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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군 정충신 졸하다…숙종11년에 충무공(忠武公) 시호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10. 끝) 조정과 백성의 물의가 분분한 가운데 대궐 앞 금천교에 장막을 치고 한의 사신 용골대 일행은 금천교에 새로 마련된 혼전(魂殿)에 이르러 허위(虛位)에 대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릴 때 용골대는 부쩍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정탐꾼의 기별로는 조선 조정이 발끈 뒤집혀서 사신을 불러 목을 잘라 버리자고 임금한테 상주하여 우긴다더니 이제는 장막이라니. 또 자기는 조선에 사신으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전에 다녀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왕궁으로 들어가 조선 왕에게 알현을 하였다는데 알현은 고사하고 왕궁도 아닌 다리 옆 장막뿐이라 무슨 비밀스러운 계획이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의심이 부쩍 난 용골대가 잔뜩 겁을 먹고 있을 때 별안간 바람이 불어와 장막 옆 장이 날렸다. 옆 장이 젖혀지는 바람에 갑옷투구에 칼을 빼어 들고 장막 속을 흘겨보고 서 있는 무사들의 험악한 얼굴이 드러나자 용골대는 앗! 소리를 치며 뭐라고 지껄이면서 올리려던 술잔을 내동댕이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뛰기 시작하니 뒤를 이어 마부대, 몽고 왕자들도 뛰었다. 나머지는 영문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 헐레벌떡 용골대를 따라서 뛰게 되었다. 길가 좌우로 빽빽이 늘어서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용골대 일행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을 보고 나라에서 이들을 붙잡는 줄만 알고 “야아, 되놈이 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붙잡으라는 소리가 우레 같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성난 말과 같이 미친 듯이 따라 뛰었다. 이 수 많은 백성들한테 당할 길이 없는 용골대 일행은 어느 큼직한 소슬 대문집으로 쑥 들어가서 마굿간에 있는 말을 집어타고 무학재를 향하여 달아난다. 그리하니 백성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는 큰일을 저질러 놓은 결과가 되었다. 원래 조정에서는 후금(청) 사절단의 규모가 전례 없이 클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한(汗)을 천자로 삼겠다는 서찰를 가지고 왔으니 한편 의심과 방비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불우변란이 있을까 해서 금천교 다리 밑에는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막 뒤와 옆에는 무사들을 세워 파수를 보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고 공교롭게 되어 버렸다. 백성들의 소요와 용골대등이 달아난 것을 위에서 듣고 통사 박난영을 급히 용골대에게 쫓아 보내어 그렇지 않은 사유를 말하고 다시 돌아가자 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고개를 흔들고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다. 일이 이쯤 되니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고 팔도에 하교를 내렸다. “지금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고 또 청의 사신이 조상(弔喪)을 핑계하고 글을 가지고 왔으나 이것은 우리 군신(君臣)이 차마 듣지 못할 소리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써 결단하여 글을 받지 안하였더니 사신이 성내어 갔으므로 위태로운 기운이 점점 박두하였다. 팔도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은 각각 지혜를 다 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정(從征)을 자원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함께 구제하고 나라를 복되게 하라” 이렇게 엄숙히 하교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고취 시켰다. 나라가 이러한 때에 일대의 위인 금남군 정충신은 병들어 조정에 참례하지 못한지 반년이 넘었다. 춘추 예순 하나,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 어려서부터 크나큰 난리를 많이 치룬 까닭에 병이든 뒤에는 쇠약이 현연히 드러났다. 천병만마(千兵萬馬)를 호령하던 천하 명장 정충신이건만 세월과 병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위하여 범같이 날고뛰던 장군으로 병상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안타까운 장군의 심사도 심사이거니와 조선 백성의 크나큰 불행이었다. 용골대가 달아난 지 며칠이 되지 않는 이월 그믐께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는 정충신의 문병을 왔다. 계곡 장유는 최지천과 같이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며, 나중에 효종의 왕비가 될 인선왕후의 아버지였다. 나이는 올해 갓 쉰인 지천보다 한 살 아래이고 정충신보다 열두 살 아래인 49살이었다. “사또 최대감과 장대감께서 오십니다.” 하고 청지기가 아뢰는 소리를 듣고 정충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의관을 바로 잡았다. 들어오는 두 사람과 병석에 앉은 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말문은 콱 막히고 창연한 생각으로 눈에서는 이슬이 어리었다. “두 분 대감께선 아직도 날씨가 찬데 이렇게 소인을 찾아 주시니 대단히 황감하오.” 충신은 쇠약한 목소리로 이렇게 사례를 했다. “원,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감, 그동안 병환의 차도는 많으신지요?” 최지천은 자리에 앉으며 은근히 묻는다. “차도가 뭐 있겠습니까? 이제 대감들을 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나 봅니다. 백병이 구발(俱發)하여 어느 곳 한 군데 괴롭지 않은 데가 없고 대관절 구미가 없으니 미음 한 보시기 먹을 마음도 없습니다그려.” 정충신은 추연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크나 큰 국난을 놓고 대감이 이렇게 병석에 계시니 한 모퉁이가 비인 듯하오.” 지천 최명길이 말을 다시 한다. “조정에 유능한 문무백관이 많은 터에 내가 성한들 무얼 하오리까마는 누워 가만히 생각하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뿐이오.” 정충신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진정한 소리다. “대감! 용골대와 마부대가 달아난 걸아시오?” 계곡 장유가 정충신 장군을 쳐다보며 묻는다. “어제 집안 식구들에게 대강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거 큰일입니다. 후환이 염려됩니다.” 최지천이 받았다. 장계곡이 별안간 소리를 높여 데리고 온 상노를 불렀다. 상노는 제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영창문 앞에 등대하였다. “얘야, 그 지사미하고 담뱃대 들여오너라.” 장 계곡은 상노가 가져온 담배를 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충신과 최명길을 향하여 장유는 변명 삼아 말한다. “이것도 한 십년 빨았더니 이제는 인이 박혀 한동안 아니 빨면 입 속이 텁텁해서 견딜 수 없군요.” “대감, 그건 왜 빠시오? 백해무일리(百害無一利)한 것 아니오?” 나이 많은 정충신이 먼저 충고 하듯 말한다. “아니오, 그것은 대감께서 담배의 이점(利點)를 모르시는 말씀이오. 나는 이것을 영초로 알지요.” 장 계곡은 침이 마를 새 없이 담배 칭찬에 정신이 없다. “담배 이야기 때문에 아까 말이 중단 되었소만 이번 용골대와 마부대들이 달아난 뒤에 그 끝이 어찌 될지 어디 정 대감의 의향을 들려주시오.” 최 지천은 말끝을 돌렸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금년 안으로 결정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큰 걱정입니다. 그리고 한심하고 딱한 일이요.” 말을 마치고 정 충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속히…” 옆에 있던 장 계곡이 깜짝 놀라며 의심해 물었다. “병법에 ‘병(兵)은 신속한 것으로 주장을 삼는다’ 했습니다. 지금 한(汗)이 명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을 보니 승운(勝運)도 있겠지만 한의 밑에는 날쌔고 꾀 많은 군사가 구름 꾀듯 했소이다. 천하를 삼켜 보려는 한의 배짱으로 병법을 모를 리 없지요. 다만 청나라 군사들이 꺼리는 것은 물길 하나뿐인데 만일 압록강이 얼면 육지보다도 건너오기가 더 쉬운 것이니 금년 겨울이 가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한이 몽고를 쳐서 항복을 받고 대군을 거느려 연경을 무찌르려 하나 가장 두려운 것은 조선이요. 이 때문에 먼저 조선을 쳐서 후환을 없앤 다음 버젓하게 큰 덩어리를 먹자는 생각일 게요.”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대감의 병환은 아직도 중하시고…” 장 계곡은 다시 걱정스럽게 정충신 장군의 얼굴을 쳐다본다. “내가 성한들 무얼 하오리까? 인물이 과연 없지요. 임진년 난리 때만 해도 기막힌 인물들이 좀 많았습니까? 백사, 한음, 오리 이원익 같으신 분, 권률 같으신 어른, 충무공 이순신, 곽재우 같은 분 또한 서산대사 사명당 같으신 분들은 참으로 당당한 인물이었지요. 그럼에도 이여송과 명나라의 막막강병(莫莫强兵)을 빌리지 않고는 못 배겼는데 항차 지금은 어떠합니까? 인물과 준비가 다 같이 허술 한데다가 믿을 곳도 없고 그나마 전쟁을 네 번이나 거듭 치렀으니 과연 망극한 일이요.” 말을 마친 정충신의 눈에는 더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는 최지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지천이 너무 괴롭다.” 정충신 장군은 한 마디 힘 있게 말하고 자리에 피곤한 듯 누워 버렸다. 최지천은 얼른 일어나 갓을 벗기고 베개를 반듯이 매만지니 정충신은 그대로 누운 채 최 지천의 손을 꽉 쥐었다. “대감, 인물이 없소. 작은 인물은 많지만 큰 인물이 하나도 없구료!” 정충신은 말을 마치고 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최지천과 장계곡은 우울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어느 날 아침 최지천은 소세(梳洗)를 마치고 큰 사랑에 앉아 무슨 생각에 깊이 골똘하여 앉아 있을 때 청지기가 부고를 들고 왔다. “대감, 정 금남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최지천은 이미 짐작한 것이 있는 까닭에 새삼스레 놀라지도 않았다.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가만히 대답한 뒤에 그래도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청지기가 물러가야 좋을지 더 있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최 지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가 가지고 왔는가? 하인인가?” 최지천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인이 아니오라 그 댁 살림을 맡아 보는 사람이 친히 왔습니다.” “그래, 다른 별말은 없는가?”최지천은 벌써 무엇을 짐작하는 모양이다. “황송하오나 대감을 친히 뵈옵고 무슨 말씀을 아뢰겠다고 합니다.” 청지기가 들어왔다. “허허, 대감이 그만 돌아 가셨어?” 최지천은 정장군 댁의 청지기에게 이렇게 묻고 탄식했다. “네, 어젯밤 자시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말을 꺼낸다. “황송하오나 소인이 대감께 직접 뵈옵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의 사또께서 병환이 위중하실 때 ‘만일 내가 여의치 못하여 세상을 버리는 날이면 이것을 지체 말고 대감께 전해 올리라’ 하셨기에 오늘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중치막 소매 속에서 하얀 간지 한 장을 꺼내 전한다. 지천이 얼른 받아보니 풀로 단단히 봉해 붙인 간지다. 피봉에는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다시 겉봉을 뜯어보니 간지 한 복판에 화(和)자 한자와 임경업 석자가 적혀 있을 뿐 다른 아무런 사연도 없었다. 지천은 머리를 끄덕이고 간지를 다시 접어 무릎 밑에 놓은 다음 청지기에게 말했다. “자네도 오죽 섭섭하겠나? 나는 두 달 전에 뵌 것이 아주 영결이 되었네. 대감의 유언을 내가 잘 알아 듣겠네” 청지기가 물러간 다음에 지천은 방문을 첩첩이 닫고 간지를 껴안은 채 온종일 통곡해 울었다. 그 얼마나 절통한 울음이었을까? 이렇게 금남군 정충신 장군은 인조 14년(1636년) 5월 4일(음)에 숙환이 악화되어 61세로 별세했다. 광주의 한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일세의 명장, 일조의 충신, 겨레의 혜성이 병자호란이란 민족의 수난을 앞에 두고 가셨으니 얼마나 절통한 일인가? 임금이 크게 슬퍼하고 예장을 명하며 어의를 벗어 수의로 하사하였다. 그리고 숭정대부판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증직하였으며 숙종11년에는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내려 공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정충신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그가 저술한 ‘만운집’과 ‘백사선생북천일록’이 전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현재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 정충무공의 단아한 존영을 모신 사당 진충사가 있어 공(公)을 흠모하는 시민들과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고 참배객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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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군 정충신 졸하다…숙종11년에 충무공(忠武公)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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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5년, 또 전장…귀양 보낸 정충신 불너 8도 부원수 임명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9)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이때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를 평정하기 전에 척화 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후방의 조선을 쳐서 후환을 없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왕자 아민에게 3만 대병을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한다. 