월호 운산 한우목장 웰빙산책로 표지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서산 한우목장 웰빙산책로는 이미 지난해 12월 19일 준공식이 있었습니다. 길가의 벚꽃 몽우리가 금방 터질 듯합니다. 한우목장 웰빙산책로가 떠올랐습니다. 막상 벚꽃이 만개 될 때쯤이라면 인파에 몰려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운산 시내에서 해미면 방향으로 초록마을을 지나 문수사를 거쳐 4km 정도 가니 한우개량사업소가 나오고 거성1리에 가축병원/유전체은행 건물 옆에 바로 웰빙산책로 덱(deck)이 나타났습니다. 월요일 오후 3시인데도 대형 버스 2대와 50여 대의 승용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덱 길에 들어섰습니다. 초입에 양산이 준비되어 필요한 사람은 사용하게 하는 배려도 있었습니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어디서 오셨는지 물으니 서울, 인천, 수원 등 외지 분들도 꽤 많았습니다. 대부분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셨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를 보고 해미읍성을 찾아가다 산책로를 보고 들어왔다고도 했습니다. 지역에 사시는 분을 만나 들어보니 엊그제 날씨가 좋지 못했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정말로 서산 한우목장 웰빙산책로가 완전한 서산의 자랑거리가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벤치가 있어 쉬어가게도 했고 덱 반쪽은 계단식으로 나머지는 평지처럼 만들어 노약자나 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상에는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바라보니 눈만 좋으면 세상 끝까지 볼 수 있을 듯 사방이 탁 트였습니다. 어느 산 정상에 올라도 이보다 더 멀리 그리고 많이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덱 길을 걷다 보니 마치 평지를 걷는 듯했습니다. 바로 눈 아래에 아기자기한 풀꽃들이 방싯거리고 가녀린 풀잎이 나풀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걸으면서 이렇게 좋은 웰빙산책로를 만들어 준 관계자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최초에 이 광활한 푸른 초원에 산책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는 동조자를 모았고 뜻을 함께한 사람들은 면사무소나 시청으로 달려가 산책로를 만들어 달라고 청원했을 겁니다. 관청에 계신 누군가는 이를 좋게 받아들여 중앙에 건의하고 관계 기관과 협의하여 오늘의 훌륭한 이 웰빙산책로가 만들어졌습니다. 필자 같은 사람은 그 누군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관심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관심이 오늘의 이 훌륭한 산책로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산책로가 완공되기까지 물경 십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추진상황을 읽어 보니 20여 가지 굵직한 추진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애로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를 필자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운산한우목장(농협중앙회한우개량사업소)은 우수한 씨수소를 선발하여 우량 정액을 생산 및 공급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 막중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목장에 방역 문제는 가장 큰 난제였을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내고 이런 훌륭한 산책로가 만들어졌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이를 추진한 이완섭 시장님의 뒷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애초에 설계의 덱 높이 1.5m를 50cm로 낮추고 철제 난간을 로프로 교체하였으며 지그재그로 된 덱 길을 유선형으로 바꾸어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10억 원의 예산 절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런 보람으로 이렇게 좋은 자연 친화적 산책로가 탄생하였습니다.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관심이 세상을 바꾼 사례’가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서산 한우목장에는 흰 눈 같은 벚꽃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누런 풀밭이 온통 초록색으로 변신하면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푸른 바다 한가운데 서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2.1km의 초록 파도가 출렁거리는 목장길. 마치 꿈속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이제 이곳은 마애여래삼존상으로, 개심사로, 해미성지로, 서산동부시장으로, 간월도로 이어지는 관광 띠의 한 축이 될 것입니다. 관심이 세상을 바꿉니다. 관심을 기울일 때 세상은 좋아집니다. 필경 서산 한우목장길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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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8
  • 서산~영덕 고속도로의 종점, ‘영덕’을 위로하자
