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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와 비자의 꿈…남산 백호와 금성산 청룡을 보다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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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0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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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정충신 사적비.jpg
▲충무공 정충신 사적비.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에 세워져 있다.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1]

 

일세(一世)에 공헌이 많은 위인(偉人)이나 이인(異人)은 반듯이 일원성진(日月星辰)의 정채(精彩)와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타고 나는 법(法)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순후하여 그 기운을 타고 나는 특이한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으나 그중에 명장은 그리 많지 못하니 대저(大低) 고구려 때의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과 연개소문(淵蓋蘇文)장군, 고려 때의 강감찬(姜邯贊)장군, 조선(朝鮮)의 이순신(李舜臣)장군 등과 같이 혜성(彗星)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으니 이가 곧 정충신(鄭忠信)장군이다.

 

정충신 장군은 조선의 선조대왕(宣祖大王)때에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이 광주 좌수로 있을 때에 향청(鄕廳)에 들어가 무슨 일을 의논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향청에서 혼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그 향청 앞에 있는 남산의 한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기세(氣勢)가 영악(擰惡)한 백호(白毫)한 마리가 나와 좌수에게 달려들었다.

 

좌수는 꿈속에서 겁을 내어 정신이 없던 중에 꿈을 깨어 전전반신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또 꿈을 꾸기를 향청 뒤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의 한가운데가 갈라지면서 이번에는 광채가 영롱한 청룡(靑龍)한 마리가 나오며 또 자기에게로 달려든다.

좌수는 겁이나 일어나 앉았지만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는 유월 보름이라 달빛이 교교(皎皎)함을 인연하여 뜰에 내려와 거닐며 꿈 생각을 하는데 언 듯 보건대 향청 마루 구석에 누가 누워 자는 모양이라 정 좌수는 이상히 여겨 옆에 다가가서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관청에서 물을 긷는 비자(婢子)였다.

 

그 비자는 관청에서 들어와 물을 긷다 몸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집에 나가지 않고 향청 마루에서 자는데 그 비자도 꿈에 남산의 백호와 금성산의 청룡을 보고 놀라 깨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눠워 있는 때라 그 여자를 본 정 좌수는 마음이 홀연히 움직여 금제(禁制)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여자에게 화합하기를 요구하여 용납함을 받았으니 대저 그 여자는 지조가 없음이 아니라 명인(名人)을 잉태할 때라 자기의 마음이 아니고 천신(天神)의 지도하에 저절로 화합된 것이리라.

 

그 여자는 일찍 부모를 여위고 형제도 없이 고독단신으로 이곳에서 비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정직하나 용모가 추비하여 사랑스럽게 보는 남자가 없음으로 나이가 이십여 살이 되도록 관청에서 물 긷는 천역을 하면서도 몸을 남에게 허락한 일이 없었다가 지금 우연히 정 좌수에게 정을 바치게 된 것이다. 그 비자는 그 날에 곧 수태하여 삼삭만에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곧 정 충신이다.

 

정 충신은 차차 자랄수록 총명(聰明) 영리(榮利)하고 종용(從容) 정대(正大)하여 골격이 비범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6~7세부터 동리 글방에 가서 글을 배워 읽는 여가에 놀고 회룡하는 거동을 보건데 진 치고 군사 쓰는 법을 좋아하며 의사가 깊고 도량이 넓어서 장수의 기상이라 보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광주 목사는 정 충신이 잘 생겼다 함을 듣고 불러 들여 보았으나 보통 사람의 지감으로 영웅의 자격이야 어찌 알았으리오만 용모가 수려하고 단정함을 대단히 칭찬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목사의 생일 되어서 성대히 잔치를 베풀었다. 목사는 정충신의 기이한 용모를 생각하고 충신의 집으로 남은 음식을 보내었는지라 충신의 모친은 은혜를 치사하고 음식을 두었다가 글 읽고 돌아오는 충신을 주니 충신은 먹지 않고 음식의 출처를 묻는다. 그 모친은 바른대로 사또의 생신에 자린 음식인데 사또께서 상을 물려 네게 내린 음식이라고 일러 주었다.

 

충신은 엄연한 기색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밀어 놓으며 “대장부가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오리까?” 하며 다른 찬밥을 달라하여 먹으니 그 모친은 아들의 나이는 비록 어리나 지기(志氣)가 극히 높음을 아는고로 오히려 미안함을 느껴 다시 권하지 못하고 그 다음부터는 숫 음식이 아닌 것을 감히 주지 못하였다.

 

충신은 나이 12세가 되었는데 처지로 말하면 고려(高麗) 명장(名將) 정지(鄭地) 경열공(景說公)의 9대손이나 지금은 영낙하여 미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인품은 보지 않고 문별만 쓰려는 당시의 우리나라에서 충신과 같은 사람이 발신 되어 세상에 나가는 도리가 있겠는가?

 

충신은 부모가 지도하는 대로 통인(通人) 안책(案冊)에 착명하여 관가에 들어가 일 하였으니 충신의 지조(志操)와 기개(氣槪)로 차라리 농민이 될지언정 그런 천억에 복종하지 않을 듯 하지만 마음에 별다른 배포가 있는지 아무 사색 없이 통인 노릇을 했다.

