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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팔봉산
- 멀리서 달려오는 봄 아가씨의 숨 가쁜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겨울 끝자락이라 그런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산행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 갑자기 팔봉산이 생각났습니다. 문득 며칠 전 재경서산산악회의 팔봉산 산행 광고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아 있었습니다. 지지난해 산수(傘壽)를 기념하여 덕숭산을 올랐었습니다. 정상에 올라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젊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산도 이제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양길리 주차장에는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습니다. 꽃이라도 핀 듯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의 등산객들이 팔봉산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11시였습니다. 여러 사람 속에 끼어 1봉에 올랐습니다. 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표지석에 해발 210m라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1봉과 2봉 사이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2봉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벌써 내려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끼리는 그저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올라갈 땐 어려웠는데 내려올 땐 날아갈 것 같다”라는 어느 자매의 말을 들으며 인생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봉까지 꼭 올라가야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습니다. 내가 낀 목장갑을 보며 ‘위험하니 벗고 가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제2봉에 올랐습니다. 해발 270m입니다. 구도와 대산 앞바다까지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통천문이라고 한다는데 좁은 바위 틈새를 통과해야 합니다. ‘머리 조심’이란 문구를 보았는데도 이마를 부딪쳤습니다. 조금 얼얼했지만 혼자 웃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없네. 봉우리마다 기암괴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2봉을 가리켜 감투봉 또는 노적봉이라고 했습니다. 높은 벼슬에 오른 대감과 같다고 하고 노적을 쌓아 놓은 듯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3봉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서서히 힘에 부칩니다. 그래도 꾸준히 걸었습니다. 고지에 올라 시계를 보니 11시 55분입니다. 코끼리 형상을 닮은 코끼리 바위가 반깁니다. 자세히 보면 남자 코끼리, 뒤에는 여자 코끼리가 보인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는 남자 코끼리만 보였습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그 말도 맞는 듯합니다. 해발 361.5m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3봉이 팔봉산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깨 봉도 보였습니다. 힘센 용사의 어깨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참으로 일색입니다. 절경입니다. 산마다 모두 특색이 있지만, 3봉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은 그저 3봉까지만 올라왔다 갔습니다. 이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제4봉을 향해 걸었습니다. 4봉을 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이지만 의지할 보조물이 없어 다소 힘들었습니다. 3봉까지는 난간이나 밧줄이 있었습니다. 4봉으로 가는 길엔 보조물은 없고 다만 ‘낭떠러지 주의’란 팻말만 곳곳에 걸려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급경사였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4봉에 올랐습니다. 해발 330m입니다. 대여섯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5분이었습니다. 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배도 고팠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방법이 없습니다. 준비 없이 하는 전쟁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고 심호흡하며 무사히 8봉까지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제5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 어디로 갔는지 주위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5봉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12시 55분입니다. 표지석에는 해발 290m라 쓰여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젊은 부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준 초콜릿 하나가 꿀맛 같았습니다. 새로운 힘이 솟았습니다. 그들을 따라 제6봉으로 향했습니다. 제6봉까지는 함께 걸어서인지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해발 300m. 나무에 가려 전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벌써 오후 1시 15분입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혼자 7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고용한 적막만 감돌았습니다. 문득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살아오며 함께했던 그리운 분들을 하나씩 떠 올리며 걸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7봉이 있었습니다. 해발 295m입니다. 사진을 찍어 인증하고 다시 마지막 8봉을 향해 걸었습니다. 오후 1시 20분입니다. 마지막 8봉입니다. 오후 1시 45분.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노라니 아까 보았던 일행들이 도착했습니다. 제8봉 표지석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산하여 양길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 55분이었습니다. 팔봉산은 명산입니다. 이런 산이 우리 고장에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팔봉산은 나를 허락해주었고 나는 팔봉산을 가슴에 안고 왔습니다. 망구(望九)의 좋은 기념이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며 참 좋은 팔봉산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목사, 수필가,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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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팔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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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장이 꺼낸 과제, 도립박물관 유치
