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16(금)

“척화파에 배척당하고 평안병사직도 박탈, 당진으로 귀양”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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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1.1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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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8)

 

서산타임즈가 창간19주년 특별기획으로 우리의 묻힌 역사적 인물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정 장군의 일대기는 충무공 정충신유적현창사업회(회장 이철수, 전 서산시의회 의장)와 김인식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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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고신…만포진병마첨절제사 임명문서

 

정충신은 평양에 도달하여 장 도원수에게 군례를 올려 기왕지사(旣往之事)와 이괄이 모반할 것을 보고하니 도원수는 “한 고을을 지키는 장수가 이러한 변란에 임지를 지키지 않고 이곳에 왔으니 될 말이냐?" 고 꾸짖는다. 그러나 정 장군은 태연하면서도 상세하게 “소장이 지금 안주를 버린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고 소세(小勢)로 이괄의 예봉을 막는다고 하다가 귀중한 인명만 희생시키고 말게 될 뿐, 이곳에 와서 3책(三策)을 올려서 토적(討賊) 하는데 참례(參禮)함만 같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세 가지 방책을 올렸다.

 

“적으로서는 평양 방면으로 나와 모문룡과 손을 잡고 서서히 이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한 후 관서지방에서 황해도 일대에 뻗혀 올라오는 것이 상책이요. 적이 지금 모반한 곳에서 후방의 오랑캐와 체결하여 인근 각 읍을 점령하고 서서히 한양으로 올라오는 것이 중책일 것이고 이괄이 지금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한양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下策)일 것입니다.”하고 삼책을 풀어 말하니 도원수는 다시 정 장군에게 묻는다.

“그러면 이괄은 어떤 책략을 택하리라 보는가?”

“이괄은 비록 용맹한 장수이나 꾀가 적고 성질이 급해서 하책을 쓸 것이외다.”하고 대답했다. 도원수는 쾌연히 정 장군의 말을 옳다고 여겨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삼고 남이흥을 후군대장(後軍大將)을 삼아 정 장군에게 큰 권한을 일임하였다.

 

이때가 인조 2년 정월 26일이었는데 그날은 직성(直星) 칠살(七殺)이 범(犯)하였으니 출병이 불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 장군은 그 말에 반대하며 “부모가 발병하여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택일하여 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며 여러 사람을 격려했다. 군사를 합하니 총 1천 8백여 명에 달하는 많지 않은 군사이나 재촉하여 29일 저녁 어두울 때에야 비로소 대동강을 건너 이괄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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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고신…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 안주목사 임명문서

 

평안도 땅을 지나 황해도 황주 신교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괄의 병사는 황해도 수안으로 들어섰으나 황해 감사가 지킴으로 그 길을 버리고 황주로 길을 접어 들었다. 2월 2일에 정충신이 적병과 싸우다가 적장 허전, 송림 등을 불러 항복을 받게 되었는데 적장이 항복하러 온 것을 관군들은 적병이 침입하는 것으로 알고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다. 이 기회에 이괄은 황애를 시켜 돌진케 하여 관군은 크게 낭패를 당하였으나 정 장군은 기민, 침착한 지휘로 흩어진 군사를 황주성으로 물려 수습했다.

 

한편 이괄은 봉산 전탄(箭灘)을 건너 연안부사 평산부사의 군사를 물리치고 수원부사의 군사도 임진강에서 격파하고 한양에 도달하였다. 이괄은 한명련 등 휘하 장수들을 대동하고 군사를 몰아 풍우같이 동대문으로 들어오니 각 관청의 피난 못 간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갖추고 나아가 영접하고 백성들은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깔아 성대히 환영하였다.

 

이괄은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자리에 진을 치고 흥안군(興安君) 식을 데려다가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자기의 뜻이 이렇게 성공하였다고 여긴 이괄은 자기도취에 빠져서 인조의 뒤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삼정승 육조판서를 임명하였다. 정충신 장군은 왕이 파천한 것을 알고 종사관 이민구를 공주행재소로 보내어 연락을 취하고 10일 새벽에 군사를 거느리고 혜음령(惠蔭嶺)을 넘어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렀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한양을 포위하여 반군을 괴멸할 계획이었으나 정 장군은 “한양성을 포위 하면 우선 많은 군사가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여러 날이 걸릴 것이니 안산 고개, 길마재에 올라가 높이 진을 치고 반군과 대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며 병법에도 이른 바와 같이 북산(北山)을 먼저 차지하는 편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라고 했다.

