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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기고] 일본에서 논란중인 고향납세제도||장명식/국회의원 문석호 사무실 비서
    재경위 소속 국회의원을 모시고 있어서일까? 최근 일본에서는 주민세 등 세금과 관련해 “현재 거주하는 지방자치단체에만 꼭 납부해야 하나”,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에서 세금을 사용하게 할 수 없나” 하는 등의 납세자의 작은 의문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관심이 쏠린다. 지금 일본에서 논란의 대상은 바로 고향납세(故鄕納稅)제도이다. 지방세 중 일부를 납세자가 지정하는 고향 등에 납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며, 도시와 지방간의 극심한 재정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의 하나로, 또 아베 총리가 “고향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각 지방자치단체 간에도 고향납세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운 상황이며, 이시하라 도쿄도지사는 도시지역의 의견을 대표해 “행정의 수요는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 다르다”며 반대하고 있다. 일본의 지방세인 개인주민세는 1월1일을 기준으로 거주지 지방자치단체에 납부되고 있으나, 그 일부인 주민세의 10%를 거주지가 아닌 자신의 출신지에 납부하게 하자는 것이 고향납세제의 핵심 내용이다. 그 장점으론 첫째 인구감소가 계속되어 지역 간의 경제격차·세원격차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 가운데, 인구감소로 인해 고민하는 지방의 세원을 늘려 재정격차를 줄이는 재원배분의 효과가 있다. 둘째 납세자가 태어나 성장한 지역의 자치단체가 부담한 교육비와 복지비용 등에 대한 환원시스템으로서의 기능도 가능하다. 셋째 납세자가 성장하면서 그 지역을 벗어나도 그 지역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고향납세제도의 단점 및 비판으론 첫째 ‘고향’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으며 둘째 지방세상의 원칙인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즉 행정서비스를 받는 주민이 조세를 부담한다는 수익자부담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또 근본적인 지역 활성화, 지역 경제격차의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지방교부세와의 관계상의 문제. 즉 현행 지방교부금제도로도 대도시와 세수가 적은 지방자치단체와의 재정격차를 줄이고 있는데, 굳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고향납세제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효(孝)사상과 어울리는 제도로서 원칙적인 그 취지는 바람직하며, 첫째 중앙정부의 강력한 의지, 둘째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 셋째 재정이 빈약한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지지 등을 고려하면 그 도입가능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행정서비스를 받는 주민이 조세를 부담한다는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조세체계에 있어서는 부작용의 소지가 없지 않다고 보여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도입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조세와 관련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혹은 지방자치단체 상호 간 갈등이 최근 빈번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예컨대 공동재산세와 관련된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 강화와 거래세(취득세·등록세) 인하와 관련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및 특별교부세제도와 관련된 갈등 등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점들이 아직 미해결인 상태에서 고향납세제도까지 도입할 경우 또다시 갈등의 빌미를 제공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지방세인 주민세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 체계와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율등의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 발상자체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할 것인지를 신중히 검토하고 준비해야 할 시점인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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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16
  • 누가 시대의 혼을 불러낼 적임잔가||정영권의 세상 엿보기
    때가 때니만큼 대선 이야기 한번 해볼까한다. 말해두자면,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선 때 내가 찍은 후보는 아직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마저도 애써 꼽아보아야 겨우 기억이 나는 건 한 번도 흔쾌히 표를 던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예상과 기대에서 크게 벗어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치에 무관심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난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편으로서, 선거 때마다 그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누가 '대권'을 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토대가 달라지고 내 삶의 행로가 달라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기실 많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곗바늘을 이삼십 년만 되돌려놓고 한번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때에 비하면 거의 천국이요 가히 자유의 왕국이다. 요즘 세상에 할 수 없는 게 무엇인가? 단, 쩐만 있다면. 문제는 역시 돈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펼쳐진 자유의 왕국에서 옛날의 속박을 잊고 차라리 옛 시절이 그립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 부류다. 