왕자 아민은 항장(降將) 강홍립을 앞세우고 대군을 몰아 노도와 같이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안주를 위협하니 평안 병사 의춘군 남이흥이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한 폭사를 했다. 적병들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계속 남진(南進), 황해도 평산성에 육박하여 도성을 협박하니 겨레의 비운은 또 찾아온 것이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년) 조선 땅은 다시 전장(戰場)으로 변하고 백성들은 다시 남부여대, 피난 보따리를 꾸려서 이 산골 저 산골짜기를 헤매야 했다. 인조는 도성을 비우고 강화도로 몽진(蒙塵)하였다.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니 그 누가 이 국난을 막아 낼 것인가! 나라 일이 위급하면 옛 충신(忠臣)을 생각한다고 귀양 보냈던 정충신을 다시 불러 8도 부원수로 임명하고 연약한 수병(手兵) 몇 천 명을 거느리어 후금의 대군을 막게 했다. 정충신은 이 큰 국난을 몸에 지고 일어나 갑주(甲冑)를 감고 정청(征淸)을 위해 명도(名刀)를 빗겨 들고 마상에 올라 수병(手兵)을 지휘하여 전선으로 달려 나가니 이는 임진년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白衣從軍)과도 같다 하겠다. 이렇게 출진한 정충신은 또 한 번 타고난 의(義)와 지략으로 적을 막게 되었다. 허약한 군사를 재촉하고 독려하여 마침내 황해도에 출진하였고 한참 진을 치고 후금군과의 혈전을 준비하는데 그때 오성대감의 사위 윤옥도 그 진중에 있었다. 부원수는 윤옥으로 윤량관을 삼았는데 갑자기 난리를 만났을 때라 곡식을 운반하는 길이 막혀서 군량을 대지 못함에 부원수는 군령을 내려 운량관을 잡아들여 대하에 꿇리고 문죄한 후에 내쳐서 베이려 한다. 윤옥은 잡혀 올 때에 죽을 지경을 당할 줄 이미 짐작하고 그 장인 오성 대감이 배소에서 써주었던 서찰을 찾아 몸에 지녔다가 부원수에게 올렸다. 정 부원수가 건네는 서찰을 받아보니 겉봉에 ‘부원수 막하’라 쓰여 있는데 분명히 오성 대감의 필적이라, 부원수는 오성 대감의 필적을 대하니 마음이 감동하였는지 편지를 떼어 보지도 않고 윤옥을 방면하면서 군량을 곧 대라 하였다. 한 조방장이 부원수에게 말하기를 “군률이 엄하지 못하여서는 여러 사람을 진항(鎭抗)하지 못할 터인데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윤옥을 용서하여 주시는가요?”고 말하였다. 부원수는 초연한 기색으로 “내가 차라리 군법을 세우지 못한 허물을 당할지언정 오성 상공의 지고하시던 은공을 져버릴 길이 없소이다. 저 운량관은 오성 상공의 사위요. 이 서찰은 바로 오성 대감의 서찰이니 오늘 이 일이 있을 줄 알고 써주신 바이라 어찌 군률만 세우기 위해 오성 상공께서 대우해 주시던 일을 저버릴 수가 있겠소.” 하였으니 이는 공(公)에도 사(私)가 있다 함이 아닌가! 조방장은 부원수 정충신에게 그 편지를 떼어 보지 아니함을 이상하게 여기어 편지를 떼어 사연이나 보시라 말하였다. 부원수는 대답하기를 “서찰을 떼어 본다 해도 사연은 없을 것이오”했다. 조방장이 의아하여 편지를 달라고 하여서 자기가 떼어보니 과연 글씨 없는 간지 한 폭이라 이는 할 말이 없으니 생각하여 하라는 뜻인데 부원수가 떼어 보지도 않고도 빈 편지인 줄 알았으니 그 역시 큰 총명함이 아닌가! 그도 그렇거니와 오성 대감은 어찌 이렇게 정 충신이 꼭 부원수가 될 줄 내다보고 자기 사위의 운명을 짐작했을까? 과연 신인(神人)들 끼리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강홍립을 설득시켜 청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부당하다 꾸짖으니 후금 왕자 아민(阿敏)도 조선군의 만만하지 않음과 평소 정충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철군을 하고 정충신은 군사를 이끌고 평안도 용만까지 수복 진군하여 백성을 안돈(安頓) 시켰다. 그 후 한동안 용만에 머물면서 해상의 잡적을 소탕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읖었다. “夢中 嶺大兵………………環珮 丁丁下玉階” (꿈 가운데 대군을 이끌어 평생 원전인 오랑캐를 평정하니 정말 봄날이 저물었도다. 솔솔 뿌리는 봄비는 거리에 가득하고 온 사람이 개선가를 제창하며 만인이 즐겨 하도다. 일천 관원이 승전을 축하하고 만산은 경사를 환호하며 허리에 찬 환패 소리는 쟁쟁하여 옥섬돌에 내리더라.) 정말 그의 충혼이 눈물겨울 뿐이다. 정묘호란 후에는 병으로 누워있었건만 임금은 여러 번 불러내어 오위 도총관, 비번사 당상 등의 요직을 맡기고 정헌대부의 높은 품계를 내렸다. 정충신은 항상 북쪽의 나라 일을 걱정하여서 병중의 노구를 이끌고 여러 번 헌책을 했건만 후금의 정세에 어두운 조신(朝臣)들은 숭명론(崇明論)만 고집하였다. 정충신의 헌책(獻策)을 저버린 결과 후금과의 관계는 또다시 험악해지고 국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난리를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별안간 구슬피 우는 소리가 새 문안 대궐에서 울려 나왔다. 이 뜻밖의 일에 소문에 소문이 이어져 온 장안은 술렁, 술렁, 육주비전(六注比廛) 상인들은 문을 걸어 닫고 철시를 했다. 웬일인가?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고 눈들만 휘둥그레 할 뿐이었다. 대내(大內)의 자세한 소식이 차차 무예청 별감, 내시, 나인, 대갓집 하인의 입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중전께서 산후 별안간 승하하신 것이다. 올해 춘추 마흔둘이라 원래 노산(老産)인 까닭에 산실청에서 그대로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창황한 중에 무슨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풀리고 어영청 군사가 새 문안 대궐에 결진했다. 훈련대감과 어영대장이 궁성을 호위하려는 것이다. 온 백성이 백의백립(白衣白笠), 설움의 물결이다. 온 백성이 망곡(望哭)한다 하고 치상(治喪)에 분주하여 을해년 마지막 달인 섣달그믐이 다 가는 줄도 모르게 병자년 새해를 맞이했다. 양반들은 분참봉(分參奉) 바람에 눈이 빨갛고 갓방 주인은 백립 파는데 재미를 붙이고 장안, 장외의 남녀노소는 국장(國葬) 구경에 정신이 빠져 세월 가는 줄도 모르게 이월이 닥쳐왔다. 막 왕비 한씨의 인산(因山)을 치룬 뒤에 청나라의 누루하치의 아들 청 태종 홍타이지한테서 괴상한 이름을 가진 사신들이 왔다.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등 백구십 여명이나 되는 사절단이었다. 옷은 모두 청빛인데 소매는 하도 길어서 손등을 덮는 까닭에 곰배팔 같기도 하고 팔죽지가 떨어진 사람들 같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은 검은 마고자에 앞뒤에다 대망(大蟒)을 수놓아 입었는데 앞이마 쪽은 반달 모양 같이하고 뒤통수는 빗질하여 빗은 다음 어슷비슷 엎어 따서 걸어 다니는 대로 머리꼬리가 발꿈치에 치렁거린다. 당 감투를 쓴 자도 있고 공릉 비단으로 만든 검은 모자에 붉은 꼭지를 단 자도 있다. 정묘호란에 누루하치와 형제의 의를 맺은 다음에 이상한 옷을 입은 청나라 사신이 오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많이 온 일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어염에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불안해하였다. 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통사가 홍제원까지 나가고 접반사가 모화관까지 나가 용골대, 마부대 일행을 접반하고 동학골 북평관으로 안내하였다. 이번에 사신으로 나온 연유를 물으니 용골대는 한(汗)인 홍타이지의 친서 이외에도 다른 봉서(封書) 두 통을 내놓았다. 친서는 춘신문안(春信問安)과 아울러 이번에 승하한 왕비 한씨의 국휼치조문(國恤致弔文)이며 치제물목단자(致祭物目單子)이다. 접반사가 나중에 내놓는 두통의 봉서를 보니 피봉에 한 통은 금국집정팔대신이라 쓰고 또 한 통에는 몽고제왕자(蒙古諸王子)라 적바림한 뒤에 앞면에는 봉(奉)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 적혀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접반사는 정색을 하며 “어찌해서 너의 나라 대신과 몽고 왕자들이 무엄하게 상감께 글을 바쳤느냐?”라고 탓하고 나무라니 용골대가 썩 나서며 “우리 한(汗)의 공덕이 높아서 치면 반드시 이기고 싸우면 반드시 굴복하니 명나라로 이젠 운수를 다 했소. 그래서 안으로 팔 대신과 밖으로 항복한 몽고 왕자들이 지금 한(汗)을 추대하여 황제위에 나가시게 했거니와 귀국이 이 소식을 들으면 대단히 기뻐하리라 하겠기에 우리가 함께 의논하러 온 길이오.”라며 말을 막았다. 접반사는 이 엄청난 소리에 기가 막혀 “허허! 이런 변괴가 있나. 되놈이 천자라니…” 통사를 돌아보고 입 안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접반사는 국서와 봉서를 받지 않은 채 용골대를 흘겨보고 급히 말을 몰아서 조정에 이 사유를 복명하였다. 접반사의 복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물의가 분분하였다. “오랑캐의 괴수(魁首)가 황제가 되다니 방자하고 무엄하구나! 되놈이 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발호하니 한심한 노릇이오. 이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야 하겠소이다. 해괴하고 망극한 일이오니 즉시 오랑캐 사신을 불러 목을 베어 당당히 법을 알리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합니다.”라며 장령 홍익한이 분개하여 앞에 서서 상소를 올렸다. 한편 이조판서 최명길은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번에 용골대가 온 것은 다만 춘신조제(春信弔祭)를 표방하여 온 것이오. 한(汗)의 글에도 별말이 없으니 화를 늦추는 방책은 어찌 생각하지 않으오리까? 후금의 사신을 불러 보신다 하여도 무관 하겠사옵고 몽고 왕자들도 꼭 반드시 박대할 것은 없고 엄하게 물리칠 것은 패서(悖書) 뿐이오이다. 사기를 한번 그르쳐 놓는 날이면 뒤에 이것을 뉘우치나 미치지 못할 일이오이다.” 하였다. 이렇게 의논이 분분한 중에 날짜는 이럭저럭 지나 용골대 일행을 북평관에 놔두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은 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다. 말을 잘 알아 듣지는 못하나 눈치만은 빠른 음흉한 용골대는 사방으로 줄을 놓아 조정의 물의(物議)를 염탐해 보니 사신의 목을 벤다는 등, 한(汗)의 편지를 받지 않는다는 등 조정이 불끈 뒤집혀 의논이 강경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용골대는 잔뜩 골이 나서 방 속에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접반사를 보내어 한(汗)의 치제(致祭)와 조상만을 받는다는 기별이 왔다. 이것은 최명길의 상소가 다소간 효력이 있어서 강경파들을 누른 것이었다. 어차피 정묘년에 화의를 맺은즉 치제와 조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될 터이나 한의 신하는 전과 달라 백여 명이고 그 중에는 무기를 가진 자들도 있으니 전례대로 대궐 안에서 조상을 받지 말고 따로 허청에 군막을 치고 조상을 받는 것이 옳다고 의논이 일치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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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5년, 또 전장…귀양 보낸 정충신 불너 8도 부원수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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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에 배척당하고 평안병사직도 박탈, 당진으로 귀양”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8)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정충신은 평양에 도달하여 장 도원수에게 군례를 올려 기왕지사(旣往之事)와 이괄이 모반할 것을 보고하니 도원수는 “한 고을을 지키는 장수가 이러한 변란에 임지를 지키지 않고 이곳에 왔으니 될 말이냐?" 고 꾸짖는다. 그러나 정 장군은 태연하면서도 상세하게 “소장이 지금 안주를 버린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고 소세(小勢)로 이괄의 예봉을 막는다고 하다가 귀중한 인명만 희생시키고 말게 될 뿐, 이곳에 와서 3책(三策)을 올려서 토적(討賊) 하는데 참례(參禮)함만 같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세 가지 방책을 올렸다. “적으로서는 평양 방면으로 나와 모문룡과 손을 잡고 서서히 이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한 후 관서지방에서 황해도 일대에 뻗혀 올라오는 것이 상책이요. 적이 지금 모반한 곳에서 후방의 오랑캐와 체결하여 인근 각 읍을 점령하고 서서히 한양으로 올라오는 것이 중책일 것이고 이괄이 지금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한양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下策)일 것입니다.”하고 삼책을 풀어 말하니 도원수는 다시 정 장군에게 묻는다. “그러면 이괄은 어떤 책략을 택하리라 보는가?” “이괄은 비록 용맹한 장수이나 꾀가 적고 성질이 급해서 하책을 쓸 것이외다.”하고 대답했다. 도원수는 쾌연히 정 장군의 말을 옳다고 여겨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삼고 남이흥을 후군대장(後軍大將)을 삼아 정 장군에게 큰 권한을 일임하였다. 이때가 인조 2년 정월 26일이었는데 그날은 직성(直星) 칠살(七殺)이 범(犯)하였으니 출병이 불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 장군은 그 말에 반대하며 “부모가 발병하여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택일하여 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며 여러 사람을 격려했다. 군사를 합하니 총 1천 8백여 명에 달하는 많지 않은 군사이나 재촉하여 29일 저녁 어두울 때에야 비로소 대동강을 건너 이괄의 뒤를 따랐다. 평안도 땅을 지나 황해도 황주 신교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괄의 병사는 황해도 수안으로 들어섰으나 황해 감사가 지킴으로 그 길을 버리고 황주로 길을 접어 들었다. 2월 2일에 정충신이 적병과 싸우다가 적장 허전, 송림 등을 불러 항복을 받게 되었는데 적장이 항복하러 온 것을 관군들은 적병이 침입하는 것으로 알고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다. 이 기회에 이괄은 황애를 시켜 돌진케 하여 관군은 크게 낭패를 당하였으나 정 장군은 기민, 침착한 지휘로 흩어진 군사를 황주성으로 물려 수습했다. 한편 이괄은 봉산 전탄(箭灘)을 건너 연안부사 평산부사의 군사를 물리치고 수원부사의 군사도 임진강에서 격파하고 한양에 도달하였다. 이괄은 한명련 등 휘하 장수들을 대동하고 군사를 몰아 풍우같이 동대문으로 들어오니 각 관청의 피난 못 간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갖추고 나아가 영접하고 백성들은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깔아 성대히 환영하였다. 이괄은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자리에 진을 치고 흥안군(興安君) 식을 데려다가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자기의 뜻이 이렇게 성공하였다고 여긴 이괄은 자기도취에 빠져서 인조의 뒤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삼정승 육조판서를 임명하였다. 