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힘
김풍배 칼럼

꿈꾸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실이었던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배다른 형들은 그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년은 곧잘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은 ‘꿈쟁이’라고 하며 더욱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가 17세 되는 해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들에 나가 가축을 돌보는 아들들과 가축의 안부가 궁금해서 소년에게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그를 발견한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궁리했습니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마른 웅덩이에 넣었지만, 이도 못 할 짓 같아 노예상에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돌아가 소년이 입던 옷을 보여주었습니다. 짐승의 피를 묻힌 옷을 본 아버지는 짐승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슬퍼했습니다.
노예상은 그 소년을 왕의 경호실장 집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하는 일마다 형통했습니다. 마음에 든 주인은 그를 집안일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관리하는 가장 가까운 종으로 삼았습니다. 마님은 청년에게 자꾸 눈길을 주더니 하루는 그를 자기 침실로 가자고 유혹했습니다. 마님은 청년의 옷을 붙잡고 잠자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옷도 버린 채 그녀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이를 분히 여긴 그녀는 남편에게 청년이 자기를 덮치려 했다고 모함했습니다. 경호실장은 청년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 신하 둘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술 맡은 관리였고 하나는 음식을 맡는 사람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리가 꿈을 꾸었습니다. 포도나무가 세 가지가 있는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 꿈이었습니다. 청년은 그가 사흘 후에 복직할 거라고 해몽했습니다. 실제로 관리는 사흘 후 복직하여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청년을 잊어버렸습니다.
2년 후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매우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강가에서 올라와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피골이 상접한 암소 일곱 마리가 토실토실 살진 일곱 마리 암소를 잡아먹는 꿈이었습니다. 통통하게 잘 익은 이삭 일곱 개를 쭉정이 이삭 일곱 개가 먹어 치우는 꿈도 꾸었습니다. 답답한 왕은 꿈을 해몽하는 신하를 찾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마침 술 맡은 관리가 해몽을 잘하던 청년이 생각나서 왕께 아뢰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 꿈을 해몽하게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그는 왕에게 두 가지 꿈은 같은 뜻이라며 일곱 해 동안 풍년이 들 것이고 이어서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 것이니 슬기로운 사람을 뽑아 잘 대처하라 조언했습니다. 이에 왕은 그를 총리로 삼아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혀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나라에서 두 번째 높은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기독교인이라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란 걸 아실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7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년이 들자 나라 성읍 곳곳에 차곡차곡 곡식을 보관했습니다. 곧이어 말할 수 없는 흉년이 7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애굽뿐만 아니라 중동 곳곳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가고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된 이복동생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가 두려워 목숨을 구걸하자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의 용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용서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승리다’라는 영국 속담처럼 용서는 어쩌면 가장 큰 복수일지도 모릅니다.
고난주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은 아담이 지은 원죄로부터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희생이셨습니다.
용서합시다.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일도 당할 수 있고 평생 잊지 못할 상처받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산다는 건 마음에 칼을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시시때때로 칼은 날을 세워 마음을 후벼놓습니다. 그때마다 아파하며 괴로움에 시달립니다. 용서는 마음에 들어 있는 칼날을 빼버리는 일입니다. 용서는 바로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미움과 상처를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수가 아닐까요? 고난주간, 용서의 참 의미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