 

남이흥(南以興)도 이 말에 찬성하여 정충신의 계획대로 시행되었고 그날 밤에 길마재에 올라가 서울 안을 내려다보면서 진을 쳤다. 이괄은 이미 대궐을 차지하였다 하여 의기양양할 뿐 아니라 이제 싸우기도 넉넉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거드름을 부렸다. 안현(길마재)을 점령한 정충신은 봉군(烽軍)으로 하여금 평상시와 같이 한 자루의 불을 켜게 하였으나 산 위에는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 말이 우는 소리가 소란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동풍이 사납게 부는 바람에 성안 사람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충신은 한편으론 경영고(京營庫)를 습격하여 지키던 적병을 제거하고 미포(米布)를 거두어 오니 양식과 물자가 넉넉하였다.

 

11일 아침에 이괄은 비로소 길마재 위에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명련에게 이르기를 “장만의 군사가 매우 정예(精銳)하다 할지라도 아직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고 뒤에 있을 것이며 지금 영상(嶺上)에 있는 군사들은 허약할 터인즉 우리의 일부 병사와 항왜(降倭)들로 하여금 창의문으로 나아가 연서일로를 에워싼다면 장만의 관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한명현은 “고개 위에 있는 관군은 그 수도 적으려니와 멀리서 온 오합지졸(烏合之卒)임으로 많은 군사로 포위 작전을 할 것 없이 한군데로만 공격하더라도 힘껏 싸우지도 않고 도망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괄은 한명현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군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고개 위에 있는 오합지졸들을 때려 부순 후에 아침밥을 먹자.”하고 성내에 방을 붙여 “관군과의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백성들은 나와서 구경하라.”하는 등 군세(軍勢)를 뽐냈다.

 

곧 이괄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길마재를 에워싸고 개미 떼처럼 기어 올라갈 때 한명련이 항왜 수십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앞을 서고 이괄은 중간에서 독전(督戰)하였다. 처음에는 동풍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빗발처럼 퍼붓는 적병의 탄환에 정충신은 상당한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당하게 되었고 선봉을 맡은 선천부사 김경운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싸움이 치열해 가던 중 바람의 방향은 변했다.

 

뛰어난 지장(智將)인 정충신이 이곳의 일기(日氣) 상황을 예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이곳 길마재의 풍향(風向)을 이미 알고 있던 정충신은 군사들에게 미리 고춧가루와 재를 충분히 준비하여 두었다가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세차게 불어대는 서풍에 뿌려 날렸다. 이괄의 반군들은 매운 고춧가루와 재에 눈을 뜨지 못하여 크게 당황하고 동요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충신 장군은 군사들에게 진격을 재촉하고 반군들을 무찌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괄 반군은 그래도 한동안 잘 견뎌내며 물러서지 않았는데 별안간 뒤에서 징 소리가 나더니 “후퇴하라!” 하는 소리가 산천이 진동하도록 울려왔다. 이괄의 군사들은 멋도 모르고 후퇴를 개시했다. 전투에서 북소리는 진군하는 것이고 징소리는 퇴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충신은 후군(後軍) 남이흥으로 하여금 적진 후방에서 징을 치라 한 것이었다. 이때를 타서 맹렬히 쳐들어가 반군 4백 명을 죽이고 3백여 명을 붙잡았으니 이괄의 반군은 여기서 산산이 패하고 말았다.

