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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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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4)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 연재는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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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1년 충무공 시호 교지와 함께 정충무공께 치제하는 치제문과 함께 후손에게 하사한 향로와 향합. 사진자료=충무공정충신현창사업회 제공 

 

 >>지난호에 이어

한성(한양)근처에 흩어져 있는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하여 밤낮으로 교련시켜 한성을 범하는 왜병이 있으면 방어할 기획을 주장하였으나 각처의 관병장과 의병장에게 힘써 싸우라는 전령을 보낼 뿐이었다. 적장들은 염탐하여 듣기를 명나라 군사는 뒤가 없고 이여송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조선 임금은 비록 환궁 하였으나 도성을 막는 군사가 수천 명에 지나지 못한다 하니 수만 군사를 행주목에 하륙시켜 장차 한성을 공격하려 하니 우리 조정에서는 조정 상하가 크게 놀래어 어찌할 줄 몰라 하였다.

 

도원수 권율이 아뢰기를 “물이 오면 흙으로 막는 법이고. 군사 가오면 장수가 막는 법이오니 신이 비록 미거하오나 장수의 소임을 다하여 오는 군사를 막으리오다.” 라고 장담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정하게 하나 별로 좋은 계책이 없음에 정충신과 의논 하여 계획을 강구한다.

 

당시 정충신은 무관으로써 권율 밑에 있었다. 정 충신이 말하기를 “지금 도원수께서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군사로 도성을 지키려 하시다가 적군이 도성을 철통같이 에워 쌓아 물 한 점도 통하지 못하게 하고 감시할 터이니 그러면 도성 안에 있는 우리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을 뿐이니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 군사가 오는 길목에 있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싸우는 일이 마땅하오이다.”

 

권 도원수는 그 의견을 듣고 생각하여 보니 합당하므로 군사를 이끌어 충신을 데리고 행주에 나가 적군의 진을 만났다. 도원수는 군사를 단속하여 싸우기 전에 정충신의 기획을 듣는다. 정충신이 또 의견을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적을 뿐 아니라 기세가 이롭지 못하여 힘으로만 대적 하려 하오면 반드시 패할 터이니 계교를 써야 할 것입니다. 도원수께서 먼저 문정(問情)하러 가겠노라 격서를 지어 적진에 전하시고 내일 식후에 단기로 그 진중에 행차 하시어 적장수의 마음을 방심하게 만드십시오. 돌아오시는 길로 곧 군사를 휘동하여 음습하시오면 방심한 적장수들이 출기불의로 나가는 우리 군사를 당하지 못하리라.”

 

도원수는 그 계교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당장 격서를 만들어 사자를 보내 적 진중에 전하였는데 그 격서에 “조선국 도원수 권율은 일본 대장의 휘하에 글을 올리나이다. 귀국과 아국은 본래 협원이 없던 바, 오늘날 군사를 일으켜 서로 다툼은 실로 뜻밖이라 시운(時運))이 그리 할지언정 별로 악한 의사는 없음에 이 변란에 대하여 본관은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본관 권율은 지혜도 없고 군사도 적어 싸울 능력이 없음에 몸소 장군의 휘하에 나아가 정성껏 간절하게 부탁드리고자 하옵니다. 장군이 군사를 물려주시면 만분다행이요, 만일 허락하지 아니하면 권률이 명을 바칠뿐이오니 깊이 통촉하시어 회답해 주시오.” 적장수는 격서를 보고 생각에 ‘저 사람은 이처럼 간걸하는데 내가 무단이 거절하면 오히려 협착한 심정이 보일 터이니 한번 서로 대하여 담판할 적에 시기를 따라 조치하리라’마음먹고 피답하는 글에 “장군의 격서를 보니 이 사람 마음이 감격한 바, 군사를 출동하여 서로 승부를 겨루는 일은 조정 명의요 이 사람의 주견이 아니오니 이해하길 바이오며 서로 만나보자 하신 말씀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오매 밝은 날 고견(高見)을 듣고자 하오이다.” 하였다.