하나는 그 시절에도 속박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속박하며 그들만의 자유를 구가하던 특권층 또는 그에 빌붙어 떡고물을 받아먹던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얼어뒈질 자유로 밥을 해먹을 것인가, 국을 끓여먹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 시대의 밑바닥 민초들이다. 전자의 특권층과 그 아류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빤하니 접어두고, 후자의 민초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국민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민초들의 의식을 제대로 짚을 때 이번 대선의 답이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살려면 따라오라는 협박이든, 혹세무민의 선동이든, 아니면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든, 민초들의 의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자만이 대권을 잡을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그만큼 세상은 달라진다. 850만 비정규직, 수십만 청년을 포함한 100만 실업자, 수백만 잠재실업자로 대표되는 이 시대 밑바닥 민초들의 눈에 지난 20년간의 자유의 확대는 사실상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특히 IMF 신탁통치 이후의 10년은 배반의 시대였다. 기를 써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대였다. 정치인과 관료와 학자들은 곧 좋아질 거라고, 허리띠 동여매고서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설레발을 치더니, 언제부턴가는 스스로 미래를 내다보며 능력을 갈고 닦으라고 말을 바꾸었다. 아무런 뒷받침도 없이 도전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세상은 더불어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사람들은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괜찮은 자리는 이미 약빠른 이들이 다 차지했고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 다음 자리라도 차지해보려고 눈에 불을 켜보지만 경쟁이 어마어마하다. 남을 밟아 죽이고 올라서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마땅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이들에게 우리가 더불어 사는 인간임을 확인하며 위엄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해줄 방책은 무엇일까? 협박이든 궤변이든 선동이든 진심이든 이 답을 민초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해줄 수 있는 이에게 아마도 대권은 갈 것이고, 만일 민초들이 협박이나 궤변이나 선동에 넘어간다면 앞으로 5년간 그만큼 더 고생을 할 것이며, 진심에 감동하여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기로 작정한다면 그때는 인류의 새 역사를 써가게 될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돼왔다. 끝없는 축적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욕망은 비록 약간의 굽이는 있었지만 노동을 줄기차게 배제해왔고, 역시 약간의 굽이는 있겠지만 앞으로도 그 경향은 가속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이미 자본 운동의 중심부에 깊숙이 편입돼 있고, 일시적 방책으로 그 경향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개발지상주의, 세계화와 무한경쟁에 입각한 방책은-한반도 대운하든, 백만 해외일꾼이든, 개성공단이든, 대륙철도든, 문화 메카든, 대단위 골프장이든-그 어느 것도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가 되리라는 것이다. 나만 잘 살고 남들은 죽어도 괜찮다는 것은 옳지도 못할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관건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의 축적욕과 이윤욕을 순치시키고 어떻게 그 과실과 일자리를 나누고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가면서 다가오는 대파국에 대비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민초들에게 어떻게 전하며 그 혼을 불러일으키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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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10
  • 달콤한 삶의 축제 '거리공연'||독자기고-신미자(읍내동 벌룬파티스쿨 사장)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도 될 만큼 한가로운 표정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간이 방석을 든 이도 있었다. 금요일 밤의 유혹을 견디다 못해 소리소문없이 무려 5백여명이나 모였다. 언뜻 차림새만 보면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더위를 피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찾은 공원에서는 작은 음악회의 조용한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한여름 밤 예술의 향연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한국무용의 춤사위 성찬에 푹 빠져 버렸다. 가냘픈 듯 힘 있고 유연한 몸짓의 환상적인 線의 예술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또한, 판소리의 흥겨운 목 넘김에 흠뻑 취한 나머지 제법 '얼쑤~' '좋다~' 는 추임새까지 넣을 줄도 안다. 환상의 앙상블 '낭만공연' '거문고, 가야금, 대금, 태평소…' '키타, 드럼, 섹소폰, 건반…'의 퓨젼(fusion)하모니를 이룬 선율은 마음을 파고들었다. 세살아기의 서투른 발걸음에서 팔순의 어르신까지 '0380 달콤한 페스티벌'이다. 전통음악에서 가요, 클래식에서 팝송, 재즈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소리의 향연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우아한 앙상블이다. 공연이 계속될수록 흥분한 박수소리는 커져만 가고 무대와 객석이 무한한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매주 금요일마다 지역 예술인들의 다양한 장르와 소리에 흠뻑 취해 버린 서산시청 앞 '거리공연장'의 생경한 느낌이다. 예술인들은 아름다운 공연이 끝난 뒤 그칠 줄 모르는 관객들의 환성과 기립박수의 커튼콜(curtain-call)에 앙코르공연으로 화답하기도 한다. 갑작스레 수준 높은 문화인으로 업그레이드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진 유명 예술인들의 공연이 부럽지 않았다. 