 

정충신의 계교에 녹아 크게 패한 이괄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백성들의 태도는 일변하여 “역적 이괄이 패했다.”하고 지르는 소리가 크게 진동하고 성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이괄은 하는 수 없이 초라한 패잔병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한명련과 같이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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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고신…평안도 병마절도사 임명문서

 

한편 정충신은 군사를 휘동(麾動)하여 성안에 들어와 종로 광통교에 진을 치고 피난을 가는 백성들을 안돈(安頓)시킬 때에 측근 장수가 뒤쫓아 들어와 정 충신이 유진(留陣)함을 보고 “어찌하여 이괄을 쫒아가서 잡지 아니하고 여기서 유진 하시오?”하고 모두들 이상히 여기었다. 정 장군은 대답하기를 “이괄은 이제 몸 하나뿐인데 몇 날 못 되어 잡혀 올 것이요. 무슨 걱정이 되어 괴수 하나를 잡기 위해 많은 군사를 데리고 민간을 수색하여 폐단을 만든단 말인가? 본관은 성안에 있는 놀란 군사를 안돈시키기 위해 여기에 유진한 것이오.” 하였다. 또한 정충신은 군사를 시켜 각 곳에 보내 백성을 안돈시키고 한편으론 싸움에 이긴 소식을 행재소에 알렸다.

 

이괄은 삼전도를 건너 이북령(利北嶺)에서 광주 목사 임희를 죽이고 이천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현(奇益獻) 등이 이괄과 한명련을 죽여 首級(수급)을 바쳤기 때문에 이괄의 헛된 망상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정 장군은 이괄의 목을 보고 칼을 놓으며 크게 개탄하고 다음 일을 걱정하였다. “이제 역적이 제거되어 나라를 평정하니 경사는 경사이다만 작년에 범 같은 박염의 목을 베고 이제 맹장 이괄을 없앴으니 장차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는 누가 막는단 말이냐!”

 

인조가 공주산성에서 환어(還御)하여 한강 노들강변에 어가가 이르니 여러 장수가 봉어(奉御)하여 제각기 자기 공로를 치사 받으려 하였으나 정충신만은 어가 앞에 부복사배(俯伏四拜)하고 홀연 자기 전임 안주목영(安州牧營)으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생각하여 후에 사람을 시켜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이 무능불충(無能不忠)하여 전하께서 파천까지 하시게 했으니 대죄(待罪)할 뿐이오이다.”라고 상주했다. 인조가 환어하여 진무 일등 공신에 장만, 정충신, 남이흥 3인으로 하고 정충신에게는 금남군에 평양병사를 제수하면서 후금 누루하치의 정세를 물어보았다.

 

“소신이 후금에 출입하면서 적정을 살핀 즉 중과부적(衆寡不敵)일 뿐 아니라 철기(鐵騎)로 서로 부딪힌다면 야전으로는 다투기 어렵고 수성이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적의 병수의 다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8부 대인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백일 초(哨)가 있는데 대략 9만에 달하며, 장갑군(長甲軍), 중갑군(重甲軍)이 일백인데 모두 수은갑(水銀甲)을 입었으며 1조로 되어있고 매우 용감하여 城(성)을 공략할 때에 주축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호마(胡馬)는 어떤 말이며 그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하고 또 임금이 세세하게 물으니 정충신은 “모두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인 것을 보면 아마 만 여필이 될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걱정하는 말로 “노추(奴酋)는 한개 소추(小醜)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 조선은 수 천리 지방을 가지고도 그것을 누를 수 없단 말인가! 다만 성심(誠心)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얻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지금 우리 장신(將臣)들은 모두 입수(入守)하려고만 하고 나아가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이다.”라고 했다.

정충신이 또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법이 없는 나라입니다. 양장(良將)이 있더라도 누가 같이 싸워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만약 10여만의 군병을 징발하여 1~2년만 훈련하고 연마시킨다면 요동 땅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수어(守禦)에만 구구하게 치우치겠습니까?”

 

그 후에도 여러 번 상소를 올려서 화평(和平)과 산성수리, 10만 양병(養兵)을 꾀했건만 주전(主戰) 숭명(崇明)파가 대의를 내세워 조정을 주도하는 데에는 너무나 외로웠다. 정충신이 의견을 여러 번 상소함에 척화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으며 신흥 세력 청과의 절교를 통보하러 청에 가는 사신의 길을 막고 조정에 재고해 줄 것을 죽기를 각오하고 간절히 건의 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평안병사직도 박탈당하며 당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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