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군 정충신 졸하다…숙종11년에 충무공(忠武公) 시호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10. 끝)
[서산타임즈 창간19주년 특별연재] 일화를 통한 정충신 장군 일대기(10. 끝)
조정과 백성의 물의가 분분한 가운데 대궐 앞 금천교에 장막을 치고 한의 사신 용골대 일행은 금천교에 새로 마련된 혼전(魂殿)에 이르러 허위(虛位)에 대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릴 때 용골대는 부쩍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정탐꾼의 기별로는 조선 조정이 발끈 뒤집혀서 사신을 불러 목을 잘라 버리자고 임금한테 상주하여 우긴다더니 이제는 장막이라니. 또 자기는 조선에 사신으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전에 다녀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왕궁으로 들어가 조선 왕에게 알현을 하였다는데 알현은 고사하고 왕궁도 아닌 다리 옆 장막뿐이라 무슨 비밀스러운 계획이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의심이 부쩍 난 용골대가 잔뜩 겁을 먹고 있을 때 별안간 바람이 불어와 장막 옆 장이 날렸다. 옆 장이 젖혀지는 바람에 갑옷투구에 칼을 빼어 들고 장막 속을 흘겨보고 서 있는 무사들의 험악한 얼굴이 드러나자 용골대는 앗! 소리를 치며 뭐라고 지껄이면서 올리려던 술잔을 내동댕이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뛰기 시작하니 뒤를 이어 마부대, 몽고 왕자들도 뛰었다. 나머지는 영문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 헐레벌떡 용골대를 따라서 뛰게 되었다.
길가 좌우로 빽빽이 늘어서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용골대 일행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을 보고 나라에서 이들을 붙잡는 줄만 알고 “야아, 되놈이 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붙잡으라는 소리가 우레 같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성난 말과 같이 미친 듯이 따라 뛰었다. 이 수 많은 백성들한테 당할 길이 없는 용골대 일행은 어느 큼직한 소슬 대문집으로 쑥 들어가서 마굿간에 있는 말을 집어타고 무학재를 향하여 달아난다.
그리하니 백성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는 큰일을 저질러 놓은 결과가 되었다. 원래 조정에서는 후금(청) 사절단의 규모가 전례 없이 클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한(汗)을 천자로 삼겠다는 서찰를 가지고 왔으니 한편 의심과 방비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불우변란이 있을까 해서 금천교 다리 밑에는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막 뒤와 옆에는 무사들을 세워 파수를 보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고 공교롭게 되어 버렸다.
백성들의 소요와 용골대등이 달아난 것을 위에서 듣고 통사 박난영을 급히 용골대에게 쫓아 보내어 그렇지 않은 사유를 말하고 다시 돌아가자 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고개를 흔들고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다. 일이 이쯤 되니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고 팔도에 하교를 내렸다.
“지금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고 또 청의 사신이 조상(弔喪)을 핑계하고 글을 가지고 왔으나 이것은 우리 군신(君臣)이 차마 듣지 못할 소리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써 결단하여 글을 받지 안하였더니 사신이 성내어 갔으므로 위태로운 기운이 점점 박두하였다. 팔도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은 각각 지혜를 다 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정(從征)을 자원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함께 구제하고 나라를 복되게 하라” 이렇게 엄숙히 하교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고취 시켰다.
나라가 이러한 때에 일대의 위인 금남군 정충신은 병들어 조정에 참례하지 못한지 반년이 넘었다. 춘추 예순 하나,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 어려서부터 크나큰 난리를 많이 치룬 까닭에 병이든 뒤에는 쇠약이 현연히 드러났다. 천병만마(千兵萬馬)를 호령하던 천하 명장 정충신이건만 세월과 병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위하여 범같이 날고뛰던 장군으로 병상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안타까운 장군의 심사도 심사이거니와 조선 백성의 크나큰 불행이었다.
용골대가 달아난 지 며칠이 되지 않는 이월 그믐께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는 정충신의 문병을 왔다. 계곡 장유는 최지천과 같이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며, 나중에 효종의 왕비가 될 인선왕후의 아버지였다. 나이는 올해 갓 쉰인 지천보다 한 살 아래이고 정충신보다 열두 살 아래인 49살이었다.
“사또 최대감과 장대감께서 오십니다.” 하고 청지기가 아뢰는 소리를 듣고 정충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의관을 바로 잡았다. 들어오는 두 사람과 병석에 앉은 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말문은 콱 막히고 창연한 생각으로 눈에서는 이슬이 어리었다. “두 분 대감께선 아직도 날씨가 찬데 이렇게 소인을 찾아 주시니 대단히 황감하오.”
충신은 쇠약한 목소리로 이렇게 사례를 했다. “원,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감, 그동안 병환의 차도는 많으신지요?” 최지천은 자리에 앉으며 은근히 묻는다. “차도가 뭐 있겠습니까? 이제 대감들을 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나 봅니다. 백병이 구발(俱發)하여 어느 곳 한 군데 괴롭지 않은 데가 없고 대관절 구미가 없으니 미음 한 보시기 먹을 마음도 없습니다그려.” 정충신은 추연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크나 큰 국난을 놓고 대감이 이렇게 병석에 계시니 한 모퉁이가 비인 듯하오.” 지천 최명길이 말을 다시 한다. “조정에 유능한 문무백관이 많은 터에 내가 성한들 무얼 하오리까마는 누워 가만히 생각하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뿐이오.” 정충신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진정한 소리다. “대감! 용골대와 마부대가 달아난 걸아시오?” 계곡 장유가 정충신 장군을 쳐다보며 묻는다. “어제 집안 식구들에게 대강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거 큰일입니다. 후환이 염려됩니다.” 최지천이 받았다. 장계곡이 별안간 소리를 높여 데리고 온 상노를 불렀다. 상노는 제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영창문 앞에 등대하였다.