야외공연은 값비싼 공연장에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속도전쟁의 일상생활 속에서 공연문화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공연하면 일반적으로 비싸고 품위있는 상류사회의 전유물 정도로 인식되어져 있다. 하지만,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문화에 대한 욕구는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여러 도시들이 시민들의 문화향수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하게 야외상설 공연문화를 확대하는 이유다.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이 문화소외계층을 위해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파격적으로 1000원의 입장료만 받고 수준 높은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수원의 '우리가락 우리마당 야외상설공연', 경기 양평의 '세계야외공연축제', 울산의 '금요문화마당', '춘천아트페스티벌', 홍련의 연꽃밭 전주 덕진공원의 '야외공연' 등 지자체마다 문화소비자를 향한 문화서비스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 향유의 시대이다. 문화가 생활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경쟁으로만 치닫는 사회다. 양극화, 실업률, 북핵, 국제금융쇼크, FTA 등으로 세상이 어지럽다. 이런 때일수록 문화비타민이 필요하다. '참 잘하네' '다음주가 기다려지네' 거리공연에 찬사를 보내는 어느 시민의 감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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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10
  • 특별논단 - 진실 또는 거짓||함정현 한서대 교직과 교수
    어느 대학의 한 여교수의 학력위조가 발단이 되어 세상이 가짜 사태로 어지러워졌다. 그 후, 굿모닝 팝스 진행자, 어려운 사람들 집을 고쳐주는 좋은 일을 하던 건축가 교수, 라디오 쇼 진행자, 한 때 최고의 미인배우였고 지금은 강단에 서는 여배우 그리고 배우, 감독과 스님까지 위조 사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얼마나 거짓이 만연해 있으면 국내외 기업이나 대학, 각 기관에서 재직 중이거나 구직 중인 해외 학위 취득자의 실제 학위 취득 여부에 대한 검증을 대행해주는 업체가 생겨나, 성행하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현실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설문 조사를 통해 확인해 본 바 설문에 응한 30-35%의 미국인 구직자들도 이력서 내용을 거짓으로 작성해 본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조 또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나쁜 것인가?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가? 칸트는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다. 칸트에 의하면 거짓말은 죄악이며 잘못이다. 거짓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진실은 “어떤 상황에서든 지킬 가치가 있는 절대 의무”이며, 근본적으로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규칙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진실 혹은 거짓이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슬픈 20세기를 사는 우리는 칸트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령, ‘화려한 휴가’에서 내가 한 민간인, 아니 동네 청년을 숨겨줬다고 해보자. 그 때 그를 추격중인 군인이 내게 묻는다. 도망가는 한 청년을 보지 못했느냐? 고. 나는 ‘그가 저기 숨어 있노라’고 사실대로 대답해야 할까? 아니다. 이때의 사실은 다른 말로 하면 범죄적인 밀고이다. 비록 내가 그를 숨겨 줬어도 아무도 못 봤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장켈레비치는 말한다. “범죄적인 밀고를 사랑보다 높이 사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어떤 정직은 메마른 진실, 증오스러운 진실, 선하지 못한 진실일 수 있다. 곧 죽을 사람에게 당신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 살아난 사람의 예도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게다가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일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절망적인 고문’을 더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도, 사실 인간은 거짓을 말하게 태어났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homo faber), 유희하는 존재(homo ludens)이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homo lingua)인 한, 인간은 거짓말 하는(homo mendax)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날 길 없다. “당신은 정직합니까?” 라고 하는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을까?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 그러면 거짓말해도 되는구나. 학력 위조도 괜찮고… 과연 그런가? 내 아이들에게 ‘아들아, 대학 안 다녀도 괜찮단다. 나중에 이력서에 어디 어디 출신이라고 그냥 기재하면 되잖아!’ 그렇게 가르칠 것인가? 그런 부모가 있을까? 아니다. 자신이 히틀러처럼 역사적 죄인이었어도 또는 자신이 도둑이고 강도라도, 부모라면 우리는 누구나 자식에게 정직을 가르치고 성실성을 교훈할 것이다. 언젠가 인신매매범이 왜 그런 흉악한 죄를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대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피아노를 사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라 로슈푸코가 말하는 바, 자기애, 이기심에 의한 기만과 위장은 거부해야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속이고, 감추고, 위장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연예인들 또는 교수들이 학력 위조를 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은 ‘궁색한 변명’보다는 사죄해야 한다. “이 사회에서 학력 콤플렉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아량도 없나”라고 반문한다면 뭔가 본질을 잘못 파악한 반응이다. 그러나 함부로 돌을 던지지는 말자. 돌을 던지기 전에 내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너나없이 잘못된 정보를 퍼 나르는 시대이다 보니 때로 위조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예도 있을 테니 선의의 피해자도 생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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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3
