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7(토)

벙어리 거지행세하며 진중 통과…충신 지혜에 감탄 이항복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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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1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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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연재는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다. -편집자 주-

 

정충신묘.png
▲진충사에서 오른쪽 작은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면 정춘신 장군 묘가 있다. 권률의 딸과 함께 잠들어 있는 묘에는 좌우에 망부석, 문인석, 동자상 등이 있는데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묘 양쪽에 세워져 있는 망부석, 문인석, 동자상은 이끼가 가득해 정밀세척이 요구되고 있다.

 

 

정충신은 어머니를 하직하고 관청에 들어가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을 종이에 적어 올린다. 사또는 정충신의 모양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저것이 웬 일이냐?” 충신은 대답 없이 다만 손을 저으며 ‘베베’ 소리만 두어 마디 하였으니 목사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벙어리 거지 노릇 하면서 가겠다는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장계(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일이나 문서)와 편지를 어떻게 감추어 가지고 가는 줄은 몰랐다. 권 목사는 정충신이 떠난 후에 충신의 모친에게 충분한 쌀과 옷가지를 주며 각별하게 보호했다.

 

충신이 광주에서 경성을 향하던 때는 임진년 가을 무렵이라 적 군사가 팔도에 가득해서 곳곳에는 행인의 종적이 끊어졌고 마을에는 닭이나 개 짖는 소리도 없었다. 이런 때에 혼자 길 가는 충신은 노자가 있더라도 음식을 사서 먹을 곳도 없거니와 당초에 노자 한 푼 없이 나섰으니 굶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세미 같은 머리에 얼굴에는 상처가 더덕더덕한데다 다리마저 절뚝거려 일본 군사가 모여 있는 진중을 향하여 서슴지 않고 들어가 손에든 막대기로 진문을 두드리며 외마디 소리로 기괴한 소리를 지른다.

 

일본인도 사람인지라 그 중에 인정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벙어리 거지가 기근에 못 이겨 구걸하는 것으로 보고 밥을 건네면 충신은 그 자리에 앉아 먹기도 배를 채우고 남으면 짚품에 뭉크러트려 망탱이 속에 넣었다가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 충신은 이렇게 일본 진중에서 밥을 얻어먹고 밤이면 진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자기도 하고 혹시라도 일본 군사돌이 구박하는 기미가 보이면 손에 들었던 막대기로 마구 두들기니 군사들이 저항을 그만두는 형편이라 빌어가면서 대접을 받으며 보냈다. 아마 진중에서는 걸인을 구박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은 듯 했다.

 

충신은 이렇게 얻어먹으면서 오륙십 처의 일본 진을 거쳐서 사십일 만에 외주 행재소의 병조판서 이항복 댁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인 이항복 대감을 뵈옵기 간청했으나 위험한 때라 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처음 보는 사람은 모두 거절하고 있던 터라 하물며 구걸하는 거지를 들어가게 하겠는가? 그 때문에 문전이 왁자지껄해졌다. 병조판서 이항복의 처소는 문밖에서 지척이라 문밖에서 누가 자기 이름을 대며 나가지 않고 있자 사연을 알기 위해 문안에서 “내가 이항복이다. 누가 나를 찾느냐?”했다. 

 

묻는 음성이 청아하고 쇄락하여 얼굴을 보지 않아도 대인군자인 줄 알 만하다. 충신은 반가운 마음에 익숙히 알던 사람에게 대답하듯이 “예 정충신 올시다. 광주 목사 권률 영감의 편지를 가지고 대감께 드릴 양으로 수 천리 험로에 간신히 왔습니다. 상감께 드릴 장계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자격이 아닌가가 의심도 되시겠지만 전신을 조사하게 하옵고 곧 불러 보아 주십시오” 하는 말에 이항복처럼 명달한 사람으로 무엇을 기탄하겠는가? 곧 문 밖에 나와 살펴보니 한 날 걸인이 누더기 옷에 망탱이를 메고 섰다가 오성대감에게 국금 배려하는데 머리채는 길고 빗지 아니하여 수세미가 되었고 얼굴 바탕은 비록 잘 생겼으나 상처와 때가 덮혀 있는 십육 칠세 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오성 대감은 그 모습을 가누어 보다가 정충신에게 말하였다. “이 험준한 길을 어린 아이가 도달 하였으니 도량과 정성이 무던하구나. 그럼 어디 장계와 편지를 좀 보자.” 그러자 충신은 “이틀만 말미를 주시면 장계와 편지를 완전히 만들어 바치오리다.” 했다.