- 최근 이완섭 서산시장은 충남도립박물관 건립 지역으로는 서산이 최적지라고 강조했다. 이 시장은 “충남도립박물관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공간이 아니며, 그것은 충남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담아내고 이를 후대에 전할 핵심 문화 랜드 마크로 기능해야 한다”라며 “충남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자연적 가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중심지로, 서산이야말로 도립박물관 건립의 최적지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시장으로서 시 행정조직 안에서 인적, 물적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추진하는 차원을 넘어 언론을 통하여 당위성을 천명한 것은 나름의 의지와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민과 각 계의 관심과 호응으로 힘을 모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인 것이다. 충남도에서는 오래전 내포 지역에 도립박물관 건립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서산에서도 시장, 도의원 등이 서산에 건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충남도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추진 일정을 발표하지 않았고 따라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이런 배경을 안고 시장이 다시 제기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5년 전 <서산타임즈>에 ‘충남의 55분의 1과 내포박물관’이라는 제목으로 내포박물관은 서산에 건립해야 하는 이유를 피력했다. 필자는 당시 ‘충남에 박물관, 전시관은 모두 55곳인데 이 가운데 서산은 「버드랜드」 단 한 곳으로 전체의 5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충남에서 박물관 명칭을 쓴 곳은 25개소인데 이것으로만 한정하면 서산에는 하나도 없다. 서산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사, 문화, 전통에서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고 박물관에 전시하고 수장, 연구할 자원이 빈약하다고 할 수 없다. 서산의 시세(市勢)를 보면 인구는 도내 3위이고 면적으로는 2위인데 박물관은 한 곳도 없다니 아쉬움뿐이다.’라고 썼다. 서산에 도립박물관을 건립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박물관이 없어서라거나 시세를 내세운 것만은 아니었다. 박물관은 역사적 문화 유물을 보존, 전시하는 공간만이 아니고 지역의 역사와 뿌리, 문화를 증명하는데 서산에 그런 역사를 담아낼 공간이 없기에 이 기회에 꼭 세워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서산은 백제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화 유적과 많은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출토 유물을 서산에 보존 전시되지 못하고 다른 지역 박물관에 맡겨둔 실정이다. 충남의 중남부에는 국립 공주박물관과 부여박물관이 있고 곳곳마다 여러 형태의 박물관이 있다. 그렇다면 도립박물관은 서북부인 내포 지역에 건립하여야 함이 타당하다. 그 가운데서 내포의 중심 지역이며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서산이 최적지라는데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일이 명분이나 타당성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논리와 이유 못지않게 집념어린 도전과 끈질긴 노력이 성취의 원동력이다. 보이는 방법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힘까지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여건이 부합되고 이유가 타당하다면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할 필요가 있다. 한 예를 들어본다. KTX 오송역은 그 위치에 관하여 늘 논란이 되고 있다. 호남 방면으로 가는데 최단 노선을 고려한다면 천안에서 분기하여 공주를 거쳐 전북으로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충북은 지역 내 모든 역량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루어 냈다. 이처럼 유치 과정에서 보여준 전방위적 노력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도립박물관 건립 유치에 관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거론하고 주장했지만,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이번만큼은 시와 시민, 각 기관 단체가 합심하여 꼭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안에서 아무리 주장하고 소리쳐본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밖으로 외치고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는 아이 밥 준다.’라는 속담은 보채고 졸라야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진리다. 순리를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되겠지 하는 자세로는 이룰 수 없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군마다 후보자들은 공약으로 내세울 것이다. 지역 간 치열한 유치 경쟁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치밀한 전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타운 조성예정지에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을 갖춘 도립박물관을 세우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문화시설을 한 곳에 건립하여 시민은 물론 도민들에게 품격 있는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시장이 화두를 던진 만큼 사업에 무게를 두고 꼭 성취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시민 의견을 결집하고 총력 유치운동을 펼쳐야 한다. 기회를 잃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국립국악원 분원을 설치하고자 당시 서산시가 벌인 유치운동을 거울삼아 다시 나설 필요가 있다. 이유와 명분, 열망을 체계적으로 정립시켜야 한다. 각계가 참여하는 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범시민 서명운동이라도 벌려 서산시민의 의지와 여망을 대내외에 널리는 것도 필요하다. 관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토론회와 언론 기고, 대담방송 등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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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장이 꺼낸 과제, 도립박물관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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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감사 -2-