정충신 장군은 왕이 파천한 것을 알고 종사관 이민구를 공주행재소로 보내어 연락을 취하고 10일 새벽에 군사를 거느리고 혜음령(惠蔭嶺)을 넘어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렀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한양을 포위하여 반군을 괴멸할 계획이었으나 정 장군은 “한양성을 포위 하면 우선 많은 군사가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여러 날이 걸릴 것이니 안산 고개, 길마재에 올라가 높이 진을 치고 반군과 대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며 병법에도 이른 바와 같이 북산(北山)을 먼저 차지하는 편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라고 했다. 남이흥(南以興)도 이 말에 찬성하여 정충신의 계획대로 시행되었고 그날 밤에 길마재에 올라가 서울 안을 내려다보면서 진을 쳤다. 이괄은 이미 대궐을 차지하였다 하여 의기양양할 뿐 아니라 이제 싸우기도 넉넉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거드름을 부렸다. 안현(길마재)을 점령한 정충신은 봉군(烽軍)으로 하여금 평상시와 같이 한 자루의 불을 켜게 하였으나 산 위에는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 말이 우는 소리가 소란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동풍이 사납게 부는 바람에 성안 사람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충신은 한편으론 경영고(京營庫)를 습격하여 지키던 적병을 제거하고 미포(米布)를 거두어 오니 양식과 물자가 넉넉하였다. 11일 아침에 이괄은 비로소 길마재 위에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명련에게 이르기를 “장만의 군사가 매우 정예(精銳)하다 할지라도 아직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고 뒤에 있을 것이며 지금 영상(嶺上)에 있는 군사들은 허약할 터인즉 우리의 일부 병사와 항왜(降倭)들로 하여금 창의문으로 나아가 연서일로를 에워싼다면 장만의 관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한명현은 “고개 위에 있는 관군은 그 수도 적으려니와 멀리서 온 오합지졸(烏合之卒)임으로 많은 군사로 포위 작전을 할 것 없이 한군데로만 공격하더라도 힘껏 싸우지도 않고 도망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괄은 한명현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군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고개 위에 있는 오합지졸들을 때려 부순 후에 아침밥을 먹자.”하고 성내에 방을 붙여 “관군과의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백성들은 나와서 구경하라.”하는 등 군세(軍勢)를 뽐냈다. 곧 이괄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길마재를 에워싸고 개미 떼처럼 기어 올라갈 때 한명련이 항왜 수십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앞을 서고 이괄은 중간에서 독전(督戰)하였다. 처음에는 동풍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빗발처럼 퍼붓는 적병의 탄환에 정충신은 상당한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당하게 되었고 선봉을 맡은 선천부사 김경운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싸움이 치열해 가던 중 바람의 방향은 변했다. 뛰어난 지장(智將)인 정충신이 이곳의 일기(日氣) 상황을 예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이곳 길마재의 풍향(風向)을 이미 알고 있던 정충신은 군사들에게 미리 고춧가루와 재를 충분히 준비하여 두었다가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세차게 불어대는 서풍에 뿌려 날렸다. 이괄의 반군들은 매운 고춧가루와 재에 눈을 뜨지 못하여 크게 당황하고 동요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충신 장군은 군사들에게 진격을 재촉하고 반군들을 무찌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괄 반군은 그래도 한동안 잘 견뎌내며 물러서지 않았는데 별안간 뒤에서 징 소리가 나더니 “후퇴하라!” 하는 소리가 산천이 진동하도록 울려왔다. 이괄의 군사들은 멋도 모르고 후퇴를 개시했다. 전투에서 북소리는 진군하는 것이고 징소리는 퇴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충신은 후군(後軍) 남이흥으로 하여금 적진 후방에서 징을 치라 한 것이었다. 이때를 타서 맹렬히 쳐들어가 반군 4백 명을 죽이고 3백여 명을 붙잡았으니 이괄의 반군은 여기서 산산이 패하고 말았다. 정충신의 계교에 녹아 크게 패한 이괄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백성들의 태도는 일변하여 “역적 이괄이 패했다.”하고 지르는 소리가 크게 진동하고 성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이괄은 하는 수 없이 초라한 패잔병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한명련과 같이 도망하였다. 한편 정충신은 군사를 휘동(麾動)하여 성안에 들어와 종로 광통교에 진을 치고 피난을 가는 백성들을 안돈(安頓)시킬 때에 측근 장수가 뒤쫓아 들어와 정 충신이 유진(留陣)함을 보고 “어찌하여 이괄을 쫒아가서 잡지 아니하고 여기서 유진 하시오?”하고 모두들 이상히 여기었다. 정 장군은 대답하기를 “이괄은 이제 몸 하나뿐인데 몇 날 못 되어 잡혀 올 것이요. 무슨 걱정이 되어 괴수 하나를 잡기 위해 많은 군사를 데리고 민간을 수색하여 폐단을 만든단 말인가? 본관은 성안에 있는 놀란 군사를 안돈시키기 위해 여기에 유진한 것이오.” 하였다. 또한 정충신은 군사를 시켜 각 곳에 보내 백성을 안돈시키고 한편으론 싸움에 이긴 소식을 행재소에 알렸다. 이괄은 삼전도를 건너 이북령(利北嶺)에서 광주 목사 임희를 죽이고 이천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현(奇益獻) 등이 이괄과 한명련을 죽여 首級(수급)을 바쳤기 때문에 이괄의 헛된 망상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정 장군은 이괄의 목을 보고 칼을 놓으며 크게 개탄하고 다음 일을 걱정하였다. “이제 역적이 제거되어 나라를 평정하니 경사는 경사이다만 작년에 범 같은 박염의 목을 베고 이제 맹장 이괄을 없앴으니 장차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는 누가 막는단 말이냐!” 인조가 공주산성에서 환어(還御)하여 한강 노들강변에 어가가 이르니 여러 장수가 봉어(奉御)하여 제각기 자기 공로를 치사 받으려 하였으나 정충신만은 어가 앞에 부복사배(俯伏四拜)하고 홀연 자기 전임 안주목영(安州牧營)으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생각하여 후에 사람을 시켜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이 무능불충(無能不忠)하여 전하께서 파천까지 하시게 했으니 대죄(待罪)할 뿐이오이다.”라고 상주했다. 인조가 환어하여 진무 일등 공신에 장만, 정충신, 남이흥 3인으로 하고 정충신에게는 금남군에 평양병사를 제수하면서 후금 누루하치의 정세를 물어보았다. “소신이 후금에 출입하면서 적정을 살핀 즉 중과부적(衆寡不敵)일 뿐 아니라 철기(鐵騎)로 서로 부딪힌다면 야전으로는 다투기 어렵고 수성이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적의 병수의 다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8부 대인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백일 초(哨)가 있는데 대략 9만에 달하며, 장갑군(長甲軍), 중갑군(重甲軍)이 일백인데 모두 수은갑(水銀甲)을 입었으며 1조로 되어있고 매우 용감하여 城(성)을 공략할 때에 주축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호마(胡馬)는 어떤 말이며 그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하고 또 임금이 세세하게 물으니 정충신은 “모두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인 것을 보면 아마 만 여필이 될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걱정하는 말로 “노추(奴酋)는 한개 소추(小醜)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 조선은 수 천리 지방을 가지고도 그것을 누를 수 없단 말인가! 다만 성심(誠心)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얻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지금 우리 장신(將臣)들은 모두 입수(入守)하려고만 하고 나아가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이다.”라고 했다. 정충신이 또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법이 없는 나라입니다. 양장(良將)이 있더라도 누가 같이 싸워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만약 10여만의 군병을 징발하여 1~2년만 훈련하고 연마시킨다면 요동 땅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수어(守禦)에만 구구하게 치우치겠습니까?” 그 후에도 여러 번 상소를 올려서 화평(和平)과 산성수리, 10만 양병(養兵)을 꾀했건만 주전(主戰) 숭명(崇明)파가 대의를 내세워 조정을 주도하는 데에는 너무나 외로웠다. 정충신이 의견을 여러 번 상소함에 척화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으며 신흥 세력 청과의 절교를 통보하러 청에 가는 사신의 길을 막고 조정에 재고해 줄 것을 죽기를 각오하고 간절히 건의 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평안병사직도 박탈당하며 당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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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에 배척당하고 평안병사직도 박탈, 당진으로 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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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평정한 정충신…부랑이라는 호인과의 만남
-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원래부터 오성은 명망이 높았으므로 그의 좌우에는 항상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 젊은 교생(향교의 생도) 한 명이 오성 대감을 더욱 따르며 옆에서 작은 시중도 들고 위로도 해 주곤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는 젊은 교생들에게 초시를 보아 생원을 시킨다고 했는데 이 시험은 중요한 시험으로 만일 떨어질 경우, 병정으로 뽑혀 나갈 판 이었다. 오성 대감을 각별히 따르던 그 교생이 전날부터 오성 대감을 찾아왔다. “대감! 저는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대감을 못 모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었느냐? 섭섭하구나.” “그러니 대감께서 주선 하셔서 좀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시험이나 잘 치러 합격하도록 하게나.” 다음날 시험이 시작되었다. 책은 맹자로서 먼저 외우게 하고 나중에는 뜻을 물어 보았는데 시관은 북병사(北兵使)로서 동헌 마루에 높이 앉아 점잖게 물었다. 앞뒤로 동료 교생들이 숨어 구경하고 있고 다음은 바로 오성 대감을 따르던 교생 차례이다. 그 교생은 맹자 가운데 양혜왕 편을 외웠다. “맹자견양혜왕( 孟子見梁惠王)이니 왕(王)이 입어소상(立於沼上)이니 고홍안(顧鴻雁), 미록왈 현자역락차호인가…” 하며 한 편을 줄줄 읊었다. 시관은 다시 뜻을 물었다. “홍안이 무엇이가?” 이 말이 떨어지자 교생은 잊었는지 어리둥절하며 당황하니 멀리 앉아 있는 동접들이 답답하여 ‘기러기’하고 조그만 소리로 일러 주었다. 교생은 잘못 알아듣고 ‘기색이’라 말했다. “기색이가 무엇이란 말이냐?”하며 내쫓는다. 교생은 오성대감을 뵙고 ‘기러기’를 ‘기색이’로 잘못 말해 떨어진 연유를 여쭙고 “대감께서 북병사에게 부탁하셔서 합격하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부탁을 드리니 오성 대감은 웃으시며 “그 역시 공사다. 네가 잘 못한 바에 어찌 사정을 쓸 수 있느냐. 다음 기회에 보아라” 하니 옆에 있던 정충신이 한마디 거든다. “공사에도 사정이 있습니다. 지금 교생의 형편으로 다음 기회를 어찌 기다리오리까. 다시 통촉하십시오.” “너의 말도 괴이치 않다마는 무엇이라 말을 만들어 청을 하라 하느냐? 네가 그 안을 생각하여 보아라.” “예,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내일은 북병사가 대감을 뵈러 올 터이니 대감께서 대작을 하시다가 교생을 불러 이리저리 분부하시오면 북병사가 이리이리 말씀할 터이오니 대감께서 저리저리 대답하시오면 일이 잘 될 것 이옵니다.” “잘 될는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보자” 하고 교생에게 단속하여 두었더니 그 이름날 과연 북병사가 와 뵙기를 청한다. 오성 대감은 인사 받은 후에 잠시 수작 하다가 충신의 말대로 한다. “거기 뉘 없느냐?” “예, 찾으셨습니까?” “기색이 모이 좀 주어라” “예, 벌써 줬습니다.” 북병사는 그 수작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기색이 무엇이지요?”하고 묻는다. 오성 대감은 충신의 계책대로 “내가 반찬하기 위하여 기러기를 기르는데 여기 사람들은 기러기를 기색이라고 합니다. 나도 여기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여기 말을 하였소.”했다. “그러면 소인이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어제 취재(取才)를 보았는데 ‘기러기 안’을 ‘기색이 안’으로 읽기에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하다면 소인이 잘못한 일이 있으니 그 교생을 다시 불러 들여야 원망을 듣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니 공평하도록 해야 하겠지요.”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 작별하였는데 북병사는 곧 교생을 불러 자기가 그곳 방언에 서툴러 잘못하였음을 말하고 등용하였으니 이는 다 정충신의 계책이었다. 오성 대감은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고, 깨어난 후 정 충신을 불러 앉히고 이른다. “내가 꿈을 꾸니 선조 대왕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광패한 자식이 국통을 이어서 어진 경으로 하여금 멀고 먼 지방까지 와서 곤욕을 당하게 하니 나의 마음이 불안하도다. 내가 상제께 아뢰어 광패한 자식을 내어 쫓으려 하니 경은 나에게 와서 기획을 같이 하자’ 하시기에 내가 재배하고 선왕의 좌우에 있는 신하를 본즉 모두 작고 한 사람이라, 이로 논하면 나의 명한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너는 나의 수의 관곽(棺槨)을 미리 예비하였다가 운구하여 가고 나의 집안일을 잘 보살펴 다오.” 정충신은 오성 대감과 비록 연기(年期)는 같지 아니하나 우연히 세상에 같이 출생한 호걸로써 마음을 허락하여 평생을 부모와 같이 모시다가 오늘 영결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찌 결연하지 않겠는가? 평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 절을 하고 말씀을 받는다. 오성 대감은 다시 벼루를 열고 편지 한 장을 써서 충신에게 맡기면서 “이 서찰을 네가 잘 간수 하였다가 한양 올라가는 날에 장만 공에게 전하여라. 장만 공은 비록 지혜는 적으나 복은 많은 사람이니 더불어 일을 하면 낭패가 없으리라. 너는 이후 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이니 그런 복 많은 사람과 동사(同事)하는 것이 좋으리라.” 