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그 후
가기천의 일각일각

지난주 산악회 회원들이 강릉으로 등산 겸 봄나들이를 떠났다. 주문진 수산시장에 들르는 일정도 있었다. 필자도 같이 가기로 했지만, 갑자기 일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일행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문진 「서산건어물상회」에 들렸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주차한 곳에서 좀 떨어졌는데도 일행 열다섯 명은 일부러 찾아가서 이것저것 샀다는 것이었다. 사장에게 ‘필자 이야기를 하며 찾아왔다’고 하니 얼른 알아보며 가격을 깎아주고 덤도 주더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주문진에 갔을 때 기사는 버스를 수산시장 주차장에 세우고 물건을 사는 시간을 주었다. 필자는 동행한 10여 명을 서산건어물상회로 가자며 앞장서 이끌었다. 고향의 아는 사람이라며 이왕이면 거기로 가자고 권했었다. 6년 만에 찾았지만, 필자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일행에게 전통차를 내주고 특별히 대해주었다.
박 사장은 종종 서산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면서 팔봉 승마장 회원들도 다녀갔다고 했다. 쉽게 오가며 만날 수 있는 시대라 하더라도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서 느끼는 감정은 남다른 것이다. 당시 일행들은 흡족함을 마음에 담고 돌아왔다.
필자는 올해 나들이에는 동행하지 못했지만, 일행들은 지난해 박 사장으로부터 받은 좋은 인상을 가졌기에 또 갔던 것이었다. 물건을 골라주고 덤에 후하더라고 했다. 버스 안에서 군것질하라고 쥐 포 두 박스를 들려주는 인심도 보여주었다니 박 사장이 고마웠다. 굳이 찾아간 회원들도 고마웠다. 박 사장에게 전화하여 정담을 나누었다.
서산건어물상회와 인연은 7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 간다. 설악산 등산을 마치고 일행을 태운 버스가 주문진 수산시장 거리를 지날 때 창밖으로 ‘서산건어물’이라는 상호가 보였다. 버스는 얼마를 더 가서 어느 건어물 가게 앞에 세웠다. 기사는 ‘잘 아는 가게’라며 이왕이면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필자는 반가운 이름 ‘서산’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빠듯한 시간을 셈하며 잰걸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무더위에다 서두름까지 더한 걸음은 온몸에서 땀을 솟아나게 했다. “상호가 서산이라서 찾아왔다”라며 눈에 띄는 대로 몇 가지를 들고 가격을 묻자, 가격표에서 얼마를 뚝 접어주고 명란젓 한 병을 안겨주었다.
한 고향이라는 공통분모의 정이 느껴졌다. 늦을세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니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었다. 당시 <서산타임즈>에 ‘서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라는 제목으로 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지난해 다시 찾았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 태어난 고향에서 자라고 일하며 일생을 마쳤다. 평생 100리 밖을 나가본 사람은 20%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도시로 나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친척이나 후배를 부르기도 했다. 향학열이 높아지고 직장을 찾아 도시로 나가고 객지로 떠났다. 그곳에서는 고향 사람끼리 모여 향우회를 만들고 수시로 만나면서 끈끈한 정을 쌓았다. 고향 소식을 나누고 향수를 달랬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계의 문화’가 엷어졌다. 향우회, 동문회, 종친회가 예전에 비하여 점점 시들해졌다. 서로 의지하려 하지 않고 고향이나 고향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적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주의가 늘어나는 원인도 있다. 홀로 지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향심의 유전자는 남아있다.
일제 치하에서 가수 백년설은 눈(雪)을 바라보며 ‘고향 설’ 노랫말을 썼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에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짠하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오/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소매에 떨어지는 눈도 고향 눈// 눈 위에 부서지는 꿈도 고향 꿈/ 길 위에 흩어지는 꿈도 고향 꿈/ 인정은 서툴러도 눈은 정다워/ 고향을 그려보니 고향을 만져보니/ 가슴 쓰리다.”
필자가 서산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서산읍 인구는 2만 8천명쯤이었다. 설령 인사는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라 하더라도 안면이 있었다. 대부분 서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학교에 다녔던 연유였다. 서로 친분을 맺고 교유하며 지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세거민보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굳이 고향 사람, 타향 사람을 가리고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도 아니다. ‘서산건어물상회’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외지에 나갔을 때 고향 사람을 만나면 더 반가워하고 힘껏 도우며 지냈으면 하는 것이다. 객지에서 나름 터전을 잡을 때까지의 노고를 인정하고 애향심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출향인들도 서산건어물 박 사장처럼 고향 사람을 만나면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다른 하나는 외지에서 서산으로 와서 기반을 닦은 분들은 고향 사람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줌으로써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면 좋을 것이다. 인연을 확대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진항의 서산건어물상회에서 떠올린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