- 아무 통증 없이 계단을 사뿐히 올라왔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집 앞 계단을 올라오며 ‘감사합니다’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몇 달 전엔 이 계단을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올라왔습니다. 문득 이어령 선생의 ‘눈물 한 방울’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발톱 깎다가, 눈물 한 방울/ 거기 있었구나, 내 새끼발가락.’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거울을 보며 이어령 선생님처럼 내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습니다. 귀가 보였습니다. 잘 들리는 귀가 있기에 아내의 찬송도 들을 수 있고 아이들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어제 부춘산에서 보았던 귀여운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연주하며 즐기는 아코디언, 하모니카, 클라리넷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뜬쇠 공연단의 우렁찬 북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모든 걸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귀를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거울을 보고 있는 눈을 보았습니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이들 모습이 어떤지. 하늘이, 땅이, 나무가,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본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 눈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또 있을까요? 문득 헬렌 켈러의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길로 나아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흘이 아니고 평생을 눈 뜨고 훨씬 더 좋은 걸 보며 삽니다. 내 모든 것을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눈을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코는 어떤가요? 얼굴에서 코가 없다면 얼마나 흉한 모습일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얼굴의 중심에 오뚝한 콧날이 나를 나 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향기로운 냄새까지 맡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코를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입이 있어 말하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모든 걸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말 할 수 있는 입을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팔다리가 있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어느 곳도 갈 수 있습니다. 다쳐서 잠시 붕대를 감고 있을 때 얼마나 불편했던가요? 내 모든 걸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팔다리를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오늘 새벽에도 성한 팔다리를 움직여 교회로 나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악보를 보며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새벽을 깨우며 기도 하며 하루를 열었습니다. 귀가 있어 가능했고 눈이 있어 보았으며 입이 있어 설교하고 찬송하고 팔다리를 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각해보니 이 세상 어떤 것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그런데도 왜 불평불만을 하는가요? 무엇을 더 원하는가요? 왜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가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쉴 곳, 잠잘 곳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일터가 있는데, 멀쩡한 이목구비 사지가 있는데 왜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가요? 하루하루 일상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가요? 탈무드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6~70년대에 비교하면 마치 천국처럼 사는데 자살률은 왜 그리 높은지요? 아침에 일어나고 하늘을 보며 직장에 나가 일하고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욕심부리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염려하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모든 분께 한 분 한 분 이름을 기억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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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감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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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 왜 가?
- 톨스토이 단편집에 ‘세 은사’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볼가강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민화’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입니다. 한 주교가 ‘솔로베츠키’라는 수도원을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판에 나갔다가 우연히 한 어부의 말을 듣게 됩니다. 어부는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키며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 은사 세분이 사는데 성인들이라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주교는 선장에게 그곳에 데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선장은 주저했으나 주교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작은 배를 내주었습니다. 주교의 배가 작은 섬 가까이 다가가자 세 사람의 노인이 보였습니다. 허리춤에 포대만 두른 키 큰 노인, 등이 굽은 낡은 성직자복(聖職者服)을 입은 아주 나이 많은 노인, 중키에 작고 누추한 소작농 옷을 입은 노인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다가간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종으로 어린 양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종들이신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고, 제 능력껏 여러분을 가르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 섬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그저 자기 자신을 섬기고 부양할 따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교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묻자 “당신께서도 삼위이시고 저희도 삼인(三人)이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며 주님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은사들은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왼 종일 따라 하다가 마침내 다 외우게 되자 주교는 은사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큰 배로 돌아왔습니다. 밤이 되자 주교는 갑판 위 고물 쪽에 홀로 앉아 선한 노인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빠르게 배를 향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주교는 놀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새 배를 따라온 건 다름 아닌 은사들이었습니다. 