충신은 또 절을 하며 편지를 받아 잘 간수 하였다. 그 때 마침 오성 대감의 사위 윤옥이 장인을 뵈러 북청에 왔다. 오성 대감은 무슨 까닭인지 매번 그 사위를 보면 못마땅하게 여기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금은 천리 원로에 왔음인지 반갑게 맞이한다. 마침 정충신이 곁에 없는 틈을 타서 서찰 한 장을 써서 사위에게 맡기면서 “후일 어느 때 비명에 죽을 경우를 당하였을 때에 너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주면 혹시 사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윤옥은 비록 교망한 사람이나 그 장인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라 또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에 서찰을 받아 간수하고 수일 후에 하직을 고한다. 오성 대감은 자기가 하세(下世)하게 될 조짐을 충신한테 말하였으나 그 사위에게는 말하지 않고 먼저 올라가게 맡겨 두었으니 그 사위는 충신과 본래 좋지 않게 지냄을 알고 또 무슨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함인 듯하다. 며칠 후에 오성 대감은 병환이 시작되어 십여 일만에 북청 기생 만옥이네 집에서 충신의 손목을 쥔 채 “너는 한양에 올라가 어진 임금을 모시고 백성 잘 다스리고 잘 살라” 하고 한 많은 일생을 끝마쳤다. 정충신은 심력을 다하여 상(喪)을 치룬 후에 본관과 병영을 내세워 상여군을 영솔하여 상행(喪行)을 호위하여 포천 장지에 이르러 안장한 후에 집에 들어와 세상일을 탄식하고 상(喪) 3년을 입었다. 정충신은 오성 대감의 서찰을 가지고 장만 공을 뵈었다. 그 서찰 사연은 “나는 신수 불행으로 천리타향에서 세상을 하직하거니와 공은 복록이 완전한 사람이라 평생에 액색(阨塞)한 지경이 없으리로다. 정충신의 인품은 비록 체구는 적어도 담대하고 안광이 샛별과 갈아서 중인(衆人)을 위압하며 재기와 의기가 뛰어나고 굳어서 글을 의논하면 한낱 명사의 자격이로되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일대 명장의 도략이라, 공은 유의하여 같이 주선하여 주면 장차 국가의 다행이 될 것이로다.” 하였더라. 장 만공은 그 편지를 보고 매우 기꺼이 여기어 편지를 충신에게 주어서 보게 하고 충신을 친근 애증하고 충신도 장만 공을 오성 대감과 같은 심정으로 섬겼다. 암군(暗君)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인조반정에는 이 시백, 최명길, 장유 등 백사선생의 동문 벗들이 가담, 광명한 천지에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반정공신은 모두 각기 높은 벼슬을 시켰는데 이괄만은 충분치 못하였다. 당초에는 이괄을 병조판서를 시키기로 하였는데 멀리 평안 병사가 되었음에 이괄은 분분망망(忿憤茫茫)한 마음으로 평안 병영에 도임(到任)하였다. 이괄은 영악한 사람이고 지량도 있는 장수로 공로에 대한 상당한 벼슬을 얻지 못하여 분한 마음을 가진 줄을 반정 제신들이 다 짐작하는 까닭에 염려가 되어 정충신으로 하여금 안주 목사를 시켰으니 이괄의 거동을 살펴가며 제어하라는 뜻이었다. 평양 병사 이괄은 분분(忿憤)한 마음을 품고 조정에 반기를 들려고 하나 안주 목사 정충신 때문에 감히 발작하지 못 하다가 계교 하나를 생각하여 냈다. 그것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지금 정충신은 군사를 조련시켜 조정에 반(反)하려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괄을 의심하고, 정충신은 반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아는 까닭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편 이괄은 정충신을 병영에 불렀다. 그 이유는 정충신이 이괄, 자기의 병영에 자기와 같이 있으면 감히 동(動)하지 못하려니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괄은 밤에 좌석을 베풀고 충신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좌우를 물리치고 충신의 손을 잡았다. “연전(年前) 반정에 나는 능력을 다하여 공로가 남에 뒤질 것이 없는데 이 귀, 김류 등이 저희들 마음대로 고관대작을 차지하고 공과 나는 무관이라 업신여겨 외방으로 내쫓아 이곳 안주목사와 이곳 병사를 시켰으니 사람마다 분수가 있는 바에 어찌 분하지 아니 하단 말이오. 나는 이제 기(旗)를 세우고 북을 울리어 한양에 들어가 이 귀와 김류, 그 외 소인배를 모두 잡아 죽여서 임금 곁에 악함을 쓰러 없애려 하니 공은 나를 도와 대장부의 뜻을 같이 세웁시다.” 말을 마치고 취한 눈을 부릅떠 충신을 건너다본다. 이괄은 기골이 장대하고 위력이 엄중하여 쉽게 범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장막 주위에 강한 군사를 겹겹이 배치하였으니 이경우를 당하여 반대 할 수도 없고 난감한 일이다. 만일 반대를 하고 보면 당장 죽음을 당할 모양이니 차라리 응종(應從)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이괄의 말을 괴이쩍게 여김이 없이 태연한 기색으로 “이귀와 김류는 소인도 미워하는 터올시다. 사또께서 그 무리를 없앨 양이면 소인이 재주는 없사오나 한 팔 힘을 돕겠읍니다.” 하니 이 괄은 크게 기뻐하여 친히 술을 부어 권한다. 충신 은 사양 없이 받아 마시고 그 이튿날부터 이괄의 지휘대로 응종하는 체를 한다. 이괄은 정충신을 선봉장으로 삼아서 장차 거사를 성공시키려고 하였다. 정충신은 가만히 앉아서 이리저리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 빨리 몸을 빼어 달아나야 되겠는데 이곳부터 길목마다 군사들이 엄히 파수하여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을 살피는 터이니 그 길로 가다가는 잡히기 쉽고, 뒷길로 피하여 보행을 한다면 능히 가능하겠지만 다만 꺼리는 것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군복이라 그 복색으로는 나설 수가 없음에 좋은 계책을 생각하다가 언뜻 생각난 일이 있었다. 월전에 서울에서 백주가 하인 하나를 보내며 편지하기를 ‘어느 때든지 급한 일이 있기든 이 하인을 불러 문의 하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 하인은 주인에게 그림자 같이 따라 다니는데 그 하인이 지금 밖에 있으니 불러 물어볼 수밖에 없다. 친신(親信)한 통인을 보내어 하인을 불러 놓고 좌우를 물리치고 급한 상황을 말하였더니 그 하인은 아무 말 없이 통통한 보퉁이 하나를 가져 왔으니 백주의 부탁을 받은 연고다. 정충신이 이 보퉁이 하나를 풀어 보니 유생이 입는 창 옷 한 벌과 중이 입는 장삼 한 벌, 목탁 한 개, 상인이 입는 심의 두건과 버선 그리고 미투리까지 있었다. 정충신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보퉁이를 도로 싸놓고 거짓 자는 체하다가 모두가 잠들어 사면이 고요한 때에 일어나 유생 옷을 내어 입고 보퉁이는 하인에게 맡긴 후 하인을 데리고 뒷길로 도망하는데 충신의 복색은 날마다 달라진다. 하루는 창옷에 갓을 쓰고 하루는 장삼에 목탁을 들었으니 뒤를 쫓는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계획이다. 이괄은 밝은 새벽에 일어나 좌기하고 선봉장을 불렀는데 선봉장은 벌써 앞으로 나갔다 한다. 이괄은 충신의 지혜로움을 겁냄과 동시에 또한 약속을 배반함에 크게 노하였다. 급히 취군하여 정병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쫓으며 수탐하여 보나 그 길 밖에 갈 곳이 없는데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이괄은 이상이 여기 충신의 모습을 대며 그런 사람 보았느냐 물으니 모두 못 보았다 하며 길가는 상제와 혹은 중은 보았다는 말은 있으나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충신이 무사히 이괄의 진을 빠져나와 안주본영에 돌아와서 장차의 군사 일을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홀연히 한 남장한 백옥 같은 여장부가 눈같이 흰 백마를 타고 달려와서 뜰아래 내려 큰 소리로 외친다. “사또! 지금이 어느 때라고 주저하고만 계십니까? 촌락을 다투지 않으시면 사또는 이괄의 패로 몰리시나이다. 빨리 평양 장 도원수 막하에 나가서 삼책(三策)을 바치시면 의심이 풀어질 것이오. 전부 대장이 되시어서 토평(討平) 하시면 일등공신이 될 것입니다.”하고 백마를 내 주면서 길을 재촉한다. 이 여자가 후일 정 장군의 지혜 통이 되었다는 부랑(夫娘)이라는 호인(胡人) 여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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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평정한 정충신…부랑이라는 호인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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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물이 나왔구려!”…천하 통일한 청나라 태종 예견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6)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정충신은 즉시 왕명을 받들어 일행 몇 사람을 데리고 심양에 도달했다. 청태조 누루하치 또한 영웅이었던지라 정충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사신으로 왔다는 소식에 기운을 꺾어볼 심사로 기지 창검 금부은월도로 좌우를 호화찬란하게 장식하고 용장강병(勇將强兵)을 벌떼와 같이 배치시켜 삼엄하고도 위압적인 기세로 정충신을 시험했다. 그러나 정충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누루하치가 들어서며 거만하게 말을 건다. “조선에서는 그처럼 사람이 없어서 너같이 부녀자 모양인 소장부를 타국에 보내어 국사를 탐판하게 한단 말인가?” 충신은 이 말을 듣고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신 등급이 있어서 타국에 사신을 보낼 적에 예외를 숭상하고 도덕을 준행하는 나라에는 대인군자(大人君子)를 보내지만 위력만 믿고 포악만 사용하는 나라에는 소장부(小丈夫)를 보내는 고로 내가 그대의 나라에 사신으로 왔더니 그대는 내가 소장부인 줄은 알아보는군.” 누루하치는 정충신을 무안하게 하려다 도리어 무안을 당하고 대답할 말이 없는지 딴소리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런데 그대의 나라에서는 어찌 명나라와만 교섭하고 나의 나라를 멀리 하느냐?” 정충신은 샛별 같은 눈을 부릅뜨고 누루하치를 바라보며 “그대는 예의도 은혜도 신의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명나라와 우리나라는 도움을 받고 은의(恩義)가 있는 나라인데 그 신의와 은혜를 잊지 않고 행동함이 당연한 도리거늘, 묻는 그대가 오랑캐가 아니고 무엇이가?” 이 책망을 들은 누루하치는 범상한 사람 같으면 대단히 분노하겠지만 그도 또한 호걸이라 허허 웃으면서 “그것은 내가 실수한 말이다. 그대의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서에 나더러 종놈이니 도적놈이니 하거늘 그 연유가 무엇인가 분명히 말하라.” 충신은 답했다. “그대가 천하를 도적하려 하니 그대 같은 큰 도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도적놈을 잡아서 죽이지 아니하고 종으로 부리는 고로 그대에게 도적이라고도 하고 종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는 그대의 나라를 공격한 일이 없는데 의심을 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여 생트집을 잡으니 어디에 그런 경우가 있는가?” 누루하치는 정충신의 일장설화를 듣고 노여워할 줄 알았더니 노여워하기는커녕 기뻐하는 기색으로 자리를 옮겨 다가앉으며 충신의 등을 두드리고 친절이 대해 주었다. 누루하치는 정충신과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맺고 자기 아들들을 불러 충신에게 인사하게 하니 충신은 그들의 절을 앉아서 받더니 마지막 순서의 왕자가 절을 할 때에는 몸을 급히 일으켜 빗겨 서며 맞절을 했다. 누루하치는 슬며시 그 연고를 물으니 충신은 숙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인물이 세상에 나왔구려!” 그 아들은 후일 천하를 통일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였다. 정충신의 사람 보는 법이 이러했다. 충신이 청나라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다녀온 후로 누루하치는 다시 조선을 범하지 않았으니 정충신의 공이 자못 크고 장하다 하겠다. 어느 날 백주는 홀연히 행장을 수습하여 어디로 가려는 기미가 보임에 충신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백주는 분명한 대답이 없어서 구차스럽게 다시 묻기를 그만두었다. 당시 임금인 광해군은 주색을 가까이하며 음란을 즐기니 조정에는 간사한 무리가 가득하여 어진 신하를 모함하고 골육지친을 이간하여 아우인 영창대군과 의조부인 김제남을 모반죄로 죽였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에 감금하는 일까지 자행하였으니 천하 만고에 자식이 어머니를 폐하여 가두는 일까지 있었는가! 그때 오성대감 이항복은 원임 대신으로 집에 있다가 모후를 폐하는 변이 있음을 보고 분연히 붓을 들어 상소를 지어 아뢰기를 “윤리에 어그러지는 일은 범상한 백성이라도 못 하는데 하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써 어찌 가히 행하리오” 하고 어명을 급히 거두라는 뜻으로 간절하게 상소했다. 그러나 어두운 임금과 간사한 무리가 득실대는 조정에 충직한 재상의 바르고 옳은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시행되기는 고사하고 임금에 거역하였다는 죄로 몰아 함경도 북청에 유배하기로 하고 벽파만호 정충신은 이항복의 사람이라 하여 벼슬이 떼어졌다. 세상 형편이 그쯤 되어 벽파만호까지 갈린 소식이 벽파진에 이르렀음에 정충신 개연히 탄식하고 배소에 가는 오성대감을 뵈려고 길을 떠나려 할 때 백주가 진작 행장을 수습하여 놓았으니 지체될 것이 없었다. 백주를 데리고 주야로 서둘러서 오륙일만에 한양에 도달하였는데 오성대감이 발행(發行)할 날이 수일쯤 있었다. 정충신은 계모를 서궁에 가두게 한 임금의 곁에 있는 간신 허균 등을 제거하려고 어두운 밤에 비수를 품고 뛰어들었으나 도적이 집에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행장을 수습하여 오성 대감을 모시고 갈 때 오성 대감의 나이 이미 육십이 넘었으며 오성은 철령 높은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생각에 임금이 있는 아득한 대궐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불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님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처량하게 하여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정충신은 북청 배소에서 오성대감을 모심에 자식같이 매사를 거행할 적에 충신도 당연한 일로 알았거니와 오성대감도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 충신은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쓰기에 오성대감의 왕복되는 서류를 모두 대서하고 매일 일기로 기록하였으니 그것이 ‘백사선생북청일록(白沙先生北遷日錄)’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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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물이 나왔구려!”…천하 통일한 청나라 태종 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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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흠모하던 여염집 처녀의 죽음…“남편으로 알고 떠나시게”