 

오성 대감은 충신의 말을 듣고 충신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오늘 너를 만나 내 마음이 기쁘구나!” 오성대감은 이렇게 말을 하고 액정(왕명의 전달 및 궁궐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소속에게 분부하여 충신을 인도하여 목욕하게 하고 머리를 빗겨 상투 짜여 목건 씌우고 몸에 맞는 위복 한 벌을 변통하여 입혀 놓고 보니 천신 같은 남자이다. 오성대감이 기뻐함과 동시에 보는 사람마다 눠 아니 칭찬하리오. 충신은 장지 두 어장을 펼쳐놓고 망탱이의 끈을 차례로 풀어 연하여 붙여 놓으니 처음에 써 내린 편지와 장계다.

 

오성 대감은 그 지혜에 감탄하고 장인의 편지를 본 후에 장기를 임금께 올리고 정 충신이 그 장계를 가지고 오던 수말을 세세히 임금께 알리니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즉시 충신을 입시시켜 보시고 매우 칭찬하시며 수라상을 물려 먹게 하시고 어의를 벗어 입히셨으니 영총이 무쌍하였다. 임금께서는 정충신을 오성에게 맡기시며 완전한 인재로써 떳떳하게 배양하라 하셨고 장계를 보신 후에 비로소 광주 싸움이 있었음을 아시고 그런 장수를 일읍 수령으로 둘 수 없다 하여 광주 목사 권률을 전라 감사에 명하여 도내 병마를 총독하게 하였다.

 

오성 대감은 정충신을 댁의 거실에 같이 거처하게 하고 문하의 명사들과 같이 사서를 가르치시니 그 재기는 학문이 일취월장하고 단연군학의 일봉으로 그해 겨울에 의주 행재소에서 보이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소년으로써 무과에 급제하는 것도 드문 일이기 때문에 임금께서는 장차 자라면 크게 쓰리라 말씀 하셨다. 한편 명나라에선 구원병을 보내지 않기로 의논이 되었음에 우리나라 사신 정곤수가 황극전 뜰 앞에서 밤낮 엿새를 울었다.

 

신종 황제께서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이여송으로 제독을 시키고 정병 수 만 명을 조발하여 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행재소에 이르니 군신 상하가 만분 다행이 여기 오성 대감이 항복으로 접반사(외국의 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관원을 이르던 말) 삼아 마중을 보내는데 정충신이 반당으로 따라 나간다. 따라 나가는 정충신은 소매 속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내어 오성대감께 드리니 오성대감도 또한 아무 말 없이 받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 마중을 나가 이 여송을 만났는데 이 여송은 반접사를 보더니 또한 아무 말 없이 오른 손을 내밀었다. 반접사는 아까 정 충신에게 받은 종이뭉치를 이 여송에게 주었으니 이 종이뭉치를 조선 팔도 지도였다. 이 제독이 구할 줄 알고 준비하였던 정 충신은 이렇게 지혜가 뛰어났다.

 

아무 말 없이 이 제독이 손을 내민 것은 반접사의 지혜를 보려 함이었다. 오성대감도 그 물건이 지도인 줄 알았으므로 받아 넣었다가 꺼내어 준 것 이니 그 지혜도 무던한 지혜이나 자기가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정충신 이 준비한 것을 수용하였으니 오성대감의 지혜가 충신보다 못하다 할 수 없으나 정충신의 지혜를 가히 오성대감에게 비길만 하였다.

 

이 제독은 종이를 펴 보니 조선팔도 지도인데 길의 멀고 가까움과 호구의 많고 적음, 그리고 어디가 험악하고 어디가 평탄한가가 세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 제독은 놀라 심중으로 조선에도 인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제독은 이항복 오성대감으로 총 병부 참모관을 시켜 군무를 의논한다. 이에 군사를 몰아 평양에 이르러 평양성을 돌격하는데 성공하여 이항복 오성대감이 호괴관으로 군사를 호괴할 터인데 호괴 식품이 미처 준비되지 못함에 오성대감은 시세가 급박하여 반당 정충신에게 계교를 물었다. 충신은 오성대감의 귀에 대고 무어라하니 오성대감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곧 한음 이덕형 대감을 청하였으니 한음도 총 병부 참모관으로 그 진중에 있었다.

 

오성대감의 청함을 듣고 무슨 의논할 일이 있는가 하여 즉시 왔다. 오성대감은 한음대감을 보고 내가 잠깐 볼일이 있는데 이 진지를 비울 수가 없으니 형이 나의 대신으로 한 시간만 여기 있으면 곧 다녀오겠다고 하며 일어서서 나간다. 한음은 어떤 까닭인지 모르고 잡혀 앉아 있는데 이 제독은 평양성을 깨뜨려 놓은 후 군사들을 모아 놓고 호괴를 기다리는 바 호괴가 지체됨으로 제독은 노여워하여 조선 호괴관을 잡아드리라 호령하였다. 호령을 들은 무사들은 오성대감의 처소에 이르러 호괴관인양하고 앉아 있는 한음 대감을 결박하여 제독의 군막 앞에 꿇어 앉혀 놓고 엄분부를 내린 후에 군법에 의해서 베이라 하는 참에 정작 호괴관인 오성대감이 들어와 군사들을 다 호괴하였음을 고한다. 이 제독은 베이려던 사람이나 고한 사람이나 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고 또 호괴를 다시킨 바에는 다시 책망할 바 없음에 곧 방송하였다. 한음대감은 겨우 죽기를 면하고 나와서 오성대감에게 그런 기롱을 한다 말인가? 책망도 같고 질문도 같게 말을 한다.