세 은사는 주교를 보자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주교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가르쳐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은사들은 뒤돌아서서 바다 위를 날아갔습니다. 은사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동이 틀 때까지 한 줄기 빛이 빛났습니다. 필자는 한때 어느 요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요양원에 입소하려면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장기 요양의 경우 5등급 이상이면 가능하고 기타 대상자의 신체 기능, 사회생활 기능, 인지 기능 등 90여 개의 항목별 판단기준에 맞으면 가능합니다. 등급 판정은 건강보험공단의 직원 면담에 의합니다. 가끔 등급 판정에 합격하지 못해 입소를 포기한 걸 보았습니다. 입소희망자의 가정을 방문할 때 보호자가 하는 말 ‘보험공단 직원만 오면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지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보험공단 직원이 오기 전 입소 대상자 어르신에게 보호자나 함께 간 요양보호사가 신신당부했습니다. “의사가 오면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세요” 어르신은 몇 번이나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의사가 오면 어떻게 하라 구요?” “모른다고 할게” 어르신은 자신 있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건보 직원 앞에서는 모른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문까지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요?” 물론 등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인간의 본능적 존엄성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 도살을 앞둔 가축처럼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책도 신문도 자료도 없는 곳에서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각자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적행위를 한 것이고, 후에 그걸 기억하여 쓴 책이 바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라는 책입니다.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르신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세 은사’를 읽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존심뿐만 아니라 요양원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걸 아신 것입니다. 거길 왜 가? 건보 직원이 다녀간 뒤 타박하는 보호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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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 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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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가수 유지우에 뜨거운 성원을
- 여덟 살 유지우가 트로트 신동으로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사람들이 유지우를 이야기할 때 누구인지 몰랐다. 필자가 서산 출신임을 알고 있는 지인이 “유지우를 아느냐? 부춘초등학교에 다닌다는데…”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관심을 두었다. 노래 부르는 장면을 카톡으로 받아보고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선배와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니 종손(從孫)이라며 즉시 유지우의 아버지인 친조카에게 전화하여 근황을 묻기도 했다. 방송 출연 준비로 무척 바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임영웅, 이찬원, 장민호, 송가인 등 톱 가수로의 등용문이고 트로트의 중흥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TV조선 트로트 경연 미스터트롯 시즌3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가족은 물론이고 서산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정동원과 김다연, 김태연 등 어린 가수가 시선을 끌었지만 그들보다 더 어린 나이에 재능을 뽐내고 있는 지우는 더 성장하고 더 많은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한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본다. 그는 맑고 감성적인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절대음감을 타고난 지우는 정확한 음정과 흔들림 없는 고음이 탁월하다. 단순한 기교가 아닌 감성으로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부모의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네 살 때부터 가수 조항조를 좋아했다는 지우는 여섯 살 때 전국노래자랑에서 이름을 알렸다. 장난치며 놀고 동요를 부르는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유치에서 영구치로 가느라 치아 한 개가 빠지고 한 개가 흔들리고 있어 정확한 발음을 내는 것이 염려되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귀엽고 깜찍한 매력과 무대 장악력, 애교 넘치는 퍼포먼스, 여유로운 표정까지 놀라울 뿐이다. 타고난 음색과 가창력으로 팬 카페는 가입자가 늘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이미 2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방송 출연료는 상당한 액수에 이르렀고 CF와 방송광고도 기다린다는 것이다. 유지우가 제일 좋아한다는 가수 조항조는 “나보다 더 잘 부른다.”라고 했고, 장윤정은 “타고난 천재성이다. 반가성이 이미 뚫렸다”라며 극찬했다. 이찬원은 “노래에 대한 답을 유지우에게서 찾았다”라고 했으니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음악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연예 기획사 제이 보컬 대표는 유지우의 노래에 감탄하고 어린이로는 할 수 있을까 하는 눈빛, 표정과 무대 테크닉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원한다면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다. 유지우는 이미 스타로 자리 잡았고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다. 서산 출신 톱 가수로는 심수봉이 있고 비 정지훈이 있다. 유지우는 앞으로 가수로서 활동 기간을 예상한다면 아마 더 많은 인기를 끌고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을 것으로 보인다. ‘소년등과(少年登科)’라는 말이 있다. 소년으로서 과거에 급제함을 이르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성취하여 학업을 그친다면 더 이상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경계한 말이다. 물론 지우는 그러하지 않겠지만 본인의 꾸준한 노력과 가족의 뒷받침이 이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미스트롯2 경연 당시 대전 유성 출신 가수 김의영이 결선 무대에 나섰을 때 성원하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렸음을 보면서 이런 일은 본인이나 가족만이 아니라 주위의 관심과 성원도 큼을 다시 느꼈다. 