-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정경부인은 어떤 까닭인지 모르지만 쫓기는 사람은 사위요, 쫒는 사람은 정충신이라. 까닭은 나중에 알더라도 우선 급한 불부터 끌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충신아! 이것이 무슨 짓이냐? 썩 나가거라!” 하는 즈음에 오성대감이 퇴궐해서 집에 오니 사랑에는 아무도 없는데 내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조복도 벗지 않고 곧 내당으로 들어와 보았다. 숨은 사위와 꾸짖는 아내, 칼 들고 성난 정충신의 거동을 본 오성대감은 정 충신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까닭을 들은 오성대감은 “대장부가 말을 뱉었으면 시행 해야지.”하며 정경부인 뒤에 숨어있는 사위의 손목을 끌어내어 충신 앞에 밀어붙이니 부인은 겁을 내어 “대감! 왜 이러시오?” 했다. 집안사람들도 놀라서 “에고 머니!”했지만 오성대감은 들은 체도 않고 충신에게 “자, 내기를 시행 하여라” 했다. 충신은 자신의 성격으로는 바로 목을 베고 싶었지만 주인대감과 정경부인 안면을 보고 목을 벨 수가 없어 대신 칼을 들어 상투를 싹둑 베어 들고 사랑으로 나왔다. 정경부인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대단히 노여 했지만 대감이 주장하신 터라 어찌 할 수 없었다. 윤한림 또한 그 지경을 당하여 매우 분했지만 자기가 실수했기에 어찌 할 수 없었다. 모두 대감께서 혹시 분풀이를 하여 주실까 바랬으나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오성대감은 곧 사랑에 나와서 조복을 벗고 앉아서 충신을 불러 세우고 “너는 어찌 윤옥의 목을 베지 못하였느냐? 나는 네가 도원수를 할 줄 알았더니 오늘 보건데 부원수 밖에 못하겠구나!”하자 충신은 공손히 듣고 송구할 뿐이었다. 오성대감댁은 필운동이라 그 골목 안에 있는 여염집 처녀 하나가 십칠 세의 나이로 출가하지 못하였는데 정 충신의 용모가 남중일색임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뜻을 이룰 길이 없음에 우울증이 극에 달하여 질병이 되었고 점점 침면(沈眠)하여 결국 세상을 버렸다. 그 처자가 세상을 버리던 날 밤에 충신은 오성대감댁 사랑 윗방에서 혼자 자다가 자리가 편하지 아니하여 깨어 본즉 자기의 옆에 누가 누운 것을 느끼고 불을 켜고 자세히 보니 병들어 죽은 여자의 시신인데 눈을 감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놀랠 듯도 하지만 정충신이 놀라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수년 이래 골목 안에 드나들 때에 앞집 처녀가 번번이 웃어 보이다가 혹간 얼굴을 드러내고 혹간 소리를 내어 친하고자 함을 알았으나 체면이 있는 바에 아는 체 하지 않고 다닌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같이 괴상한 일을 당하였으나 아마 그 처녀가 죽어서 원혼이 헤어 지지 않았으므로 시신이 움직여 왔는가 보구나 하고 앞집에 나가 탐문하니 과연 처녀가 죽었는데 시신이 홀연히 없어졌다 한다. 충신은 그 처녀 부모를 데리고 와서 시신을 어루만지면서 “정이 있거든 말을 하거나 말하기가 어려우면 서찰이라도 하지, 내가 그대를 저버림이 아니라 그대가 스스로 슬퍼했구나.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나를 그대의 남편으로 알고 돌아가시게” 이 말이 끝나자 처녀 시신의 두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스스로 감았다. 선조임금은 세상을 뜨고 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항복 오성대감은 정충신이 크게 쓸 만한 장수 제목이라고 광해군에게 아뢰었음에 광해군은 병부에 분부하여 평안도 백파만호를 제수하여 도임 한 후에 감영에 치진하였는데 기이한 인연을 만나다. 그 때에 평안도 감영에 백주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얼굴이 절색이오, 노래가 명창이며 또 지조가 높아서 이름은 비록 기생 안책에 매었으나 영웅이 아니면 섬기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몸을 남에게 허락한 일이 없었다. 정 총신이 치진한 때는 마침 감사의 생신이라. 10읍 수령을 모아 놓고 생일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때에 좌중에 있는 백주를 가리키며 여러 수령을 향하여 “오늘 좌석에 계신 여러 수령 중에서 누구든지 글을 지어 저기 있는 기생의 가사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중매하여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하오리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러 수령들은 감사의 말을 듣고 생각건대 백주의 지조 높음을 아는 바에 자기의 인품으로 그의 뜻에 맞지 못할 줄을 알지만 감사의 말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어 각기 글을 써 놓았으나 백주는 곁눈으로 본체만체 한다. 벽파단호 정충신은 빙긋이 웃기만 하고 앉았다가 감사가 여러 번 재촉하자 마지못해 글 한수를 지었다. “저 중류에 떠있는 작은 잣나무 배는 몇 해나 빈 채로 푸른 물결 머리에 매였더냐. 곁에 사람이 만일 누가 먼저 건너가겠느냐 묻거든 문무 겸한 만호후라 할 것이다.” 백주는 그 글을 보더니 앵두 같은 입을 열어 옥구슬 같은 소리로 옵조린다. 좌중에서 모두 갈채함에 감사도 크게 기뻐하여 “백파만호는 저 기생의 남편 되기를 사양할 수 없게 되었소.” 하며 친히 술잔을 부어 한잔은 만호에게 전하고 한잔은 백주에게 전하였음에 두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으니 이는 초례청 합환주인 셈이었다. 그날 밤, 감사는 비장을 시켜 따로 숙소를 잡고 두 사람을 인도하며 인연을 맺게 하였으니 이는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그 이튿날 벽파만호는 백주를 데리고 자기 고을에 내려가 꽃과 나비 같이 물과 고기같이 즐겁게 지내는데 얼굴만 예쁘고 노래만 잘 할뿐만 아니라 절통한 재주를 또 가졌으니 그것은 점을 치면 앞일을 능히 알아내는 것이다. 하루는 백주가 만호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내일 안으로 감영에 치진하시오” 했다. 이에 만호는 의아하여 “무슨 일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무슨 일인지는 가서 보시면 아실 것이요”라고 하기에 재차 묻기가 곤란하여 하인을 거느리고 감영에 치진하여 감사를 만났다. 감사는 죽을 기색을 하고 있었다. 정 충신이 사유를 물으니 감사는 “지금 명나라 사신이 이곳에 이르며 은자 삼만 량을 납백 하라 하고 만일에 이것을 거행하지 못하면 내가 대단한 곤욕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걱정이 아니오?” 하고 답답해한다. 뜻밖에 벽파만호가 치진함에 감사는 그가 지락 있음을 기왕부터 알기에 반색하여 손을 잡으며 좌우를 물리치고 명나라 사신의 행악한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간청한다. 당시 명나라는 우리나라를 구원한 후부터 사신이 나오면 토색질이 무쌍하여 턱없이 재물을 수습하여 가는 일을 종종 하였는데 이때에도 사신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평양에 이르렀다. 만호는 속으로 “급한 일이 있다 하더니 바로 이 일이로구나”생각하고 감사한테 “그는 어렵지 아니하니 사또의 권리를 하관에게 반나절만 빌려 주시면 무사히 만들어 놓겠소이다”했다. 감사는 무사하겠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면서 “권리는 고사하고 나의 몸까지라도 빌려다가 일만 무폐하게 만들어 주오”하면서 상을 내어 권한다. 만호는 임의대로 하라는 감사의 권리를 받아 가지고 나왔다. 이튿날 아침, 만호는 객사에 좌기한 후에 영리한 사람 몇 명을 불러 귀에 대고 무엇이라 몇 마디 분부하였음에 이들이 나간 지 얼마 만에 홀연히 온 성중(城中)이 불끈 뒤집혀 물 끓듯 하고 백성들이 울며불며 부모와 자녀를 이끌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모두 황망히 성문 밖으로 나간다. 이때 명나라 사신은 영빈관에 앉아서 감사가 은자를 가져 오기만 기다리는데 별안간 성중(城中)이 요란하며 난리가 났음에 의아하여 또 알아보아도 난리 났다는 같은 말이라 겁이 나서 급히 돌아와 다른 사신에게 그 사유를 말하는데 방포 터지는 소리가 크게 난다. 사신은 크게 놀라 황겁한 걸음으로 군복을 입고 긴 환도를 짚고 앉아있는 정충신에게 곡절을 물음에 충신은 엄연히 앉아서 잔뜩 험악한 표정으로 “권리가 없어서 죽을 바에는 죽을 권리까지 막지 마시오.”했다. 그 말이 그치자 방포 소리가 또 한 번 크게 터졌다. 크게 두려움을 느낀 사신 일행은 부리나케 행장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재빨리 말에 올라타 길을 재촉하여 바람같이 몰아 달아나는데 잠시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오백리나 되는 의주에 도달하였으니 며칠 두고 연호 각읍에서 당했을 폐단까지 막았던 것이다. 정 충신은 사신을 쫓은 후 백성들을 도로 불러들여 안심시키고 선화당에 들어가 감사를 뵈니 감사는 무수히 치사하면서도 후탈이 있을까 염려함에 충신은 그렇지 아니한 곡절을 말한다. “자기가 먼저 불의를 행사 하려다 탄도가 났으니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감사를 안심시키고 일을 다 마친 후에 하직하고 환관 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임진왜란 후 까지도 혼란 상태에 빠져있을 때 만주에서는 건주호인(建州胡人) 누루하치가 일어나 흥경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제 부족을 통일하고 건국하여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했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차츰 세력을 모아서 우리나라와 명나라의 침범을 엿보더니 마침내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므로 명은 양호를 총수로 삼고 이여송 등의 제장으로 하여금 대군을 발하여 이를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도 원병을 청하고 재촉이 심하였다. 광해군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으나 앞서 임진왜란 때의 의리도 있음으로 마침내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로 하여금 1만 3천의 병을 거느리고 원정하여 명군을 돕게 하였다. 강홍립 등은 압록강을 건너 명군과 합세하여 적지에 들어가 부차(흥경 동쪽 60리)에서 후금의 대부대와 싸웠다. 이 싸움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조선군도 포위되어 선천군수 김응하 이하 및 몇몇 장수가 전사하였다. 강홍립은 적진에 통하여 조선의 출정은 부득이 한데서 나왔다는 것을 표명하고 그 무리와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이는 강홍립이 출정 전에 왕으로부터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받았던 까닭이다. 강홍립은 적진에 있으면서 내정을 본국에 알리는 한편 양국간의 화의를 성립시키고 알선하며 활약했다. 이같이 후금의 세력이 강성하여 짐에 조선에서도 북방 경비에 모든 힘과 지혜를 다했다. 이때 정충신은 보하진(甫下鎮)을 지켰다. 정충신은 이곳에 머물면서 고려 명장 윤관 장군의 유적을 살피고 시 한수를 지었으니 제 보하진(題 甫下鎮)이라는 시(詩)다. “천년이 지난 자취도 새가 나르는 사이인데/ 문공의 비석에는 이끼만 얼룩졌구나./ 우습다, 옥문관의 반(班)을 정(定)함이 멀었는지/ 몇 해를 고생하며 살다 가기를 빌었던가” 과연 충신은 문무가 겸한 명장이 될 바탕이 이미 갖춰진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명나라가 차차 피폐하고 청나라 가 점점 강성하여 후금의 누루하치는 웅장한 기세와 심원한 지략으로 천하를 통일 하려는데 자기 군사를 몰아 중원에 들어간 후 조선에서 그 뒤를 음습할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두어 차례나 우리나라 변방에 들어와 압력으로 화친하자 하며 말하기를 “너의 나라에선 나더러 항상 도적이니 종놈이니 하는 말로 왕래하는 문서에 기재하니 내가 언제 누구 집에 가서 무엇을 도적질하여 왔으며 내가 언제 누구 집에 가서 종노릇 하였더냐? 그 무슨 버릇없는 말인지 사리와 경우를 알고자 하니 분명히 답변하면 모를까 그렇지 아니 하면 군사를 몰아 곧 너의 나라 도성에 들어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소탕하리라.”하고 협박을 해 왔다. 조선에서는 그 겁박에 답하기도 하고 겸해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야겠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 조정 상하가 어찌 할 줄 모르더니 한 신하가 임금한테 아뢰기를 “누루하치는 영특하고 강맹한 인물 이온 바 조선을 향하여 짐짓 트집을 잡으려 하오니 사신을 보내 변명하여야 무사하겠사온데 여간한 사람을 보내어서는 왕명을 세우기가 쉽지 못하오니 만포진첨사 정충신이 문무 겸재하오니 특별히 사명을 맡겨 보내면 일은 완전할 것입니다.”했다. 그 말은 들은 임금은 정충신을 후금에 보내도록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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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흠모하던 여염집 처녀의 죽음…“남편으로 알고 떠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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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승리 이끈 권율과 정충신…권율 “정충신의 공이옵니다”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4)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연재는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다. -편집자 주- >>지난호에 이어 한성(한양)근처에 흩어져 있는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하여 밤낮으로 교련시켜 한성을 범하는 왜병이 있으면 방어할 기획을 주장하였으나 각처의 관병장과 의병장에게 힘써 싸우라는 전령을 보낼 뿐이었다. 적장들은 염탐하여 듣기를 명나라 군사는 뒤가 없고 이여송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조선 임금은 비록 환궁 하였으나 도성을 막는 군사가 수천 명에 지나지 못한다 하니 수만 군사를 행주목에 하륙시켜 장차 한성을 공격하려 하니 우리 조정에서는 조정 상하가 크게 놀래어 어찌할 줄 몰라 하였다. 도원수 권율이 아뢰기를 “물이 오면 흙으로 막는 법이고. 군사 가오면 장수가 막는 법이오니 신이 비록 미거하오나 장수의 소임을 다하여 오는 군사를 막으리오다.” 라고 장담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정하게 하나 별로 좋은 계책이 없음에 정충신과 의논 하여 계획을 강구한다. 당시 정충신은 무관으로써 권율 밑에 있었다. 정 충신이 말하기를 “지금 도원수께서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군사로 도성을 지키려 하시다가 적군이 도성을 철통같이 에워 쌓아 물 한 점도 통하지 못하게 하고 감시할 터이니 그러면 도성 안에 있는 우리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을 뿐이니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 군사가 오는 길목에 있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싸우는 일이 마땅하오이다.” 권 도원수는 그 의견을 듣고 생각하여 보니 합당하므로 군사를 이끌어 충신을 데리고 행주에 나가 적군의 진을 만났다. 