 

그때는 선조대왕 임진년(壬辰年)이라 일본 관백(關伯)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또한 한때의 간응으로써 제인군을 제어하고 정사를 자기 독단으로 처리하던 바 조그마한 삶속에서 천하를 통합할 마음으로 우리나라 풍속과 정세를 염탐한지 10년 만에 명나라를 칠 터이니 우리나라 조정에 군사 행활 길을 빌려 달라 하였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의논하기를 “윗 나라를 범하려 하는데 어찌 길을 열어 주리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풍신수길은 크게 노하여 십년 동안 훈련시키고 양성하였던 군사 10만과 전선 천척을 조발하여 소서행장과 가동청정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침범하게 하닌 그 형세가 심히 맹렬하고 또 화란 사람에게서 배워 온 조총을 사용하였으니 그 기세가 컸다.

 

그동안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당쟁만을 일삼았으므로 별안간 이런 병란을 당하여 어찌 능히 대적 하겠는가? 그러함에 감히 막아 싸워보려는 생각도 못하고 달아나기만이 위주요 혹시 비분강개한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웠으나 다만 분사 할 뿐 공을 이루지 못해 팔도가 어육이요 백성들의 희생뿐이었다. 적 군사 한 갈래가 조령을 넘어 충주 달천강에서 곧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어오매 선조대왕께서는 조정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 하실 때에 어떤 신하는 도성을 지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옳다 하고, 어떤 신하는 파천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강토를 회복하자고 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울을 지킬 힘이 없으매 파천하자는 말을 좇아 밤을 도와 비를 맞으며 의주에 파천하셨던 바 적 군사는 도성을 점령한 후 군사를 나누어 한 떼는 도성을 지키고 한 떼는 대가를 쫓아 가다 무슨 염려가 있었던지 평양에 이르러서는 더 나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적 군사가 쫓아 올 것을 염려하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고 일변 시세가 급박하면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때 광주 목사는 권률이였고 정충신은 통인으로 권 목사의 시종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적병이 물밀 듯 들어와 광주성을 휩싸 권 목사가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니 정충신은 적군의 전황을 정탐하겠다고 자원해서 나섰다. 나이 겨우 열일곱 살된 아이가 어른도 하기 어려운 적군의 동정을 살핀다고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권 목사는 정탐의 어려움을 들어 정충신의 요청을 물리쳤다. 그러나 정충신은 어리지만 자신을 가지고 굳게 먹은 마음인지라 아무 말하지 아니하고 밤이면 적군의 진중에 들어가 군사의 배치와 군량에 관한 일무기 수효 등을 낱낱이 적바림하고 낮에는 뒷산에 숨어 적군의 동정을 세세히 살폈다.

 

나이 불과 열일곱의 어린 나이요 글뿐 아니라 한낱 좌수의 아들 통인이라 군사를 거느려 적군을 칠 수는 없으나 비범 영특한 천질은 적군을 물리치는 성산이 어린 마음에 자리 잡혀졌다.

 

정충신은 갑옷투구에 무장을 하고 나서는 권 목사를 당돌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또! 오늘은 적병이 이리이리 움직이니 이렇게 하십시오”

 

권 목사는 처음에 그 당돌함이 어이없고 더구나 어린 아이 말이라 믿음직 스럽지는 못하였으나 자기의 의사와 거의 방불하므로 정충신의 가르침대로 시험 삼아 실행하여 보니 오히려 싸운 전적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공이 더 컸다. 권 목사는 한두 번 정충신의 말대로 해본 뒤에 비로소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았다.

 

싸움이 거듭되는 동안 광주 싸움은 다행히 권 목사가 크게 이겨 적병이 조수물 빠지듯 물러가니 정충신은 적군의 진터를 샅샅이 살피며 돌아 다녔다. 백성들은 이미 피난을 가서 텅 비어 있고 난리에 수라장이 된 마을 가운데 서서 정충신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 중의 문짝이 떨어지고 다른 집들과 비슷하게 헐어버린 집으로 썩 들어섰다.

 

서슴없이 안마당을 지나 부엌문을 열고 다시 뒤뜰로 돌아가니 조그마한 장독대 아래 커다란 독이 떨어져서 엎어져 있었다. 잠깐 바라본 정충신은 힘껏 활을 당겨 독을 쏘았다. 앵 소리를 치며 시위에서 날아가 독을 마치자 독은 갈라지고 비명과 함께 난데없는 사람이 나동그라졌다. 소년 정충신은 칼을 빼어들고 쫓아 들어가 선뜻 그 머리를 베었으니 그는 적의 괴수였다.

정충신은 벤 적장의 머리를 들고 달음질쳐 삼문으로 들어갔다. “사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왔습니다” 정충신의 손에 들린 머리를 본 권 목사는 놀라서 그 전말을 묻는다. “너 그것이 웬것이냐?” 정충신이 자세히 앞뒤 사유를 이야기하여 바치니 권 목사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허허 아깝다. 네가 한낱 좌수의 아들로 태어나다니”

 

이렇게 애석히 여겼으니 문벌만 숭상하는 당시 조정에서 이러한 훌륭한 동량의 제목을 잘 성취시켜 거두어 쓸런지 의심스런 일이며 천리마가 임자가 없어 마구간에서 썩고 기린이 초토에 그대로 늙을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이 뒤로부터 권 목사는 정충신을 보통 다른 통인들보다 다르게 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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