김의영은 지금 대전 ‘고향 사랑 기부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이름이 알져지니 고향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호 협력관계를 보이는 것이다. 프로 골프 선수로 LPGA에서 6승을 거두며 활약하고 있는 양희영 선수가 있다. 지난해 시에서는 양 선수를 시민 대상 ‘애향 및 지역 선양 부문’ 수상 대상자로 선정, 표창했다. 부드러운 스윙을 자랑하는 골퍼로 알려진 양 선수가 메이저 대회인 2024년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는 후원사가 없어서 모자와 유니폼에 아무런 로고가 없이 출전한 모습이 아쉬웠다. 서산에서 후원하는 방안은 없었을까? 세계적인 축구 선수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이 어릴 적 고향 서산에서 축구를 계속하여 성장하고 축구 인생을 꽃피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과 아쉬움이 남아있다. 성공 후에 고향을 생각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여건을 당시에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가요계의 신동 유지우를 서산을 빛낼 인물로 크게 키웠으면 한다. 경연이 있는 날 시청자 참여로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후원회를 조직하고 팬클럽에 참여하는 등 시민적 움직임도 기대한다. 은근한 관심과 밋밋한 지지가 아닌 뜨거운 성원을 기대한다. 시민의 자랑과 정서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전 서산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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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가수 유지우에 뜨거운 성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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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2)
- 크메르 루즈를 결성한 폴포트는 192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어촌 쁘렉스어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형과 함께 프놈펜에 유학했습니다. 1947년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1953년 캄보디아에 귀국하여 1960년 공산당 분파 크메르 루즈의 창설에 기여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인 호찌민 루트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 폭격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캄보디아에 반미 감정이 높아지자, 폴포트는 크메르 루즈를 결성하여 1975년 마침내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캄보디아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는 사회 계층을 완전히 없애고 완전한 농업 중심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수도에 있던 300만 명의 국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습니다. 개인의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자, 의사, 교사, 종교인, 심지어는 안경 쓴 사람까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처형했습니다. 책도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적대 세력뿐 아니라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라며 그 가족과 어린이들까지 처형했습니다. 그 숫자는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인 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킬링필드는 크메르 루즈 정권 동안 집단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를 말하며 캄보디아 전역에 300여 개의 킬링필드가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이념이 남긴 교훈입니다. 필자가 갔던 왓트 마이는 절이며 위령탑, 화장터, 납골당, 고아원 등의 복합적 기능을 가진 사원입니다. 승려복을 걸친 어린 동자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잔혹한 고문과 학살 장면들의 그림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당시에 용케 살아남은 화가가 자신이 보고 체험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합니다. 칼로 목을 찌르는 장면, 한꺼번에 구덩이 밀어 넣는 장면, 일일이 다 그 참혹상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웃을 수 없었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공포였습니다” 킬링필드 생존자의 고백입니다. 필자의 눈에 비친 캄보디아인의 얼굴 첫인상에서 보았던 그늘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조금 더 걸어가니 당시에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과 뼈 들을 안치한 건물이 나왔습니다. 유리창으로 훤히 내다보였습니다.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그걸 보며 자란다고 생각하니 머리끝이 주뼛했습니다. 얼른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비통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는 순간, 십자가의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히틀러 같은, 폴포트 같은 인물이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배워야 합니다. 폴포트도 히틀러도 정권을 잡기 전, 민초들은 얼마나 열광하였나요.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폴포트는 겉보기에는 말투가 부드럽고, 침착했으며 말할 때 다른 사람을 꾸짖는 일이 없고, 잘 웃으며 따뜻하고 친절하며 기품이 넘치는 아주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라고 합니다. 악마는 바로 이렇게 세상을 속입니다. 악한 지도자를 선택한 국민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왔나요. 캄보디아의 명(明)과 암(暗)의 현장을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같은 돌부리에 넘어지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캄보디아 시엠립 거리에서 만난 개들이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개도 목줄을 한 개는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윤회사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개는 전생에서 가장 친했던 이웃이라 했습니다. 폴포트도 어떤 개의 모습으로 누구의 곁에서 어슬렁거릴까요? 이제는 스마트 폰만 열면 어떤 정보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보며 느끼는 감동과 현실감은 여행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필자에겐 잊지 못할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김풍배(목사, 시인, 소설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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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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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1-