도원수는 군사를 단속하여 싸우기 전에 정충신의 기획을 듣는다. 정충신이 또 의견을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적을 뿐 아니라 기세가 이롭지 못하여 힘으로만 대적 하려 하오면 반드시 패할 터이니 계교를 써야 할 것입니다. 도원수께서 먼저 문정(問情)하러 가겠노라 격서를 지어 적진에 전하시고 내일 식후에 단기로 그 진중에 행차 하시어 적장수의 마음을 방심하게 만드십시오. 돌아오시는 길로 곧 군사를 휘동하여 음습하시오면 방심한 적장수들이 출기불의로 나가는 우리 군사를 당하지 못하리라.” 도원수는 그 계교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당장 격서를 만들어 사자를 보내 적 진중에 전하였는데 그 격서에 “조선국 도원수 권율은 일본 대장의 휘하에 글을 올리나이다. 귀국과 아국은 본래 협원이 없던 바, 오늘날 군사를 일으켜 서로 다툼은 실로 뜻밖이라 시운(時運))이 그리 할지언정 별로 악한 의사는 없음에 이 변란에 대하여 본관은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본관 권율은 지혜도 없고 군사도 적어 싸울 능력이 없음에 몸소 장군의 휘하에 나아가 정성껏 간절하게 부탁드리고자 하옵니다. 장군이 군사를 물려주시면 만분다행이요, 만일 허락하지 아니하면 권률이 명을 바칠뿐이오니 깊이 통촉하시어 회답해 주시오.” 적장수는 격서를 보고 생각에 ‘저 사람은 이처럼 간걸하는데 내가 무단이 거절하면 오히려 협착한 심정이 보일 터이니 한번 서로 대하여 담판할 적에 시기를 따라 조치하리라’마음먹고 피답하는 글에 “장군의 격서를 보니 이 사람 마음이 감격한 바, 군사를 출동하여 서로 승부를 겨루는 일은 조정 명의요 이 사람의 주견이 아니오니 이해하길 바이오며 서로 만나보자 하신 말씀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오매 밝은 날 고견(高見)을 듣고자 하오이다.” 하였다. 도원수는 그 답장을 보고 군사를 단속하여 놓고 이튿날 밝은 후 군복에 전립과 환도를 갖추고 말에 높이앉아 등채를 들고 정충신과 군사 두 명을 거느리고 적 진중을 향했다. 적장수도 위엄을 보이려 장막 앞에 칼과 창을 세워 놓고 총군 수천을 좌우에 배립시켜 각기 총을 들고 총부리를 앞으로 겨누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이 여러 군사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도원수와 정충신은 일부러 겁나는 척 하였지만 속내는 겁낼 리가 있겠는가? 천천히 걸어서 장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회답 격서에 그처럼 온순하게 말하던 적장이 지금은 엄연한 기색이라 도원수는 두 군사를 장하에 머물게 하고 정충신만 데리고 장상에 올라가 적장수를 향하여 “공은 노고 중에도 신체가 강건하시고 공이 나아오실 때에 공의 처자도 다 무고 하던 가요?”이렇게 인사하니 적장수는 아연히 웃으며 “내가 들으니 조선은 예법을 숭상하는 나라로 아는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모의 안부는 묻지 않고 처자의 안부를 물으니 그런 예가 있는가?”하는 말에 도원수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기를 “예기(禮記) 곡례 편에 ‘아들 된 자는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지 않는다’했는데 공이 천리 타국에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부모가 계시지 않으심을 가히 알겠음에 처자부터 물었소이다.”하니 적장수는 좌우에 명하여 방석을 깔고 원수에게 좌정하기를 청한다. 원수는 좌정한 후에 홀연히 몹시 두려운 기색을 짓고 공연히 아첨하는 빚을 낸다. “이 사람은 반딧불 밑에서 글이나 읽는 서생이라, 장군의 신출귀몰하는 도략(韜略)을 알지 못하니 전장에 임하여 군사 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죽기로써 대령한 이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너무 송구하오이다.” 적장수는 이 말을 듣더니 난처히 생각하고 군중에 호령하여 총을 걷어 세우라 하고 차를 내어 대접했다. 도원수는 적장수에게 말하기를 “이 싸움은 임금의 명령으로써 행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디로 피할 곳이 없으니 닷새 동안만 싸움을 준비하게 해 주시면 마지못하여 싸워 볼까 하오이다.” 했다. 적장수는 그의 안정한 기세에 눌려 잠깐 막연히 앉았다가 혼연히 대답하기를 “이 사람도 상관의 명령을 받았으니 싸움을 임의로 할 수 없거니와 며칠 동안 기다리라 하니 그리 하오리다.” 도원수는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으므로 짐짓 앉아서 멈칫거리다가 작별하고 올 때에 손에 들었던 등채를 일부러 놓아두었다. 도원수는 장막 아래 내려섰다가 황겁히 하는 기색을 보이며 다시 올라와 동체를 집어 들고 “황망 중에 이 물건을 놓고 갔었지요. 변변하지 못한 물건이나마 버리고 갈 수 없기에 다시 와서 찾아 가니 웃지 마시오.”하고 도로 내려갔으니 이는 곧 두려운 모습으로 안은한 의사를 베품에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임이다. 대하에 내려와 보니 두 명의 군사는 총을 맞아 죽을까 사색이 되어 혼이 빠져 있다. 도원수는 군사를 회생시킨 후에 일으켜 진문 밖에 나와 한가한 걸음으로 말을 타고 돌아갔으니 그 행동과 언사는 모두 정충신의 계책이었다. 적장수는 도원수의 인사를 듣고 행동을 보건데 싸우려는 의사가 전혀 없어 보여 마음 놓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도원수는 적진에서 돌아오는 길로 군사를 배부르게 먹어 물밀듯이 적진에 들어가 습격 하는데 때는 마침 삼경이라 군사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없고 편전과 월도로 진격하는 기세가 대단히 맹렬했다. 적진에서는 불우지변을 당하여 왜병은 미쳐 갑옷을 입지 못하고 말은 안장은 짓지 못하여 뒤죽박죽으로 사산분주(四散奔走)하여 달아날 적에 피는 흘러 개천이 되고 주검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수백 명의 포로가 있었으니 이것이 사기(史記)에 적인 행주대첩이다. 싸움에 이긴 것은 실상 정충신의 공이지만 권도원수의 결단이므로 권도원수의 공이라 할 것이다. 그 후 부터는 권 도원수의 위엄이 원근에 진동하여 왜군이 감이 다시 범하지 못하고 진을 거두어 남쪽으로 갔으니 그 공이 어찌 장하다 하지 않겠는가! 선조 임금은 권 도원수를 접견하고 그 공을 표창하니 권 도원수는 아뢰기를 “신의 공이 아니옵고 정충신의 공이옵니다.” 하고 정충신이 주도하던 사실을 낱낱이 알림으로써 임금은 수차례 칭찬하고 많은 상을 주었다. 한편 정충신은 의주 행재소에서 부터 임금이 환어한 뒤에도 쭉 오성 대감댁에서 생활하였으니 마치 부자간 같았다. 이쯤 되니 오성대감 문하에 노는 소년 명사 지천 최명길과 계곡 장유 이귀의 아들, 이 시백 같은 이들과 의좋게 사귀어 놀게 되었을 때 모든 면에서 정 충신이 돋보였다. 어느 날 오성대감은 충신의 의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장지문 앞에 동자쇠를 걸고 그 위에 아무도 모르게 사발에 물을 담아 올려놓고 충신을 불러들이니 충신은 장지문을 열기 전에 동자쇠 위에 있는 사발을 내려놓고 들어가니 그 얼마나 신중 침착한가! 또 전에 읽은 책을 가지다 놓고 강(講)할 때에는 위에서부터 끝까지 한자도 착오 없이 그 뜻을 물으면 뜻밖의 뜻까지는 논란을 한다. 매사가 이러하니 작은 일을 보면 큰일을 알 것이므로 오성 대감은 그의 행동이 신밀(愼密)함을 반복하여 일마다 문의한다. 하루는 오성대감이 정충신에게 “네가 보기에 나의 위인이 나의 장인 도원수에게 비유하면 누가 났겠느냐?”고 물었다. 충신은 “총명득달 하심은 대감께서 한층 더 높으시고 진중 침묵하심은 도원수 대감께서 한층 높으시옵니다”했다. 오성대감은 그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어리석고 별미 적은 사람이 진중 침묵하느니라. 너를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보신 어른을 진중 침묵하다 할 수 있느냐?” 고 말해 그 장인을 인재로 허(許)하려 하지 않는다. 하루는 정충신이 오성대감이 뒷간에 있는 것을 보고 별안간 급한 소리로 “큰일 났습니다. 왜군 수천 명이 어디서 왔는지 지금 동대문으로 물밀듯이 들어옵니다”고 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본래 충신의 말을 믿는 바 그 말을 참말로 알고 궐내로 들어 갈 생각에 뒤를 다시 보지도 않고 일어서서 괴춤을 여미면서 나온다. 정충신은 앞을 막으면서 “지금 대감께서 소인의 말에 속으신 것은 지혜가 없으시다 할 바가 아니오나 전일에 대감께서 권 도원수 대감의 진중 침묵하심을 허(許)하시지 아니 하였기로 소인이 당돌히 시험 한 일이올시다. 권 도원수 대감께서는 소인과 두 명의 군사를 데리고 위험한 적 진중에 들어가셨을 적에 군사 두 명이 두려움에 기가 빠져 혼이 나갔기에 도원수 대감께서 멀리 서서 군사의 입에 오줌을 누시는 바 한 방울도 딴 곳 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일본 군사가 들어온다는 말 만 듣고 보시던 일을 다 보시지 못하시고 일어섰사오니 진중 침묵하심이 누가 나으실런지 대감께서 자랑하여 보실만한 일이올시다.” 오성대감은 그 말을 듣고 보니 충신에게는 속았지만 웃으면서 “내가 실수했다”고 말했다. 선조임금 말년에 정충신의 나이 근 이십이라 오성대감은 그 때에 정승으로 있었다. 오성대감은 충신을 무척이나 사랑하신 나머지 대감의 처제 즉 권율장군의 딸을 짝지어 주려해도 충신의 문벌이 부족함을 꺼려 망설이고 있으면서 한음 이덕형 대감에게 상의 했다. 한음대감이 단언하기를 충신 같은 사람을 얻기 쉽지 못하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오성대감은 충신을 아끼셨다. 충신은 매우 고매하였음에 양반들이 많은 시비를 걸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성대감의 사위 윤옥은 대대명문가의 자손으로 소년 등과하여 한림교리로 당대 첫 째 가는 명사를 자칭하는 사람이다. 자기 처가에 왕래 할 적에 충신한테 더러 핀잔을 당하였는지 이놈저놈 꾸짖기를 마지않더니 하루는 오성대감의 예궐한 때에 왔다가 정 충신이 혼자 있음을 보고 “이놈, 정충신! 네가 장기를 잘 둔다지? 나하고 한번 두어 보려느냐?” 하고 묻는다. 충신은 샛별같이 눈을 뜨고 윤 한림을 뚫어지라 보고 거만하게 “두자면 두지만 무슨 내기를 하지요” 하니 윤 한림이 “그럼 목 베기를 하자”고 한다. “장부가 한 입으로 두말은 못 하겠지요? 어디 한 번 두어 봅시다.”하고 정충신은 장기판을 내어 놓고 장기판을 벌인다. 윤한림은 자기 말이 희룡으로 나왔음에 충신의 말도 회룡으로 알았는지 또는 충신을 본래 미워함에 장기를 한번 이겨놓고 참으로 목 베려 하였는지 팔을 걷고 달려 들어 두는데 병법으로 두는 정충신의 장기를 어찌 능히 당할소냐! 윤한림은 장기 알을 몇 번 옮겨 놓더니 외통에 몰리어 다시는 풀어 낼 수 없이 되었다. 윤한림은 빙글빙글 웃더니 한 번 더 두자 하면서 장기를 다시 벌린다. 충신은 눈을 부릅뜨고 “한번만 둔다 하였지 한 번 더 둔다 하였단 말이요? 하며 일어서더니 벽에 걸려 있는 환도를 쑥 잡어 빼어 가지고 달려든다. 윤한림은 농판으로 시작한 일인데 충신은 실상으로 시행하려하니 살려 달라 빌 수도 없고 죽어 달라 머리를 디밀 수도 없는 경우라 칼날이 번뜻 보임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 벌떡 일어나 마루에 나가 신발도 찾을 길이 없음에, 사람이 급하면 지혜가 난다 하였듯이 자기를 보호하여 줄만한 사람은 장모밖에 없다 생각하고 대청으로 달아나는데 충신은 칼을 들고 쫓아 나선다. 윤한림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장모님, 사람 살려 주십시오. 충신이가 나를 죽이려 합니다.” 하고 정경부인 뒤에 가서 선다. 충신은 대정까지 올라섰으나 사모 앞에서 행흉하기가 어려워서 칼을 빗겨 들고 노기가 등등하다. 정경부인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쫓기는 사람은 사위요, 쫒는 사람은 정충신이라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는 마음에 “충신아! 이것이 무슨 짓이냐? 썩 나가거라!”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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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승리 이끈 권율과 정충신…권율 “정충신의 공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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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거지행세하며 진중 통과…충신 지혜에 감탄 이항복
-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연재는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다. -편집자 주- 정충신은 어머니를 하직하고 관청에 들어가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을 종이에 적어 올린다. 사또는 정충신의 모양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저것이 웬 일이냐?” 충신은 대답 없이 다만 손을 저으며 ‘베베’ 소리만 두어 마디 하였으니 목사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벙어리 거지 노릇 하면서 가겠다는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장계(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일이나 문서)와 편지를 어떻게 감추어 가지고 가는 줄은 몰랐다. 권 목사는 정충신이 떠난 후에 충신의 모친에게 충분한 쌀과 옷가지를 주며 각별하게 보호했다. 충신이 광주에서 경성을 향하던 때는 임진년 가을 무렵이라 적 군사가 팔도에 가득해서 곳곳에는 행인의 종적이 끊어졌고 마을에는 닭이나 개 짖는 소리도 없었다. 이런 때에 혼자 길 가는 충신은 노자가 있더라도 음식을 사서 먹을 곳도 없거니와 당초에 노자 한 푼 없이 나섰으니 굶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세미 같은 머리에 얼굴에는 상처가 더덕더덕한데다 다리마저 절뚝거려 일본 군사가 모여 있는 진중을 향하여 서슴지 않고 들어가 손에든 막대기로 진문을 두드리며 외마디 소리로 기괴한 소리를 지른다. 일본인도 사람인지라 그 중에 인정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벙어리 거지가 기근에 못 이겨 구걸하는 것으로 보고 밥을 건네면 충신은 그 자리에 앉아 먹기도 배를 채우고 남으면 짚품에 뭉크러트려 망탱이 속에 넣었다가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 충신은 이렇게 일본 진중에서 밥을 얻어먹고 밤이면 진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자기도 하고 혹시라도 일본 군사돌이 구박하는 기미가 보이면 손에 들었던 막대기로 마구 두들기니 군사들이 저항을 그만두는 형편이라 빌어가면서 대접을 받으며 보냈다. 아마 진중에서는 걸인을 구박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은 듯 했다. 충신은 이렇게 얻어먹으면서 오륙십 처의 일본 진을 거쳐서 사십일 만에 외주 행재소의 병조판서 이항복 댁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인 이항복 대감을 뵈옵기 간청했으나 위험한 때라 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처음 보는 사람은 모두 거절하고 있던 터라 하물며 구걸하는 거지를 들어가게 하겠는가? 그 때문에 문전이 왁자지껄해졌다. 병조판서 이항복의 처소는 문밖에서 지척이라 문밖에서 누가 자기 이름을 대며 나가지 않고 있자 사연을 알기 위해 문안에서 “내가 이항복이다. 누가 나를 찾느냐?”했다. 묻는 음성이 청아하고 쇄락하여 얼굴을 보지 않아도 대인군자인 줄 알 만하다. 충신은 반가운 마음에 익숙히 알던 사람에게 대답하듯이 “예 정충신 올시다. 광주 목사 권률 영감의 편지를 가지고 대감께 드릴 양으로 수 천리 험로에 간신히 왔습니다. 상감께 드릴 장계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자격이 아닌가가 의심도 되시겠지만 전신을 조사하게 하옵고 곧 불러 보아 주십시오” 하는 말에 이항복처럼 명달한 사람으로 무엇을 기탄하겠는가? 