    솟구치는 불기둥, 널름거리는 불길이 긴 띠를 이루며 산등성이를 휘감아 달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마치 미국, 캐나다, 호주 대륙에서 며칠씩 타오르던 산불을 우리나라에서 보는가 싶었다. 기나긴 대피 행렬, 화염과 연기를 뚫고 달리는 자동차는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분명 우리나라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이었다. 지난 3월 21일부터 시작되어 열흘 동안 꺼질 줄 모르던 산불은 축구장 6만 7천여 개의 면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영남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영향 구역은 4만 8천여㏊에 달한다. 서울시 면적의 80%에 이르는 넓이이다. 이번 산불로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부상을 입는 등 7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기동이 어려운 노인들의 피해가 컸다. 환갑이 넘은 민간 진화대원들이 장비도 못 갖춘 채 산불 현장에 투입됐다 숨진 비극도 있었다. 헬기 조종사가 헬기를 몰고 출동하다 추락해 숨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아직 정확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시설 피해도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대본 잠정 집계로 건물 총 6,192개소가 피해를 보았다. 경북 지역에서만 주택 3,265채가 전소됐다. 문화재 피해도 컸다. 천년고찰인 의성 고운사의 보물 연수전과 가운루가 불탔다. 국가유산청에서는 30건의 문화재가 피해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었고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 밭과 비닐하우스가 탔고 농기계도 화마를 견디지 못했다. 소, 돼지, 닭 등 가축도 잃었다. 공장이나 운동시설도 잿더미로 변했다. 산불 형태와 규모는 점점 변하고 있다. 앞으로 더 자주 일어나고 더 크게 번질 것이다. 한반도의 봄이 고온·건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산불도 산이 높은데다 강한 바람, 건조한 공기, 높은 기온 등 악조건 탓에 더 크게 번졌다. 경북 의성 산불이 안동을 거쳐 영덕으로 확산하는 데 고작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번지는 불은 인력과 장비만으로는 끄기 어렵다. 앞으로 산불은 이전과 달리 많은 피해를 낼 수 있다. 국토의 6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이상기후까지 겹치며 거의 해마다 큰 산불이 난다. 2017년 강릉‧삼척 산불은 4일간 1천여ha를, 2022년 울진‧삼척 산불은 213시간 동안 1만 6천여 ha를 태웠다. 꼭 2년 전인 4월 2일 같은 날 홍성과 금산 대전 등 충청 지방에서도 대형 산불이 나서 사흘째 되어서야 껐다. 홍성에서 발생한 산불은 피해 면적이 1천 3백여 ha에 이르렀다. 금산에서 일어난 산불이 대전까지 번져 이틀 넘게 9백 ha를 태웠다. 산불은 그 자체로도 큰 피해를 주지만 민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오래전 가야산에서 해마다 산불이 일어나 별별 소문이 돌았고 원인을 찾고 예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산불 발생 원인은 입산자나 성묘객 실화가 34%로 가장 많고 논밭 두렁 태우기와 쓰레기 소각이 24%, 담뱃불 실화 7%, 건축물 화재 6%, 불장난 등 기타 29%로 나타났다. 이번 영남 지역 참화는 라이터를 켠 성묘객, 예초기 불티를 방치한 작업자 등 기본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데 도대체 그들의 의식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조심만 하면 예방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행정과 소방 당국에서 깃발을 꽂고 방송하고 산림 감시원을 배치하여 예방과 계도 활동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주의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애써 가꾼 숲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이를 회복하려면 최소 20년에서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옛날에는 솔가지 하나만 꺾어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농촌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산림간수였다. 그런 엄중한 단속과 함께 대대적 나무 심기, 연료전환으로 지금의 푸른 산, 울창한 숲을 가꿀 수 있었다. 산불 발생과 진화 상황 보도에「서산 영덕고속도로」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비록 재난 상황이지만 ‘서산’이라는 말에 눈, 귀가 쏠렸다. 서해안 서산에서 동해안인 경북 영덕까지 고속도로로 연결된 것이다. 대게로 유명한 바로 그 영덕이다. 도로는 단순히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게 하는 시설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오가게 하고 생각을 소통하며 문명을 전파하고 공유하게 한다. 도로는 사람으로 치면 혈맥과도 같다. 서산 영덕고속도로는 우리나라 허리를 가로질러 서해와 동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다. 도로라는 매개체로 동서가 연결되는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교통량이 늘어날수록 ‘서산 영덕’소리를 자주 듣게 될 것이다.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더라도 도로이름을 함께 쓰는 관계다. 친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처럼 위로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면 싶다. 서해안 기름유출사고를 당했을 때 서산에도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고마움을 이번에 갚았으면 한다. 