- 일찍이 가수 최희준은 하숙생이란 노래를 통해서 ‘인생은 나그넷길’ 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며 산천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풍속을 만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교훈도 얻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데가 있었습니다. 바로 캄보디아였습니다. 캄보디아는 밝음(明)과 어둠(暗)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소원을 이뤘습니다. 지난 2월 7일부터 11일까지 서산시낭송회의 캄보디아 여행에 동참했습니다. 3박 5일의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캄보디아라고 하지만 겨우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 한 곳뿐입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짧은 일정이나 좁은 지역일지라도 바라던 모든 걸 볼 수 있었으니 만족한 여행이었습니다. 크메르 제국은 802년부터 1431년까지 629년 동안 캄보디아에 존재했던 제국입니다. 현재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나라입니다. 그 세력은 현재 태국 동북부와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 일부까지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크메르 왕조의 거대한 유산은 앙코르 유적과 그 일대의 유적들입니다. 당시의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에는 앙코르와트를 포함하여 바이욘, 앙코르 톰 등 여러 웅장하고 장대한 건축물들을 지었으며 모든 사원에 황금과 꽃등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크메르 제국 전성기 때는 인구가 무려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런던의 인구가 7만 명, 로마는 3만 명이었다고 하니 크메르 제국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무 위키 참조) 앙코르와트를 마주했을 때 규모의 웅장함과 섬세함은 필자가 상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놀라움과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필자의 재주로는 도저히 그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앙코르와트를 발견하여 세상에 처음 알린 프랑스 박물학자 ‘무오’가 했던 말 그대로였습니다.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록색, 건축물의 장엄함과 우아한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의 로마가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 위대하다. 세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쁘레아칸 사원, 넥뽀안, 따솜 사원, 쁘레룹, 바이욘 사원, 코끼리 테라스, 타프론 등을 숨 가쁘게 관람했습니다. 하나같이 경이롭고 화려하며 그 규모와 정교함에 눈이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하나하나 유적지를 볼 때마다 가이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 느낌을 수첩에 메모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여행기를 썼습니다. 여행이 끝나면 이번에도 그럴 작정입니다. 앙코르와트는 분명 세계 문화유산이며 캄보디아의 자랑입니다. 지금도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문화유산으로 인하여 캄보디아의 관광 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은, 앙코르와트와 함께 킬링필드였습니다. 앙코르 유적지가 분명 캄보디아 선조들의 빛이요, 후손들의 자랑이요 인류 문화유산으로 빛난다면, 킬링필드는 세계사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의 하나이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흑암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본 캄보디아 사람들의 첫인상은 밝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어둡고 무기력하며 표정은 그늘져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캄보디아 사람들은 큰소리에 잘 놀라고 선뜻 잘 나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배우기를 꺼린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시엠립 시내에서 약 1.5 Km 정도 거리에 있는 ‘왓트마이’는 킬링필드의 하나입니다. 킬링필드란 크메르 루즈 정권 동안 집단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곳엔 대학살 당시 시엠립(시엠레아프)과 유적지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왓트마이를 시엠립(시엠레아프)의 작은 킬링필드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킬링필드는 극심한 공포와 애통의 장소입니다. ‘침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입니다. 과연 크메르 루즈는 어떤 집단이며 폴 포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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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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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행복
- 더 오르고 싶어 기를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더 가지고 싶어 노심초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더 자랑하고 싶어 안달할 때도 있었습니다. 눈앞에 어른거렸고, 조금만 노력하면 손에 잡힐 듯해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오르기도 했고 잡아보기도 했고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성취감도 맛보았고 보람도 있었고 자랑거리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느낀 만족과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눈앞에 또 새로운 언덕이 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생의 오르막까지 늘 부족한 듯했고 늘 목마른 듯했으며 채워지지 않는 불만으로 살아온 듯합니다. 행복한 기억보다 고생했던 생각이,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더 큰 세월이었습니다.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행복하기 위해서, 만족하기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아니면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어쩌면 정의할 수 없는 생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이제는 내리막 생이 되었습니다. 더는 오를 길도 없고 채울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날개가 찢기고 다리가 부러졌으며 눈이 멀고 귀도 어두워졌으니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원하겠습니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권력, 재물, 명예는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고, 보이는 건 낡은 육신과 목숨 연명할만한 연금과 문득 외톨이가 된 자아가 있을 뿐입니다. 