  • 특별기고 - 농촌에도 블루오션이 있다||이준정 한국농촌공사 서산태안지사장
    언제부턴가 기업들 사이에 블루오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기존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공간을 창출함으로써 기업경영을 혁신하자는 블루오션 전략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한국의 기업인들에게 새로운 복음처럼 들린다. 그럼 이와 같은 블루오션 전략이 농업과 농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블루오션 전략의 핵심은 ‘고객의 가치 창조’라는 전략을 통해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농업과 농촌은 거센 개방화의 물결 속에서 생존 방안에 주력하다보니 가지고 있는 많은 잠재적인 가치에 관심을 갖고 이를 도시민과 연결하는 데는 소홀했다. 농촌이 가지고 있는 쾌적함과 경관적 가치, 신선하고 친환경적인 농산물, 수천년을 이어온 문화유산, 신화와 전설, 특산물 등의 향토자원, 불교와 유교적 전통 등 다양한 유형적, 무형적 가치들이 그동안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치들에 대해 전략적 관점을 가지고 혁신을 이룬다면 농업과 농촌에 있어서도 많은 블루 오션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주5일 근무제의 확산과 웰빙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농촌관광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농촌에서는 지역민들이 자기마을을 홍보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지지체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각종 축제와 이벤트를 앞다퉈 개최하고 있다. 생산중심의 공간에서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서비스 제공의 공간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자녀들에게 각족 체험과 역사·문화 등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농촌관광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농촌 관광인구는 2001년 3,000만명에 불과하던 것이 오는 2011년이면 1억5,000만명까지 늘어나고 시장규모도 최고 9조원대로 성장할 전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농촌이 아직까지 다양성과 차별성 부족이라는 경쟁력 한계에 직면해 있으며 관광수익 구조도 취약하다는 점이다. 농촌은 이제 단순한 고향이 아니다. 하나의 상품이며 브랜드다.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식의 기존 관광인식으로는 안된다. 주민들의 의식에서 비롯해 독특한 고유상품 개발, 서비스 혁신까지 마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아이디어와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흔하게 있는 향토자원인 진흙을 이용해 전국적인 축제를 만들어가는 지자체가 있는가 하면, 농촌에 있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를 관광지로 조성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또한 IT기술과 주5일제 등의 사회적 트렌드를 활용, 사이버 팜이나 체험마을 등으로 ‘감성’의 틈새를 활용해 가치혁신에 성공한 마을들도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게임 산업, 드라마 산업 등에 우리 농촌의 판타지(Fantasy)를 가미하여 새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 낸다면 어떨까? 문화와 전통, 신화, 경관 등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의 농업과 농촌이 블루오션의 푸른 바다가 아닐까? 고령화와 과소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이지만 꿈과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시장을 찾고자 하면 블루오션의 푸른 바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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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3
  • -제언-예초기 사고에 주의합시다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라는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추석에는 성묘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하기 위해 각자 고향으로, 선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추석때쯤 뉴스나 신문을 보면 민족 대이동이라 하여 연일 톱으로 장식되어 명절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같은 날 뉴스에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예초기를 이용해 벌초를 하다가 발생되는 사고뉴스다. 보통 사람들은 예초기를 가볍게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초기로 인한 사고는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고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위험성도 있다. 한국소비자원 지난 28일 2005년부터 2007년 8월27일까지 예초기 관련사고 115건을 분석한 결과, 산소 벌초를 많이 하는 7∼9월에 전체 사고의 74.6%(85건)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는 통계를 낸 적이 있다. 그만큼 추석 벌초로 예초기가 가동되는 이때가 가장 주의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나는 농사를 짓고 있어 예초기를 많이 다루고 있는 편이다. 예초기는 칼날의 고속회전을 원리로 하고 있는데 보통의 사고는 칼날이 고속회전 하던 중 나무줄기와 돌맹이가 튀겨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바위 주변의 제초작업을 하다가 칼날이 돌에 부딪혀 칼날이 튀어오르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젊고 늙고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 소비자원이 발표한 같은 자료에는 연령별로 40∼50대의 사고가 56건(48.7%), 60세 이상 고령자 사고도 39건(33.9%)으로 상당수를 차지했다. 