모든 피해지역에 지원의 손길을 펼쳐야 하는데, 고속도로 명칭에 함께 이름이 들어간 영덕을 자매결연 맺은 듯 여기고 위로한다면 더욱 뜻이 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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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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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멍 뚫린 내 가슴에/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사랑 노래 보낸다』 한때 온 국민이 즐겨 부르던 어니언스의 ‘편지’란 노래 가사입니다. 필자도 가슴 절절한 느낌으로 자주 불렀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아 쓴 편지를 받아보고 느끼는 감동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 수많은 메시지와 메일을 주고받는다 해도 결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전화조차하기 힘들었던 시절,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간의 소통의 수단은 오직 편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는 생활의 한 축이었고 일부분이었습니다. 편지 한 통에 울고 웃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필자가 군에 입대했을 때 입던 옷과 편지를 받고는 사흘 동안이나 눈물 지으셨다고 합니다. 우리 내외도 아들이 군대에서 보내준 옷과 편지를 받고는 어머니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어쩌면 건강하고 활기찬 아들의 전화나 메시지를 보고는 편지처럼 그토록 애틋한 느낌이 없을 듯합니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는 디지털 매개가 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담은 진심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지난해 예총 회원들에게 보내온 이완섭 시장님의 친필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21회 해미읍성 축제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감사 편지였습니다. 글씨도 명필이거니와 편지 속에 담겨있는 진실한 마음이 느껴져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만일 워드로 친 우편물이었다면 하나의 문서 같아서 진즉 버렸을 겁니다. 편지는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됩니다. 가끔 아이들이 내게 보낸 편지를 꺼내어 보고 추억에 잠깁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보낸 편지도 아이들이 간직하고 있을까 속으로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지고 있을 테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때를 회상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릴 수 있는 건 편지밖에 없을 듯합니다.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정성스럽게 쓴 편지는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이 담겨있어 서로의 유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소위 펜팔이란 이름으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부부의 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이제 편지는 한물간 추억의 유물처럼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앞에 있는 듯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손 안에 든 스마트폰 하나면 무슨 의사전달이든 가능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편지가 주는 감동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가끔 꺼내어 보고 행복에 젖을 수 있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2025년 서산시가족센터 주최 부부의 날 기념행사 ‘부부동락 페스티벌’의 하나로 ‘부부 사랑 편지 공모전’이 공지되었습니다. 공모주제는 남편 또는 아내에게 사랑을 전하는 편지로 손 편지(3장 이내) 한글 문서 (A4 2장 분량 이내)로 접수 기간은 2025년 3월 10일부터 4월 20일까지며 접수 방법은 방문이나 이메일 접수며 수상자 발표는 2025년 5월 15일이라 합니다. 우수상 수상자에게는 20만 원 상당의 호텔 숙박권이 주어지며 편지 공모자 부부 100쌍을 선정하여 행사에 초대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부부란 이름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사랑만 할 수 있었던가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었던가요? 때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 때가 있었고, 한없이 미안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에 옹이 졌던 침묵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올해 부부의 날,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진솔한 손 편지를 한번 써보심은 어떨까요? 그리고 한번 응모해보세요. 분명 한 장의 종이가 아닌 특별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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