욕망과 욕심. 두 가지가 다 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전에는 욕망과 욕심을 전혀 다르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욕망(欲望)은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것, 또는 그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욕심(慾心)은 분수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바랄 욕(欲)에 마음(心)이 들어가면 욕심 욕(慾) 자가 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마음을 더하면 바로 그것이 욕심이 되고 탐심이 되고 탐욕이 됩니다. 자기만을 위한 마음이 되고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욕구야말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발전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결국 욕망의 선한 기능은 사라지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욕망과 욕심의 평형이 무너질 때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순간이 됩니다. 이기적 욕심이 선한 욕망을 누르게 될 때 균형은 무너지고 평온을 잃게 됩니다. 내리막길이 되니 참 평안합니다. 행복의 등식을 생각하면 당연히 오르막 생이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작 행복은 내리막 생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를 길이 없으니 애쓸 일도 없고 채울 것도 없으니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 없으니 초조하지 않습니다. 입을 옷이 있고 누워 잘 집이 있고 삼시 세끼 밥 먹을 수 있으니 참 평안합니다. 적은 것에 감동하고, 사소함에 행복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안합니다. 체념은 마음을 덜어놓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체념. 결국 그 체념이 행복을 몰고 왔고 평안을 안겨주었습니다. 힘과 부와 명예가 나를 떠났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참 평안(平安)이 바로 역설적 행복이 아닌가요? 반소식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증(飯蔬食飮水 曲肱而沈之 樂亦在其中)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구부려 베고서 잠을 자는 궁핍한 생활일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라 했습니다. 공자는 이 말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와 귀는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라고.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도 그러할진대 보잘것없는 필부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모든 걸 체념하여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니 참 평안과 행복이 저녁노을처럼 감싸줍니다.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 어찌 거기에 참 행복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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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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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을 바꿔라
-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다가 우연히 앞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얼굴에 있는 눈, 코, 입, 귀가 보였습니다. 문득 이목구비에 담긴 창조주의 깊은 뜻을 짐작해보았습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창조주의 오묘한 이치가 경이롭습니다. 귀와 눈은 두 개씩이지만 하는 일은 하나씩입니다. 나와 남을 위한 배려입니다. 나이가 들면 약해집니다. 코와 입은 하나지만 하는 일은 두 가지씩입니다. 생존의 조건이며 수명과 함께합니다. 귀를 보았습니다. 얼굴 좌우에 하나씩 달려있습니다. 치우치지 말고 양쪽의 소리를 들으라는 뜻일진대 한쪽 말만 듣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겁니다. 귀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열려 있는 귀를 애써 닫아놓습니다. 닫아놓고 어찌 올바로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사회라고. 눈을 보았습니다. 눈도 귀와 같이 두 개입니다. 잘 보고 잘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로는 부족하니 두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외눈박이처럼 살고 있습니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집니다. 눈은 귀와 달리 감을 수도 있고 뜰 수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 눈을 떠서 똑바로 보고 잠잘 때는 눈꺼풀을 만들어 편히 쉬게 만든 것입니다. 재충전하라는 뜻입니다. 필요할 때만 뜨고 쉴 때는 감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면 똑바로 떠서 감시하고 딱한 사정을 보면 질끈 감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보아야 할 때 보고 보지 말아야 할 때 감으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하와’가 선악과를 보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 써야 했을 겁니다. 다윗왕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지 않았더라면 간음도 살인도 없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바뀌고 성경도 바뀌었을 것입니다. 코를 봅니다. 한 개의 코에 구멍이 두 개입니다. 한 지붕 두 가족입니다. 숨도 쉬고 냄새도 맡습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통로이기에 두꺼운 살로 덮어 놓았습니다. 코는 숨만 쉬는 곳이 아닙니다. 냄새를 맡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는 그걸 알아 분별하는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똥인지 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냄새는 거짓이 없습니다. 악취와 향기를 가려냅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알라고 가르칩니다. 입을 보았습니다. 한일(一)자로 닫혀있습니다. 입을 생각하면 늘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34년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대를 이을 남자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젖을 떼고 나서부터 바로 할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 곁에서 잤습니다. 철들 무렵부터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과 계몽 편을 배웠습니다. 새벽잠이 없으셨는지 곤히 자는 손주를 깨워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누워서 잠을 참으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억하며 항상 마음에 두는 말씀은 ‘수구여병 하라’였습니다. 수구여병(守口如甁)은 입은 병마개와 같다는 뜻입니다. 꼭 필요할 때만 병마개처럼 입을 열라는 뜻입니다. 