미숙함도 미숙함이지만 방심으로 인한 사고 발생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조상님의 귀한 묘에 잡초가 자라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쉽게 잡초제거를 할 수 있는 예초기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예초기를 사용할땐 꼭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보호장구를 꼭 착용해야 한다. 헬멧을 착용해 머리를 다치는 것을 막고 보호 안경을 통해 눈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보호덮개도 착용하여 마치 중세 전쟁터로 향하는 기사처럼 중무장을 해야 혹시 모를 사고에 큰 부상을 당하지 않게 된다. 둘째 예초기 칼날 회전을 알맞게 조절해야 한다. 급한 성격에 고속으로 놓고 예초기를 돌리면 그 돌아가는 관성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돌리는 것이 사고를 방지하는 길이다. 셋째 방심은 금물이다. 예초기와 같은 위험한 물건은 방심하는 즉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언제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방심을 억제해야 한다. 모처럼의 명절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화목하게 보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한 명절에 사고라도 입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저며올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농사를 지으며 예초기를 많이 돌리지만 아직도 돌아가는 칼날을 보면 긴장을 하게 된다. 오히려 예초기를 더 많이 다루는 사람이 이같은 기분을 더욱 느끼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하나 얘기하면 성묘하러 산에 올라갔을땐 가을독사를 조심해야 한다. 독이 한껏 올라 ‘가을’독사라고 계절이 앞에 붙은 이 독사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지뢰다. 산에 올라갈때는 되도록 장화를 신고 여러명이 함께 올라가야 한다. 독사뿐 아니라 말벌, 땅벌 등 산에는 온갖 위험한 것 투성이다.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모두 기다리고 나 역시 기다리고 있다. 이번 추석 뉴스에는 아무쪼록 예초기 사고뉴스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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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2
  • [애독자 편지] 지역신문 구독 캠페인 전개 필요
    서산타임즈를 창간 당시부터 구독해 온 한사람으로 주1회 발행을 지켜 보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이유는 설명 안해도 알 것 같습니다. 계속돼온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겠지요. 수준 높은 신문은 아니어도 좋은 신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엿보여 기분 좋은 신문인데…. 서산시나 서산시민들도 서산타임즈의 어려운 상황을 이제는 외면만 할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도 지역신문 한두개씩은 있는데 서산타임즈만한 신문은 보지 못했습니다. 혹여 이렇게 가다가 발행이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그럴리는 없을거라고 믿고 싶지만) 서산시나 서산시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서산타임즈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서산의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겁니다. 지난 2년여 동안 서산타임즈는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신문 거의 대부분이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산타임즈가 적자를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서산타임즈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지만 지역신문 구독하기 캠페인이나 그옛날 동아일보를 살리기 위해 국민이 개인적으로 광고를 냈던 것과 같은 방법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서산타임즈도 보다 적극적으로 자구책 마련에 나섰으면 합니다. 시민주 공모나 후원회 같은 것을 구상하면 동참하려고 하는데 소식이 없군요. 무슨 사정이 있는건지…. 저는 서산타임즈를 애독하는 애독자이면서 열렬한 팬입니다. 제 주변에도 서산타임즈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힘드시겠지만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엊그제 술자리에서 서산타임즈가 화제가 됐었는데 결론은 서산타임즈를 서산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키워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어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어떤 계기만 마련된다면 많은 시민들이 서산타임즈를 살리는데 동참할 것이라 믿습니다. 힘 내십시오!<읍내동 애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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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26
  • ▣옥녀봉▣ 어리석음(癡)에서 벗어나자||도신ㆍ서광사 주지/서산시사암불교연합회장
    요즘 우리 인간들의 생활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우며 고통과 불행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잘 사는 사람이라 하여도 고통과 근심 걱정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생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우며, 또한 고통스러운 것인가? 불교에서의 해답은 명쾌하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유인즉,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인생의 올바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생의 원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여 올바른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고, 스스로 욕망과 감정, 집착에 빠져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어리석음(癡)에서 벗어날 줄 모르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어리석음을 더하는 짓만을 하게 되는 것이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 평화롭다거나 자유스럽지 못하고 불안과 고통이 떠나지 않고 매사가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불만과 걱정이 쌓이게 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사리를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욕망에 빠져 어리석은 행위를 하게 된다.