 

도원수는 그 답장을 보고 군사를 단속하여 놓고 이튿날 밝은 후 군복에 전립과 환도를 갖추고 말에 높이앉아 등채를 들고 정충신과 군사 두 명을 거느리고 적 진중을 향했다. 적장수도 위엄을 보이려 장막 앞에 칼과 창을 세워 놓고 총군 수천을 좌우에 배립시켜 각기 총을 들고 총부리를 앞으로 겨누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이 여러 군사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도원수와 정충신은 일부러 겁나는 척 하였지만 속내는 겁낼 리가 있겠는가? 천천히 걸어서 장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회답 격서에 그처럼 온순하게 말하던 적장이 지금은 엄연한 기색이라 도원수는 두 군사를 장하에 머물게 하고 정충신만 데리고 장상에 올라가 적장수를 향하여 “공은 노고 중에도 신체가 강건하시고 공이 나아오실 때에 공의 처자도 다 무고 하던 가요?”이렇게 인사하니 적장수는 아연히 웃으며 “내가 들으니 조선은 예법을 숭상하는 나라로 아는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모의 안부는 묻지 않고 처자의 안부를 물으니 그런 예가 있는가?”하는 말에 도원수는 천연스럽게 대답하기를 “예기(禮記) 곡례 편에 ‘아들 된 자는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지 않는다’했는데 공이 천리 타국에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부모가 계시지 않으심을 가히 알겠음에 처자부터 물었소이다.”하니 적장수는 좌우에 명하여 방석을 깔고 원수에게 좌정하기를 청한다.

 

원수는 좌정한 후에 홀연히 몹시 두려운 기색을 짓고 공연히 아첨하는 빚을 낸다. “이 사람은 반딧불 밑에서 글이나 읽는 서생이라, 장군의 신출귀몰하는 도략(韜略)을 알지 못하니 전장에 임하여 군사 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죽기로써 대령한 이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너무 송구하오이다.” 적장수는 이 말을 듣더니 난처히 생각하고 군중에 호령하여 총을 걷어 세우라 하고 차를 내어 대접했다. 도원수는 적장수에게 말하기를 “이 싸움은 임금의 명령으로써 행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디로 피할 곳이 없으니 닷새 동안만 싸움을 준비하게 해 주시면 마지못하여 싸워 볼까 하오이다.” 했다. 적장수는 그의 안정한 기세에 눌려 잠깐 막연히 앉았다가 혼연히 대답하기를 “이 사람도 상관의 명령을 받았으니 싸움을 임의로 할 수 없거니와 며칠 동안 기다리라 하니 그리 하오리다.”

 

도원수는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으므로 짐짓 앉아서 멈칫거리다가 작별하고 올 때에 손에 들었던 등채를 일부러 놓아두었다. 도원수는 장막 아래 내려섰다가 황겁히 하는 기색을 보이며 다시 올라와 동체를 집어 들고 “황망 중에 이 물건을 놓고 갔었지요. 변변하지 못한 물건이나마 버리고 갈 수 없기에 다시 와서 찾아 가니 웃지 마시오.”하고 도로 내려갔으니 이는 곧 두려운 모습으로 안은한 의사를 베품에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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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8월 11일 충무공 사후에 충무공 시호를 내리는 교지. 사진자료==충무공정충신현창사업회 제공  

 