혀는 배의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게 세 치 혀입니다. 입은 음식이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으면 몸도 더러워집니다. 이목구비를 보다가 이를 조종하는 건 마음이란 걸 알았습니다. 마음은 이목구비의 컨트롤 타워입니다.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마음은 수시로 변합니다. 귀, 눈, 코, 입과 마음은 상호작용을 합니다. 마음이 이목구비를 조종할 수도 있지만, 이들에 의해 마음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집니다. 긍정적 마음을 가진 사람은 늘 밝은 면을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 사람은 언제나 어둠을 봅니다. 긍정의 힘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믿으며 문제를 해결할 힘이 됩니다. ‘희망과 긍정적 사고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고 헬렌 켈러는 말했습니다. 난국이 닥칠 때는 채널을 바꿔야 합니다. 부정을 긍정의 채널로, 절망을 희망의 채널로, 낙심을 용기의 채널로 바꿔야 합니다. 심히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합니다. 채널을 바꾸라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이번 국난이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마음으로 기도합니다./목사, 시인, 수필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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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그 의미에 관하여
- ‘인사’라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하고 폭넓게 영향을 미친다. 언뜻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연관성을 찾으면 그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의례화된 언어와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에서 구성원의 임용, 승진, 전보 등에 관한 제도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하는 인사는 안부를 묻거나 공경, 친애, 우정을 표현하는 예의이며 말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절을 중시했는데 인사는 기본적인 예절가운데 하나이다. 인사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며 자칫 소원하거나 단절되는 것을 막아 준다. 위계와 서열을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인사하는 방법은 상대와 때, 장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아침, 점심, 저녁이 다르고 만나거나 헤어질 때도 방식을 달리한다. 예전에는 문안과 경조사 등에서 매우 엄격한 격식을 요구했으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점점 간략해지고 있다. 악수나 포옹과 같은 인사법도 익숙하게 되었다. 인사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방법도 다양한데 말로, 행동으로, 서신으로, 선물로 하는 인사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말로 하는 인사는 가장 일반적인 행위로서 쉽고 간단하면서도 효과는 크다. 흔히 ‘입인사’라고도 하는데 교분 관계나 상황에 따라 표현 방식을 달리한다. 전화로 하는 인사도 포함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평소에는 전화 한 번도 안 하더니…’라는 말은 그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절은 행동으로 하는 인사로써 예절의 구체적인 표현 방식이다. 연소자나 아랫사람이 연장자, 상위자에게 경건한 마음과 태도로 인사하고자 할 때는 절을 하게 된다. 절은 서서 고개를 숙이는 인사와 반절, 큰절이 있다. 손바닥을 펴서 이마나 모자에 대는 경례가 있고 악수도 인사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서신으로 하는 인사도 있다. 과거에는 서신을 쓸 때 방식이나 호칭에 일정한 형식과 규격에 따라 격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꽤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격식과 내용이 많이 변화하고 간소화되어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최근 이런 손 편지는 크게 줄었다. 요즘은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통한 문자 송수신이 활발하다. 말, 행동, 서신으로 하는 인사는 비물질적임에 비하여 선물로 하는 인사는 물질로 한다는 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흔히 ‘인사치레’라고도 한다. 현금, 상품권, 기프트 카드가 있고 카카오톡으로 보내기도 한다. 선물이 인정이나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 과분하거나 의도가 있는 선물은 물의가 일기도 한다. 그에 따라 어떤 대가가 수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뇌물과 구별이 애매하고 공직선거법, 청탁금지법 등으로 규제하는 것을 보면 선물의 부작용을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다. 하니 순수한 정이 담긴 선물만을 인사의 범위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직 안에서 사람의 신상에 변동을 주는 인사도 관심 사항이다. 인사는 개인이 조직의 목표 달성에 대한 기여도를 분석, 평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당사자는 물론이고 조직 내외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현재와 장래를 좌우하고 주위에 영향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공무원의 경우 본인과 소속기관은 물론이고 시민과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주위에서도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예절과 소통의 한 분야인 인사와, 개인의 신상에 변화를 주는 인사는 다른 듯하면서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필자가 겪은 두 가지를 들어본다. 군청에 있을 때 승진하여 읍으로 갔는데 몇 년 후 다시 군청으로 가게 되었다. 강임 조건이었다. 매우 불합리하다 할 수 있는데 그 조차도 ‘인사’를 해야 수월할 것이라는 귀 뜸을 받았다. 도에 근무할 때였다. 시의 어느 부부 공무원을 한꺼번에 도와 인접 시로 옮기는데 역할을 했다. 애향심도 한몫 했다. 세월이 흐른 후 주말농장에서 그들을 한 번 스쳐본 것이 전부였을 뿐 대면한 적이 없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난 뒤 도에 문의할 일이 있었다. 마침, 업무를 담당하는 그에게 몇 번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망덕(忘德)’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서운함이 떠나지 않았다. 올해 도 정기 인사에서 주요 부서로 영전한 그의 이름이 보였다. 인사는 글자대로 사람에 관한 일이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인사를 잘함으로써 상호 유대와 존중이 이루어진다. 신년 첫날부터 설날까지 이어지는 시기에 덕담을 주고받는다. 의례적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다. 새해 인사와 공무원 인사 시기가 겹치면서 인사의 두 가지 의미를 떠올린다. 을사년 정월, 새봄을 기약하는 입춘 즈음에 필자의 졸고에 많은 관심을 주시는 독자님들께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기원하는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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