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말이 있다.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일이 오히려 근심거리를 불러들이느니라. 자기욕망에 따라 악을 행하여 스스로 큰 재앙을 받느니라. 악한 업을 지은 뒤에 그 갚음을 받아 스스로 뉘우치며 눈물을 흘려 슬퍼하나니 그 결과는 어디서 온 것이겠는가?" 지금 우리는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욕에 빠져서 스스로 고통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니라"고 가르친다. 첫째는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에 빠지는 것이다. 한번 재물에 정신이 빠지면 걷잡지 못한다. 세상에는 돈과 물질을 탐하다가 신세를 망치고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황금보기를 돌이나 오물같이 보라고 했다. 둘째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쾌락의 욕망이다. 이성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문란한 성(性)관계로 패가망신하는 경우이다. 소위 상사병이라는 것이 이로 인해 생기는 것이며, 이 병에 한번 걸리면 백약이 무효라 하지 않던가? 사람은 자기욕망대로 하지 못하면 그것이 한(恨)이 되어 가슴에 쌓이고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그 한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좀 아이러니한 얘기가 있다. 예전에 어떤 부잣집 외동딸이 자기가 다니는 절에 잘 생긴 젊은 스님을 짝사랑하다가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게 생겼더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니 얼굴을 한번 보자고 청하였으나 스님은 끝내 만나주지를 않았다. 결국 처녀는 상사병으로 죽어 호랑이가 되어 산중의 큰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 스님을 찾아가 밤중에 물어다가 산속에 눕혀놓고 그 잘난 남자의 상징물을 똑 따가서 그 스님은 죽고 말았다는 웃지못할 이야기이다. 다음은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몸에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먹는 것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그저 마구 먹어대고는 몸이 비대해져서 인생살이에 스스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할 때도 더러 있다.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망이다. 인간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가급적이면 훌륭한 이름을 세상에 남기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욕망이다. 원래 사람의 좋은 이름은 자기가 이름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묵묵히 할 일을 다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았을 때, 자연히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끝으로 잠에 대한 욕망이다. 또는 편하게 살려는 욕망이다. 모든 중생은 먹고 자는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인간은 잠에 대한 욕망이 넓고 크다. 잠을 자더라도 정신은 깨어 있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갖가지 욕망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잘해 나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거짓과 위선위악의 번뇌 망상이 들끓고 있어서 제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점점 더 어리석음에 빠져들고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옛말에 "항상 참을 내(耐) 한 자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산에 오르려면 위험한 길을 참고 걸어야 하고, 눈 위를 걸으려면 위험한 다리도 참고 걸어야 한다"고 했다. 참을 내라는 글자 하나를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있어야만 가시덤불에 걸리지 않으며 어떠한 모함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졌음을 크게 깨닫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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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25
  • [특별기고] 이제는 매니페스토 정책 선거다||유영근 서산시 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각 정당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대통령 후보 경선을 마친 정당도 있고 막 창당해서 경선을 준비하는 정당도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연일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국민들에게 필요한 대선 입후보 예정자들의 정책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상황을 보면 지난 5.31 지방선거부터 시민단체와 언론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유권자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매니페스토 정책선거 분위기가 정치권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반면 국민들의 일상생활에는 점점 더 매니페스토 정책대결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초등학교, 대학교 할 것 없이 학생회장선거에 매니페스토 정책선거를 펼친 후보자가 당선이 되고 있고, 지난 4월에는 어느 결혼식에서 신혼부부가 혼인서약 대신 매니페스토형 결혼공약서를 발표ㆍ교환하고 결혼식을 지켜보는 하객들 앞에서 서로 간에 평생 이를 실천하기로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학생들도 평생 자기가 지키고자하는 약속을 나뭇잎 모양의 카드에 실명으로 작성해 다른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게시하는 등 우리 주변에서 매니페스토는 점점 생활화 되어가고 있다. 