대하에 내려와 보니 두 명의 군사는 총을 맞아 죽을까 사색이 되어 혼이 빠져 있다. 도원수는 군사를 회생시킨 후에 일으켜 진문 밖에 나와 한가한 걸음으로 말을 타고 돌아갔으니 그 행동과 언사는 모두 정충신의 계책이었다. 적장수는 도원수의 인사를 듣고 행동을 보건데 싸우려는 의사가 전혀 없어 보여 마음 놓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도원수는 적진에서 돌아오는 길로 군사를 배부르게 먹어 물밀듯이 적진에 들어가 습격 하는데 때는 마침 삼경이라 군사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없고 편전과 월도로 진격하는 기세가 대단히 맹렬했다. 적진에서는 불우지변을 당하여 왜병은 미쳐 갑옷을 입지 못하고 말은 안장은 짓지 못하여 뒤죽박죽으로 사산분주(四散奔走)하여 달아날 적에 피는 흘러 개천이 되고 주검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수백 명의 포로가 있었으니 이것이 사기(史記)에 적인 행주대첩이다. 싸움에 이긴 것은 실상 정충신의 공이지만 권도원수의 결단이므로 권도원수의 공이라 할 것이다.

 

그 후 부터는 권 도원수의 위엄이 원근에 진동하여 왜군이 감이 다시 범하지 못하고 진을 거두어 남쪽으로 갔으니 그 공이 어찌 장하다 하지 않겠는가! 선조 임금은 권 도원수를 접견하고 그 공을 표창하니 권 도원수는 아뢰기를 “신의 공이 아니옵고 정충신의 공이옵니다.” 하고 정충신이 주도하던 사실을 낱낱이 알림으로써 임금은 수차례 칭찬하고 많은 상을 주었다.

 

한편 정충신은 의주 행재소에서 부터 임금이 환어한 뒤에도 쭉 오성 대감댁에서 생활하였으니 마치 부자간 같았다. 이쯤 되니 오성대감 문하에 노는 소년 명사 지천 최명길과 계곡 장유 이귀의 아들, 이 시백 같은 이들과 의좋게 사귀어 놀게 되었을 때 모든 면에서 정 충신이 돋보였다.

 

어느 날 오성대감은 충신의 의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장지문 앞에 동자쇠를 걸고 그 위에 아무도 모르게 사발에 물을 담아 올려놓고 충신을 불러들이니 충신은 장지문을 열기 전에 동자쇠 위에 있는 사발을 내려놓고 들어가니 그 얼마나 신중 침착한가! 또 전에 읽은 책을 가지다 놓고 강(講)할 때에는 위에서부터 끝까지 한자도 착오 없이 그 뜻을 물으면 뜻밖의 뜻까지는 논란을 한다. 매사가 이러하니 작은 일을 보면 큰일을 알 것이므로 오성 대감은 그의 행동이 신밀(愼密)함을 반복하여 일마다 문의한다.

 

하루는 오성대감이 정충신에게 “네가 보기에 나의 위인이 나의 장인 도원수에게 비유하면 누가 났겠느냐?”고 물었다. 충신은 “총명득달 하심은 대감께서 한층 더 높으시고 진중 침묵하심은 도원수 대감께서 한층 높으시옵니다”했다. 오성대감은 그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어리석고 별미 적은 사람이 진중 침묵하느니라. 너를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보신 어른을 진중 침묵하다 할 수 있느냐?” 고 말해 그 장인을 인재로 허(許)하려 하지 않는다.

 

하루는 정충신이 오성대감이 뒷간에 있는 것을 보고 별안간 급한 소리로 “큰일 났습니다. 왜군 수천 명이 어디서 왔는지 지금 동대문으로 물밀듯이 들어옵니다”고 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본래 충신의 말을 믿는 바 그 말을 참말로 알고 궐내로 들어 갈 생각에 뒤를 다시 보지도 않고 일어서서 괴춤을 여미면서 나온다. 정충신은 앞을 막으면서 “지금 대감께서 소인의 말에 속으신 것은 지혜가 없으시다 할 바가 아니오나 전일에 대감께서 권 도원수 대감의 진중 침묵하심을 허(許)하시지 아니 하였기로 소인이 당돌히 시험 한 일이올시다. 권 도원수 대감께서는 소인과 두 명의 군사를 데리고 위험한 적 진중에 들어가셨을 적에 군사 두 명이 두려움에 기가 빠져 혼이 나갔기에 도원수 대감께서 멀리 서서 군사의 입에 오줌을 누시는 바 한 방울도 딴 곳 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일본 군사가 들어온다는 말 만 듣고 보시던 일을 다 보시지 못하시고 일어섰사오니 진중 침묵하심이 누가 나으실런지 대감께서 자랑하여 보실만한 일이올시다.” 오성대감은 그 말을 듣고 보니 충신에게는 속았지만 웃으면서 “내가 실수했다”고 말했다.