곧 문 밖에 나와 살펴보니 한 날 걸인이 누더기 옷에 망탱이를 메고 섰다가 오성대감에게 국금 배려하는데 머리채는 길고 빗지 아니하여 수세미가 되었고 얼굴 바탕은 비록 잘 생겼으나 상처와 때가 덮혀 있는 십육 칠세 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오성 대감은 그 모습을 가누어 보다가 정충신에게 말하였다. “이 험준한 길을 어린 아이가 도달 하였으니 도량과 정성이 무던하구나. 그럼 어디 장계와 편지를 좀 보자.” 그러자 충신은 “이틀만 말미를 주시면 장계와 편지를 완전히 만들어 바치오리다.” 했다. 오성 대감은 충신의 말을 듣고 충신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오늘 너를 만나 내 마음이 기쁘구나!” 오성대감은 이렇게 말을 하고 액정(왕명의 전달 및 궁궐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소속에게 분부하여 충신을 인도하여 목욕하게 하고 머리를 빗겨 상투 짜여 목건 씌우고 몸에 맞는 위복 한 벌을 변통하여 입혀 놓고 보니 천신 같은 남자이다. 오성대감이 기뻐함과 동시에 보는 사람마다 눠 아니 칭찬하리오. 충신은 장지 두 어장을 펼쳐놓고 망탱이의 끈을 차례로 풀어 연하여 붙여 놓으니 처음에 써 내린 편지와 장계다. 오성 대감은 그 지혜에 감탄하고 장인의 편지를 본 후에 장기를 임금께 올리고 정 충신이 그 장계를 가지고 오던 수말을 세세히 임금께 알리니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즉시 충신을 입시시켜 보시고 매우 칭찬하시며 수라상을 물려 먹게 하시고 어의를 벗어 입히셨으니 영총이 무쌍하였다. 임금께서는 정충신을 오성에게 맡기시며 완전한 인재로써 떳떳하게 배양하라 하셨고 장계를 보신 후에 비로소 광주 싸움이 있었음을 아시고 그런 장수를 일읍 수령으로 둘 수 없다 하여 광주 목사 권률을 전라 감사에 명하여 도내 병마를 총독하게 하였다. 오성 대감은 정충신을 댁의 거실에 같이 거처하게 하고 문하의 명사들과 같이 사서를 가르치시니 그 재기는 학문이 일취월장하고 단연군학의 일봉으로 그해 겨울에 의주 행재소에서 보이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소년으로써 무과에 급제하는 것도 드문 일이기 때문에 임금께서는 장차 자라면 크게 쓰리라 말씀 하셨다. 한편 명나라에선 구원병을 보내지 않기로 의논이 되었음에 우리나라 사신 정곤수가 황극전 뜰 앞에서 밤낮 엿새를 울었다. 신종 황제께서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이여송으로 제독을 시키고 정병 수 만 명을 조발하여 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행재소에 이르니 군신 상하가 만분 다행이 여기 오성 대감이 항복으로 접반사(외국의 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을 이르던 말) 삼아 마중을 보내는데 정충신이 반당으로 따라 나간다. 따라 나가는 정충신은 소매 속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내어 오성대감께 드리니 오성대감도 또한 아무 말 없이 받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 마중을 나가 이 여송을 만났는데 이 여송은 반접사를 보더니 또한 아무 말 없이 오른 손을 내밀었다. 반접사는 아까 정 충신에게 받은 종이뭉치를 이 여송에게 주었으니 이 종이뭉치를 조선 팔도 지도였다. 이 제독이 구할 줄 알고 준비하였던 정 충신은 이렇게 지혜가 뛰어났다. 아무 말 없이 이 제독이 손을 내민 것은 반접사의 지혜를 보려 함이었다. 오성대감도 그 물건이 지도인 줄 알았으므로 받아 넣었다가 꺼내어 준 것 이니 그 지혜도 무던한 지혜이나 자기가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정충신 이 준비한 것을 수용하였으니 오성대감의 지혜가 충신보다 못하다 할 수 없으나 정충신의 지혜를 가히 오성대감에게 비길만 하였다. 이 제독은 종이를 펴 보니 조선팔도 지도인데 길의 멀고 가까움과 호구의 많고 적음, 그리고 어디가 험악하고 어디가 평탄한가가 세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 제독은 놀라 심중으로 조선에도 인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제독은 이항복 오성대감으로 총 병부 참모관을 시켜 군무를 의논한다. 이에 군사를 몰아 평양에 이르러 평양성을 돌격하는데 성공하여 이항복 오성대감이 호괴관으로 군사를 호괴할 터인데 호괴 식품이 미처 준비되지 못함에 오성대감은 시세가 급박하여 반당 정충신에게 계교를 물었다. 충신은 오성대감의 귀에 대고 무어라하니 오성대감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곧 한음 이덕형 대감을 청하였으니 한음도 총 병부 참모관으로 그 진중에 있었다. 오성대감의 청함을 듣고 무슨 의논할 일이 있는가 하여 즉시 왔다. 오성대감은 한음대감을 보고 내가 잠깐 볼일이 있는데 이 진지를 비울 수가 없으니 형이 나의 대신으로 한 시간만 여기 있으면 곧 다녀오겠다고 하며 일어서서 나간다. 한음은 어떤 까닭인지 모르고 잡혀 앉아 있는데 이 제독은 평양성을 깨뜨려 놓은 후 군사들을 모아 놓고 호괴를 기다리는 바 호괴가 지체됨으로 제독은 노여워하여 조선 호괴관을 잡아드리라 호령하였다. 호령을 들은 무사들은 오성대감의 처소에 이르러 호괴관인양하고 앉아 있는 한음 대감을 결박하여 제독의 군막 앞에 꿇어 앉혀 놓고 엄분부를 내린 후에 군법에 의해서 베이라 하는 참에 정작 호괴관인 오성대감이 들어와 군사들을 다 호괴하였음을 고한다. 이 제독은 베이려던 사람이나 고한 사람이나 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고 또 호괴를 다시킨 바에는 다시 책망할 바 없음에 곧 방송하였다. 한음대감은 겨우 죽기를 면하고 나와서 오성대감에게 그런 기롱을 한다 말인가? 책망도 같고 질문도 같게 말을 한다. 오성대감은 한음 대감의 손을 잡으며 “형과 나는 죽고 살기를 한가지로 하여 나랏일을 처리하는 처지라 오늘 엄중한 군령 밑에서 서로 보호할 수밖에 없던 바 내가 호괴를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형이 밖에서 주선하여 나를 살리려 하여서는 시간이 넘어 내가 죽을 터이오. 형을 대신 앉히고 내가 밖에서 주선하면 시간을 넘기지 않아서 일이 무사하게 될 터이기에 모계를 잠깐 쓴 것인데 그 모계는 실로 나의 의사가 아니고 저기 서 있는 정충신이 가르쳐 준 모계이니 형이 만일 원통한 마음이 있거든 충신을 책망하게” 하니 한음 대감은 찬연히 웃고 충신을 불러 옆에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참 기이한 남자라고 칭찬하고 사랑함을 마지아니하였으니 한음 대감의 도량도 또한 무던하였다. 이 제독은 평양성을 깨뜨리고 군사를 거두어 다시 대오를 정제하여 대동강을 건너 적 군사를 쫓다가 고양 벽제역에 이르러 적군사의 호접진을 만나 철기 천명과 가동 삼백이 죽었음에 이 제독은 종시 두려워하여 감히 혜음령을 넘어서지 못함에 오성대감은 여러 번 권고하다 못하여 혼자 걱정하고 있을 때에 정충신이 이 제독과 대면하길 원했다. 무슨 계책이 있는가 짐작하는 오성대감은 충신을 데리고 이 제독 앞에 들어가 수작할 적에 이 제독은 정충신의 미리 명민함을 보고 불러 같이 앉히고 통변을 세워 놓고 “너는 유충한 나이로 이렇게 위험한 진중에 따라 다니면 무서운 마음이 없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충신은 “위험한 진중은 대인은 무서워 하지만, 소인은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격동된 이 제독은 무안한 기색이 현도하면서도 넘기는 말로 “네가 무서워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하고 묻는다. 충신은 빈정대는 말로 그 마음을 격동시켜 놓고 다시 권고하는 말로 진정시켜 본다. “적 군사는 비록 한번 이겼으나 삼국 군사가 뒤쫓아 올까 의심하여 경성에 있는 진까지 옮겨 갔으니 대인께서 이제 앞으로 나가기를 힘쓰시면 적 군사는 겁이 생겨 감히 범하지 못할 터이오. 우리나라 군사들도 제독이 나가심을 보면 용맹하게 싸움에 나설 것이며, 대인이 만일 나가시지 아니하면 적장수의 생각에 삼국 군사는 뒤를 이을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도로 올 터인즉 그러하시면 우리나라 군사들도 낙심하여 싸울 기운이 없을 터이니 이는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아는 형편이온 바 대인이 공연히 여기서 유하시면 무서워하심이 아니고 무엇이오리까? 어서 기와 북을 정제해 가지고 올라가십시다.” 이 제독은 일장설화를 듣고 자기는 천하 대장군으로써 지혜와 용맹이 저 십여세 소년만 못하다 탄식하며 “조선에 저런 인재가 있으니 무엇을 걱정 하리오! 내가 그대의 지휘대로 할 수 밖에 없다”하고 곧 군령을 내려 군마를 출동하여 경성으로 들어와서 성중에 유진하였음에 선조 대왕께서는 그 뒤를 쫓아 환어하여 불타고 남은 궁궐을 대강 소제하고 거처 하셨다. 선조 대왕께서는 이 제독을 보고 인심을 수습하여 달라 하였으나 이 제독은 적군사의 위엄에 감히 발작하지 못하다가 여러 번 간청함에 마지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중을 향하여 평택 들지에 유진하고 제장을 나누어 보내어 우리나라 군사의 싸움을 도와 주다가 여러 번 패하였으니 만약 이 충무공과 권률 목사의 승첩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리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이때에 조정에서는 여럿이 공론하이 권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여 곧 도 원수로 배하여 불러 들였다. 권률은 명령을 받고 경성에 올 때 정 충신 모친도 모시고 왔다. 모자가 서로 반겼으며 충신은 모친을 보호해 주신 덕을 치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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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거지행세하며 진중 통과…충신 지혜에 감탄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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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월매향이 반한 출중한 용모…늦은 밤 찾아온 월매향
-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연재는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다. -편집자 주- 소년 정충신은 과연 똑똑하고 영리하며 용모도 어여쁜데다 새까만 눈은 마치 새벽 샛별이 정기를 쏘는 듯 반짝거리고 윤곽이 뚜렷한 휜 얼굴은 흡사 살 속에 분을 따서 넣은 듯했다. 여기에 나이어린 아이건만 구변이 좋으니 귀여운 입술을 움직여 영악한 말을 뱉어 버리면 보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스런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영문안에는 드나드는 기생들이 많았다. 정충신의 용모가 출중한데다 말 한마디 하는 것과 손 한번 흔드는 것조차 귀여워 나이 먹은 늙은 기생들은 안아줄 듯 귀여워하고 나이어린 기생들은 소년 정충신의 눈에 힐끗 띨 때마다 남몰래 얼굴을 붉히고 가슴을 조였다. 이 중 늙지도 젊지도 않은 월매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 댓, 얼굴과 가무는 원래 광주 부중에서 제일 이름난 기생이고 능란하고 정 많고 말 잘하고 협기 있고 윗사람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후히 대접할 줄 알아 육방관속은 말할 것 없고 사령 군노들까지 모두 ‘월매향 아주머니!’,‘월매향 누님!’하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인물과 수단이 이만하니 신임 사또가 내려오기만 하면 행수기생도 수청기생도 월매향이다. 웬만한 사또면 부임 첫날에 벌써 월매향의 녹실녹실한 몸맵시 사각사각 스치며 늘어진 스단 치마와 엷은 옷 사이로 아른 아른 엿보이는 살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매정하고 깐깐하고 무서워서 아전들이 쥐구멍을 찾는 빳빳한 사또라도 월매향이 수청 들어간 지 이틀 밤이면 다음날에는 반드시 사또의 웃는 얼굴을 보고야 만다. 이러하니 가는 사또와 오는 사또보다도 남치마 늘어뜨린 행수 기생 월매향이 진짜 사또 격이었다. 어려운 공사만 있으면 호방, 이방, 형방이 월매향을 찾았고 월매향이 한번 싱긋 웃으며 “그러시구려! 오라버니, 뒷감당은 내가 하리다” 라고 한마디만 하면 수십 백량의 돈이 월매향의 곳간으로 들어왔고 자연히 월매향은 거부가 되었다. 월매향은 자기 손에 재물이 모여지니 동리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돈이나 식량이나 심지어 피륙이라도 아낌없이 인정을 베풀었다. 월매향의 인간됨이 이러하니 영무 안 관속들은 물론이려니와 주위의 백성들까지 “월매향 아씨! 월매향 아씨!”하고 부르며 따랐다. 이 월매향이 미소년 정 통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어린 동생을 귀여워하는 철난 누이 같은 마음일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월매향은 스물다섯의 한참 무르녹게 다 핀 한 떨기 해당화 같고 정통인은 열일곱 살의 훤칠하게 다 자란 미소년으로서 새 날개를 봄바람에 팔랑이는 깨끗한 호랑나비 격이라 정 충신은 모르지만 농익은 한 떨기 해당화 같은 월매향은 늙고 탐심 많고 능글맞은 호랑나비 보다 산뜻하고 귀엽고 신선한 노랑나비인 정충신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이때의 정 충신의 모습은 외압장이 월매향이 아니라도 집어 삼킬 듯이 귀여웠다. 삼문 안 동협 마당에서 월매향은 사또의 눈치를 살펴 정충신의 어깨를 툭 치며 희롱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 충신의 머리채를 만지며 “어쩌면 머리를 예쁘게도 빗었구려. 정 통인의 머리 한번 빗겨 보면 한이 없겠소” 하며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면 정 충신은 두 볼에 살짝 홍조를 띄워 소년다운 부끄러움을 내보이기도 하면서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소원 뭐 그리 대단치 않으니 당장이라도 빗어보구려” 또 어떤 월매향이 정 충신의 손을 잡고 손을 잡고 손금을 보아주겠다고 수작을 하면 사또를 대며 휙 돌아서는 그 쌀쌀함에 산전수전 다 격은 월매향이건만 민망하고 무안함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어느 날 정 충신은 밤늦도록 사또 곁에서 시중하고 자기 처소로 돌아와서 불을 끄고 막 자리에 누우려고 할 때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인기척이 났다. 정 충신은 “거 누구요?” 하고 물으니 “나예요”한다. 다시 “내가 누구란 말이요?”하면 “내 목소리도 못 알아 들어요” 하는 대답은 매운성스럽기만하다. 정 충신은 어둠 속에서 옷매무새를 갖추고 일어나 촛대에 꽂힌 초 등걸에 불을 켜니 월매향의 자태와 얼굴이 환하게 드러난다. “웬 일이유? 이 밤중에 자지 않고”, “잠은 날마다 자는 잠인데 하루 밤쯤 안자면 어떠우?” 월매향의 대답은 추근거리며 녹녹한 것이 여인의 정을 담고 있었다. 월매향은 대답하며 남치마 자락을 걷어 올리니 하얀 속살이 다소곳이 드러나고 남숙수 중등끈이 풍성한 허리춤에 뵐 듯 말 듯 감돌았다. 정충신은 다소 퉁명스레 대답한다. “얼근 가 보시우 공연히 남 잠도 못 자게 하지 말고”, “왜 내가 그렇게도 귀찮단 말이요?” 월매향은 서운한 듯이 말하고 방 윗목에서 다담상을 들어 정충신 앞에 갖다 놓는다. 상에는 수란 편육 전유어에 보기 좋은 약식이며 다식정과와 함께 따끈한 장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월매향은 하얀 손을 들어 합뚜껑을 열어 음식을 권하여 말한다. “정 통인 생각하고 마련하여 왔으니 출출 할텐데 자시구려.” “그런데 이게 원 거요?” “실상은 아까 사또께서 잔치 하시던 퇴선인데 정통인 생각해서 가지고 온거야” 정충신은 기색이 일변하며 벌떡 일어나 상을 탁 차 버린다. 장 국물이 주르르 월매향의 남치마 자락을 적신다. “사내자식이 절도사가 된 다음에 먹다 남은 음식을 남에게 준다면 모르되 구구하게 남이 먹던 찌끼를 먹는 말이요”하며 분연히 월매향을 나무라는 소년 정충신의 기상은 씩씩하였다. 