지난 19일에 실시한 한나라당 경선 외에도 자기 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각 정당의 경선이 진행 또는 준비 중이다. 각 후보자들은 미래를 구상하고 국민의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책공약을 개발하여 정책으로 경쟁하고 선택받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도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는 행태에서 벗어나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매니페스토 정책공약을 공정하게 판단하여 가장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임기동안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는지 지켜보고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오는 제17대 대통령선거는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선거로 어느 선거보다 정책경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각 당의 대통령후보 경선뿐만 아니라 12월 19일에 실시하는 대통령선거도 정책들이 경쟁하고 꽃피우는 축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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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25
  • 정영권의 세상 엿보기||남ㆍ북 정상회담 유감(遺憾)
    답방 약속을 어긴 평양 정상회담 제의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남북 관계가 얼어붙었을까? 아니면 망신당한 북한의 몽니로 여의도 주식시장이 출렁거렸을까? 설마 그랬을지언정, 평양행 열차에 몸을 실은 노무현 대통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대선을 4개월여 남겨둔 상황에서 뚜렷한 의제도 없이 추진된 남북정상회담. 국민의 절대적인 지원도 없는 평양 정상회담으로는 한반도에 감동을 줄 수 없다. ▲안 되는 회담을 끌려가며 하자는 것 ▲민족을 앞세워 정략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려는 의도 ▲이번엔 얼마나 갖다 바칠까? ▲다음 정권에 짐을 지울 것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아 가며 회담을 하려는 것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굳이 하려면 이번엔 서울이어야 하는 게 백번 마땅하다. 우리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실현한 후 북한을 실질적으로 우리와 대등한 국가로 취급해 왔다. 그렇다면 더구나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최소한의 격식이 요청된다. 특히 의전에서는 엄격한 상호주의가 적용된다. 평양 정상회담이 발표되던 날 필자는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단연 화두는 평양회담 소식이었다. 이들은 이번 회담에 대해 “참으로 어색한 만남”, “너무 때늦은 만남” 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6자회담 협의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서울답방이 그토록 중요한 사안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의 해외 방문은 공식적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전부다. 그만큼 김위원장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확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그가 광화문 네거리를 환호 받으며 지나가려면 우선 북한 군부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남한 보수층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남북한을 가로막는 양대 강경기류를 설득하는 가장 큰 사건이자 초대형 ‘평화메시지’임에 틀림없다. 또 워싱턴의 백악관과 펜타곤에 던지는 우리의 외교력과 민족 자부심은 어떻겠는가? 외신들은 뭐라 하겠는가? 콘돌리자 라이스 보좌관의 입이 딱 벌어지게 하는 것, 그런 자주외교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게 ‘김정일 서울답방’이다. 2차 평양 회담은 이런 획기적인 카드를 날려 버렸다. 7년 전 평양회담 이후 대북뒷거래로 5억달러가 송금된 사실을 노무현 정부에서 특검을 통해 밝혀냈다.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아직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 아름답지 못했던 노벨상 수상에 대한 단상도 있다. 단언컨대 남북 정상들이 악수를 하며 부둥켜안아도 감격의 눈물을 흘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0년 6월의 1차 남북 평양 정상회담 결과가 북의 핵실험이었다는 걸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퍼주었건만 북은 남한을 배제한 채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기존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고 있다. 당시의 현란한 말잔치에도 불구하고 퍼주기와 이산가족 상봉 등이 일부 실행됐을 뿐 북한의 개혁 개방 같은 근본적 변화를 끌어내진 못했다. 필자는 2차 정상회담이 노리는 정치수가 있다면 그것은 야당이 아닌 여당의 집결을 위한 것이라 판단한다. 분명히 정략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특히 평화체제 문제는 지리멸렬 상태의 범여권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단, 남북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어떠한 형태의 교환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작정 거는 기대는 금물이다. 개성공단부터 전반적인 남북경협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가를 생각할 때, 또한 자칫 남북 관계 변화에 따라 보장받을 수도 없는 투자를 생각했을 땐 섣부른 판단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지켜야 하지만 구걸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구걸할수록 멀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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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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