 

선조임금 말년에 정충신의 나이 근 이십이라 오성대감은 그 때에 정승으로 있었다. 오성대감은 충신을 무척이나 사랑하신 나머지 대감의 처제 즉 권율장군의 딸을 짝지어 주려해도 충신의 문벌이 부족함을 꺼려 망설이고 있으면서 한음 이덕형 대감에게 상의 했다. 한음대감이 단언하기를 충신 같은 사람을 얻기 쉽지 못하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오성대감은 충신을 아끼셨다. 충신은 매우 고매하였음에 양반들이 많은 시비를 걸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성대감의 사위 윤옥은 대대명문가의 자손으로 소년 등과하여 한림교리로 당대 첫 째 가는 명사를 자칭하는 사람이다. 자기 처가에 왕래 할 적에 충신한테 더러 핀잔을 당하였는지 이놈저놈 꾸짖기를 마지않더니 하루는 오성대감의 예궐한 때에 왔다가 정 충신이 혼자 있음을 보고 “이놈, 정충신! 네가 장기를 잘 둔다지? 나하고 한번 두어 보려느냐?” 하고 묻는다. 충신은 샛별같이 눈을 뜨고 윤 한림을 뚫어지라 보고 거만하게 “두자면 두지만 무슨 내기를 하지요” 하니 윤 한림이 “그럼 목 베기를 하자”고 한다. “장부가 한 입으로 두말은 못 하겠지요? 어디 한 번 두어 봅시다.”하고 정충신은 장기판을 내어 놓고 장기판을 벌인다.

 

윤한림은 자기 말이 희룡으로 나왔음에 충신의 말도 회룡으로 알았는지 또는 충신을 본래 미워함에 장기를 한번 이겨놓고 참으로 목 베려 하였는지 팔을 걷고 달려 들어 두는데 병법으로 두는 정충신의 장기를 어찌 능히 당할소냐! 윤한림은 장기 알을 몇 번 옮겨 놓더니 외통에 몰리어 다시는 풀어 낼 수 없이 되었다.

 

윤한림은 빙글빙글 웃더니 한 번 더 두자 하면서 장기를 다시 벌린다. 충신은 눈을 부릅뜨고 “한번만 둔다 하였지 한 번 더 둔다 하였단 말이요? 하며 일어서더니 벽에 걸려 있는 환도를 쑥 잡어 빼어 가지고 달려든다. 윤한림은 농판으로 시작한 일인데 충신은 실상으로 시행하려하니 살려 달라 빌 수도 없고 죽어 달라 머리를 디밀 수도 없는 경우라 칼날이 번뜻 보임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 벌떡 일어나 마루에 나가 신발도 찾을 길이 없음에, 사람이 급하면 지혜가 난다 하였듯이 자기를 보호하여 줄만한 사람은 장모밖에 없다 생각하고 대청으로 달아나는데 충신은 칼을 들고 쫓아 나선다.

 

윤한림은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장모님, 사람 살려 주십시오. 충신이가 나를 죽이려 합니다.” 하고 정경부인 뒤에 가서 선다. 충신은 대정까지 올라섰으나 사모 앞에서 행흉하기가 어려워서 칼을 빗겨 들고 노기가 등등하다. 정경부인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쫓기는 사람은 사위요, 쫒는 사람은 정충신이라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는 마음에 “충신아! 이것이 무슨 짓이냐? 썩 나가거라!”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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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승리 이끈 권율과 정충신…권율 “정충신의 공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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