월매향은 처음에는 발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 사내다운 늠름한 말을 듣고는 미안하여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미안하다”고 겨우 한마디 말한 뒤에 엎질러진 그릇을 주섬주섬 수습하여 황망히 방을 나왔다. 한편 이때는 임진왜란 때이라 위에서는 의주를 파천해 계신 때라 조정 백관들도 다 상감을 모시고 있게 되나 모든 군사 일과 공사는 의주로 장게해서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정충신이 속해 있는 광주의 목사는 권률 장군이었는데 권률 목사는 군사 일을 삼감께 품하여 올리려 하니 경, 충청, 전라, 각도가 적군이 만산편야 하여 길목마다 진을 치고 파수를 보고 있으니 서로 연락을 취할 길이 없으매 권률 목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인물이 없어 군중에 영을 놓아 누구든지 장게를 만들고 적진을 뚫고 나가 무사히 삼감께 바치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과 벼슬을 주리라 외쳤다. 그러나 워낙 위험스럽고 무거운 직책인지라 누구 한사람 자원하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소년 정충신이 썩 나서서 말하였다. “소인에게 맡기시면 갔다 바치오리다.” 권 목사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반가운 기색이었으나 정충신의 나이 어림을 염려하여 말하였다. “네 말은 기특하다. 하지만 나이어린 너를 위험한 도로에 수 천리를 어찌 보낼 수가 있단 말이냐? 네 청을 허락할 수 없구나.” 하니 정충신이 또 말하기를 “장게를 보낼 일이 급한데 보내는 계획은 아니 하시고 보내지 못하는 계획만을 하십니까? 보내는 책임을 소인에게 맡기시어 잘 갔다 바치면 다행 이옵고 설령 가지고 가지 못한다 하여도 사또께서는 헛걱정 하시는 것밖에 안되오니 소인에게 맡기십시오. 소인의 나이 어림을 염려 마시고 장게를 빨리 주십시오” 핀잔과 재촉의 소리로 정충신이 권률 장군에게 조르니 권 목사는 본래 충신의 근신함을 믿어왔고 지금 그 명쾌함을 장하게 여겨 장게 한통을 자세히 써서 단단히 봉하고 또 편지 한통을 써서 봉하여 충신에게 주며 “이 장게는 임군께 올리는 것이고 이 편지는 지금 행재소에 호종하여 있는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가는 편지이다. 이항복은 나의 사위인데 인품이 강명 정직하여 가히 알아 둘만한 사람이니라. 그에게 편지를 전하고 이 장게를 상감께 바치라고 하여라. 그렇지만 네가 능히 도착할지 모르겠구나” 하니 정충신은 아무 말 없이 장게와 편지를 받아들고는 “이틀 후에 떠날 터이니 그런 줄로 통촉하십시오”라고 인사를 드린 뒤 자기 집으로 물러갔다. 자기 집에 돌아 온 정충신은 장게와 편지를 뜯어 가지고 칼로 쭉쭉 잘라 노끈을 꼬아 그 노끈으로 망탱이를 만들어 그 안에 헐어 못쓰게 되어버린 옷 두어 가지를 넣고 나서 옷 나무 밭에 가서 옷 나무를 잘라 생 옷을 내어 얼굴과 몸에 바르고 다 떨어진 옷으로 살만 가린 뒤 짚신과 미투리 한 짝을 양 발에 신고 바가지 하나를 꿰어 차고 망탱이를 둘러메고 막대기 하나를 짚고 헝클어진 머리를 하니 그 모습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라. 충신의 부친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충신의 모친은 살아 계시매 그 아들의 차림을 보고 붙들고 울며 말했다. “너 혼자 어디로 피난을 가느냐. 피난을 가면 그냥 갈 것이지 그 차림이 무엇이냐?”하고 물으니 정 충신은 “아니올시다. 어머님을 버리고 저 혼자 피난을 갈리 있겠습니까. 나라일로 사또의 심부름을 가는 것이니 어머님은 제가 있으나 없으나 사또께서 극진히 보호해주실 터이오니 저는 걱정 하시지 말고 편안히 계십시오”라고 말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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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월매향이 반한 출중한 용모…늦은 밤 찾아온 월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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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와 비자의 꿈…남산 백호와 금성산 청룡을 보다
-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1] 일세(一世)에 공헌이 많은 위인(偉人)이나 이인(異人)은 반듯이 일원성진(日月星辰)의 정채(精彩)와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타고 나는 법(法)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순후하여 그 기운을 타고 나는 특이한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으나 그중에 명장은 그리 많지 못하니 대저(大低) 고구려 때의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과 연개소문(淵蓋蘇文)장군, 고려 때의 강감찬(姜邯贊)장군, 조선(朝鮮)의 이순신(李舜臣)장군 등과 같이 혜성(彗星)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으니 이가 곧 정충신(鄭忠信)장군이다. 정충신 장군은 조선의 선조대왕(宣祖大王)때에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이 광주 좌수로 있을 때에 향청(鄕廳)에 들어가 무슨 일을 의논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향청에서 혼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그 향청 앞에 있는 남산의 한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기세(氣勢)가 영악(擰惡)한 백호(白毫)한 마리가 나와 좌수에게 달려들었다. 좌수는 꿈속에서 겁을 내어 정신이 없던 중에 꿈을 깨어 전전반신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또 꿈을 꾸기를 향청 뒤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의 한가운데가 갈라지면서 이번에는 광채가 영롱한 청룡(靑龍)한 마리가 나오며 또 자기에게로 달려든다. 좌수는 겁이나 일어나 앉았지만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는 유월 보름이라 달빛이 교교(皎皎)함을 인연하여 뜰에 내려와 거닐며 꿈 생각을 하는데 언 듯 보건대 향청 마루 구석에 누가 누워 자는 모양이라 정 좌수는 이상히 여겨 옆에 다가가서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관청에서 물을 긷는 비자(婢子)였다. 그 비자는 관청에서 들어와 물을 긷다 몸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집에 나가지 않고 향청 마루에서 자는데 그 비자도 꿈에 남산의 백호와 금성산의 청룡을 보고 놀라 깨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눠워 있는 때라 그 여자를 본 정 좌수는 마음이 홀연히 움직여 금제(禁制)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여자에게 화합하기를 요구하여 용납함을 받았으니 대저 그 여자는 지조가 없음이 아니라 명인(名人)을 잉태할 때라 자기의 마음이 아니고 천신(天神)의 지도하에 저절로 화합된 것이리라. 그 여자는 일찍 부모를 여위고 형제도 없이 고독단신으로 이곳에서 비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정직하나 용모가 추비하여 사랑스럽게 보는 남자가 없음으로 나이가 이십여 살이 되도록 관청에서 물 긷는 천역을 하면서도 몸을 남에게 허락한 일이 없었다가 지금 우연히 정 좌수에게 정을 바치게 된 것이다. 그 비자는 그 날에 곧 수태하여 삼삭만에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곧 정 충신이다. 정 충신은 차차 자랄수록 총명(聰明) 영리(榮利)하고 종용(從容) 정대(正大)하여 골격이 비범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6~7세부터 동리 글방에 가서 글을 배워 읽는 여가에 놀고 회룡하는 거동을 보건데 진 치고 군사 쓰는 법을 좋아하며 의사가 깊고 도량이 넓어서 장수의 기상이라 보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광주 목사는 정 충신이 잘 생겼다 함을 듣고 불러 들여 보았으나 보통 사람의 지감으로 영웅의 자격이야 어찌 알았으리오만 용모가 수려하고 단정함을 대단히 칭찬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목사의 생일 되어서 성대히 잔치를 베풀었다. 목사는 정충신의 기이한 용모를 생각하고 충신의 집으로 남은 음식을 보내었는지라 충신의 모친은 은혜를 치사하고 음식을 두었다가 글 읽고 돌아오는 충신을 주니 충신은 먹지 않고 음식의 출처를 묻는다. 그 모친은 바른대로 사또의 생신에 자린 음식인데 사또께서 상을 물려 네게 내린 음식이라고 일러 주었다. 충신은 엄연한 기색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밀어 놓으며 “대장부가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오리까?” 하며 다른 찬밥을 달라하여 먹으니 그 모친은 아들의 나이는 비록 어리나 지기(志氣)가 극히 높음을 아는고로 오히려 미안함을 느껴 다시 권하지 못하고 그 다음부터는 숫 음식이 아닌 것을 감히 주지 못하였다. 충신은 나이 12세가 되었는데 처지로 말하면 고려(高麗) 명장(名將) 정지(鄭地) 경열공(景說公)의 9대손이나 지금은 영낙하여 미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인품은 보지 않고 문별만 쓰려는 당시의 우리나라에서 충신과 같은 사람이 발신 되어 세상에 나가는 도리가 있겠는가? 충신은 부모가 지도하는 대로 통인(通人) 안책(案冊)에 착명하여 관가에 들어가 일 하였으니 충신의 지조(志操)와 기개(氣槪)로 차라리 농민이 될지언정 그런 천억에 복종하지 않을 듯 하지만 마음에 별다른 배포가 있는지 아무 사색 없이 통인 노릇을 했다. 그때는 선조대왕 임진년(壬辰年)이라 일본 관백(關伯)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또한 한때의 간응으로써 제인군을 제어하고 정사를 자기 독단으로 처리하던 바 조그마한 삶속에서 천하를 통합할 마음으로 우리나라 풍속과 정세를 염탐한지 10년 만에 명나라를 칠 터이니 우리나라 조정에 군사 행활 길을 빌려 달라 하였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의논하기를 “윗 나라를 범하려 하는데 어찌 길을 열어 주리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풍신수길은 크게 노하여 십년 동안 훈련시키고 양성하였던 군사 10만과 전선 천척을 조발하여 소서행장과 가동청정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침범하게 하닌 그 형세가 심히 맹렬하고 또 화란 사람에게서 배워 온 조총을 사용하였으니 그 기세가 컸다. 그동안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당쟁만을 일삼았으므로 별안간 이런 병란을 당하여 어찌 능히 대적 하겠는가? 그러함에 감히 막아 싸워보려는 생각도 못하고 달아나기만이 위주요 혹시 비분강개한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웠으나 다만 분사 할 뿐 공을 이루지 못해 팔도가 어육이요 백성들의 희생뿐이었다. 적 군사 한 갈래가 조령을 넘어 충주 달천강에서 곧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어오매 선조대왕께서는 조정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 하실 때에 어떤 신하는 도성을 지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옳다 하고, 어떤 신하는 파천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강토를 회복하자고 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울을 지킬 힘이 없으매 파천하자는 말을 좇아 밤을 도와 비를 맞으며 의주에 파천하셨던 바 적 군사는 도성을 점령한 후 군사를 나누어 한 떼는 도성을 지키고 한 떼는 대가를 쫓아 가다 무슨 염려가 있었던지 평양에 이르러서는 더 나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적 군사가 쫓아 올 것을 염려하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고 일변 시세가 급박하면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때 광주 목사는 권률이였고 정충신은 통인으로 권 목사의 시종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적병이 물밀 듯 들어와 광주성을 휩싸 권 목사가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니 정충신은 적군의 전황을 정탐하겠다고 자원해서 나섰다. 나이 겨우 열일곱 살된 아이가 어른도 하기 어려운 적군의 동정을 살핀다고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권 목사는 정탐의 어려움을 들어 정충신의 요청을 물리쳤다. 그러나 정충신은 어리지만 자신을 가지고 굳게 먹은 마음인지라 아무 말하지 아니하고 밤이면 적군의 진중에 들어가 군사의 배치와 군량에 관한 일무기 수효 등을 낱낱이 적바림하고 낮에는 뒷산에 숨어 적군의 동정을 세세히 살폈다. 나이 불과 열일곱의 어린 나이요 글뿐 아니라 한낱 좌수의 아들 통인이라 군사를 거느려 적군을 칠 수는 없으나 비범 영특한 천질은 적군을 물리치는 성산이 어린 마음에 자리 잡혀졌다. 정충신은 갑옷투구에 무장을 하고 나서는 권 목사를 당돌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또! 오늘은 적병이 이리이리 움직이니 이렇게 하십시오” 권 목사는 처음에 그 당돌함이 어이없고 더구나 어린 아이 말이라 믿음직 스럽지는 못하였으나 자기의 의사와 거의 방불하므로 정충신의 가르침대로 시험 삼아 실행하여 보니 오히려 싸운 전적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공이 더 컸다. 권 목사는 한두 번 정충신의 말대로 해본 뒤에 비로소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았다. 싸움이 거듭되는 동안 광주 싸움은 다행히 권 목사가 크게 이겨 적병이 조수물 빠지듯 물러가니 정충신은 적군의 진터를 샅샅이 살피며 돌아 다녔다. 백성들은 이미 피난을 가서 텅 비어 있고 난리에 수라장이 된 마을 가운데 서서 정충신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 중의 문짝이 떨어지고 다른 집들과 비슷하게 헐어버린 집으로 썩 들어섰다. 서슴없이 안마당을 지나 부엌문을 열고 다시 뒤뜰로 돌아가니 조그마한 장독대 아래 커다란 독이 떨어져서 엎어져 있었다. 잠깐 바라본 정충신은 힘껏 활을 당겨 독을 쏘았다. 앵 소리를 치며 시위에서 날아가 독을 마치자 독은 갈라지고 비명과 함께 난데없는 사람이 나동그라졌다. 소년 정충신은 칼을 빼어들고 쫓아 들어가 선뜻 그 머리를 베었으니 그는 적의 괴수였다. 정충신은 벤 적장의 머리를 들고 달음질쳐 삼문으로 들어갔다. “사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왔습니다” 정충신의 손에 들린 머리를 본 권 목사는 놀라서 그 전말을 묻는다. “너 그것이 웬것이냐?” 정충신이 자세히 앞뒤 사유를 이야기하여 바치니 권 목사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허허 아깝다. 네가 한낱 좌수의 아들로 태어나다니” 이렇게 애석히 여겼으니 문벌만 숭상하는 당시 조정에서 이러한 훌륭한 동량의 제목을 잘 성취시켜 거두어 쓸런지 의심스런 일이며 천리마가 임자가 없어 마구간에서 썩고 기린이 초토에 그대로 늙을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이 뒤로부터 권 목사는 정충신을 보통 다른 통인들보다 다르게 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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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와 비자의 꿈…남산 백호와 금성산 청룡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