 

오성대감은 한음 대감의 손을 잡으며 “형과 나는 죽고 살기를 한가지로 하여 나랏일을 처리하는 처지라 오늘 엄중한 군령 밑에서 서로 보호할 수밖에 없던 바 내가 호괴를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형이 밖에서 주선하여 나를 살리려 하여서는 시간이 넘어 내가 죽을 터이오. 형을 대신 앉히고 내가 밖에서 주선하면 시간을 넘기지 않아서 일이 무사하게 될 터이기에 모계를 잠깐 쓴 것인데 그 모계는 실로 나의 의사가 아니고 저기 서 있는 정충신이 가르쳐 준 모계이니 형이 만일 원통한 마음이 있거든 충신을 책망하게” 하니 한음 대감은 찬연히 웃고 충신을 불러 옆에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참 기이한 남자라고 칭찬하고 사랑함을 마지아니하였으니 한음 대감의 도량도 또한 무던하였다.

 

이 제독은 평양성을 깨뜨리고 군사를 거두어 다시 대오를 정제하여 대동강을 건너 적 군사를 쫓다가 고양 벽제역에 이르러 적군사의 호접진을 만나 철기 천명과 가동 삼백이 죽었음에 이 제독은 종시 두려워하여 감히 혜음령을 넘어서지 못함에 오성대감은 여러 번 권고하다 못하여 혼자 걱정하고 있을 때에 정충신이 이 제독과 대면하길 원했다. 무슨 계책이 있는가 짐작하는 오성대감은 충신을 데리고 이 제독 앞에 들어가 수작할 적에 이 제독은 정충신의 미리 명민함을 보고 불러 같이 앉히고 통변을 세워 놓고 “너는 유충한 나이로 이렇게 위험한 진중에 따라 다니면 무서운 마음이 없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충신은 “위험한 진중은 대인은 무서워 하지만, 소인은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격동된 이 제독은 무안한 기색이 현도하면서도 넘기는 말로 “네가 무서워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하고 묻는다. 충신은 빈정대는 말로 그 마음을 격동시켜 놓고 다시 권고하는 말로 진정시켜 본다. “적 군사는 비록 한번 이겼으나 삼국 군사가 뒤쫓아 올까 의심하여 경성에 있는 진까지 옮겨 갔으니 대인께서 이제 앞으로 나가기를 힘쓰시면 적 군사는 겁이 생겨 감히 범하지 못할 터이오. 우리나라 군사들도 제독이 나가심을 보면 용맹하게 싸움에 나설 것이며, 대인이 만일 나가시지 아니하면 적장수의 생각에 삼국 군사는 뒤를 이을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도로 올 터인즉 그러하시면 우리나라 군사들도 낙심하여 싸울 기운이 없을 터이니 이는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아는 형편이온 바 대인이 공연히 여기서 유하시면 무서워하심이 아니고 무엇이오리까? 어서 기와 북을 정제해 가지고 올라가십시다.” 

 

이 제독은 일장설화를 듣고 자기는 천하 대장군으로써 지혜와 용맹이 저 십여세 소년만 못하다 탄식하며 “조선에 저런 인재가 있으니 무엇을 걱정 하리오! 내가 그대의 지휘대로 할 수 밖에 없다”하고 곧 군령을 내려 군마를 출동하여 경성으로 들어와서 성중에 유진하였음에 선조 대왕께서는 그 뒤를 쫓아 환어하여 불타고 남은 궁궐을 대강 소제하고 거처 하셨다. 

 

선조 대왕께서는 이 제독을 보고 인심을 수습하여 달라 하였으나 이 제독은 적군사의 위엄에 감히 발작하지 못하다가 여러 번 간청함에 마지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중을 향하여 평택 들지에 유진하고 제장을 나누어 보내어 우리나라 군사의 싸움을 도와 주다가 여러 번 패하였으니 만약 이 충무공과 권률 목사의 승첩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리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이때에 조정에서는 여럿이 공론하이 권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여 곧 도 원수로 배하여 불러 들였다. 권률은 명령을 받고 경성에 올 때 정 충신 모친도 모시고 왔다. 모자가 서로 반겼으며 충신은 모친을 보호해 주신 덕을 치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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