“얘야, 그 지사미하고 담뱃대 들여오너라.” 장 계곡은 상노가 가져온 담배를 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충신과 최명길을 향하여 장유는 변명 삼아 말한다. “이것도 한 십년 빨았더니 이제는 인이 박혀 한동안 아니 빨면 입 속이 텁텁해서 견딜 수 없군요.” “대감, 그건 왜 빠시오? 백해무일리(百害無一利)한 것 아니오?” 나이 많은 정충신이 먼저 충고 하듯 말한다. “아니오, 그것은 대감께서 담배의 이점(利點)를 모르시는 말씀이오. 나는 이것을 영초로 알지요.” 장 계곡은 침이 마를 새 없이 담배 칭찬에 정신이 없다.
“담배 이야기 때문에 아까 말이 중단 되었소만 이번 용골대와 마부대들이 달아난 뒤에 그 끝이 어찌 될지 어디 정 대감의 의향을 들려주시오.” 최 지천은 말끝을 돌렸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금년 안으로 결정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큰 걱정입니다. 그리고 한심하고 딱한 일이요.” 말을 마치고 정 충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속히…”
옆에 있던 장 계곡이 깜짝 놀라며 의심해 물었다. “병법에 ‘병(兵)은 신속한 것으로 주장을 삼는다’ 했습니다. 지금 한(汗)이 명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을 보니 승운(勝運)도 있겠지만 한의 밑에는 날쌔고 꾀 많은 군사가 구름 꾀듯 했소이다. 천하를 삼켜 보려는 한의 배짱으로 병법을 모를 리 없지요. 다만 청나라 군사들이 꺼리는 것은 물길 하나뿐인데 만일 압록강이 얼면 육지보다도 건너오기가 더 쉬운 것이니 금년 겨울이 가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한이 몽고를 쳐서 항복을 받고 대군을 거느려 연경을 무찌르려 하나 가장 두려운 것은 조선이요. 이 때문에 먼저 조선을 쳐서 후환을 없앤 다음 버젓하게 큰 덩어리를 먹자는 생각일 게요.”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대감의 병환은 아직도 중하시고…” 장 계곡은 다시 걱정스럽게 정충신 장군의 얼굴을 쳐다본다. “내가 성한들 무얼 하오리까? 인물이 과연 없지요. 임진년 난리 때만 해도 기막힌 인물들이 좀 많았습니까? 백사, 한음, 오리 이원익 같으신 분, 권률 같으신 어른, 충무공 이순신, 곽재우 같은 분 또한 서산대사 사명당 같으신 분들은 참으로 당당한 인물이었지요. 그럼에도 이여송과 명나라의 막막강병(莫莫强兵)을 빌리지 않고는 못 배겼는데 항차 지금은 어떠합니까? 인물과 준비가 다 같이 허술 한데다가 믿을 곳도 없고 그나마 전쟁을 네 번이나 거듭 치렀으니 과연 망극한 일이요.”
말을 마친 정충신의 눈에는 더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는 최지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지천이 너무 괴롭다.” 정충신 장군은 한 마디 힘 있게 말하고 자리에 피곤한 듯 누워 버렸다. 최지천은 얼른 일어나 갓을 벗기고 베개를 반듯이 매만지니 정충신은 그대로 누운 채 최 지천의 손을 꽉 쥐었다.
“대감, 인물이 없소. 작은 인물은 많지만 큰 인물이 하나도 없구료!” 정충신은 말을 마치고 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최지천과 장계곡은 우울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어느 날 아침 최지천은 소세(梳洗)를 마치고 큰 사랑에 앉아 무슨 생각에 깊이 골똘하여 앉아 있을 때 청지기가 부고를 들고 왔다. “대감, 정 금남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최지천은 이미 짐작한 것이 있는 까닭에 새삼스레 놀라지도 않았다.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가만히 대답한 뒤에 그래도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청지기가 물러가야 좋을지 더 있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최 지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가 가지고 왔는가? 하인인가?” 최지천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인이 아니오라 그 댁 살림을 맡아 보는 사람이 친히 왔습니다.”
“그래, 다른 별말은 없는가?”최지천은 벌써 무엇을 짐작하는 모양이다. “황송하오나 대감을 친히 뵈옵고 무슨 말씀을 아뢰겠다고 합니다.”
청지기가 들어왔다. “허허, 대감이 그만 돌아 가셨어?” 최지천은 정장군 댁의 청지기에게 이렇게 묻고 탄식했다. “네, 어젯밤 자시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말을 꺼낸다. “황송하오나 소인이 대감께 직접 뵈옵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의 사또께서 병환이 위중하실 때 ‘만일 내가 여의치 못하여 세상을 버리는 날이면 이것을 지체 말고 대감께 전해 올리라’ 하셨기에 오늘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중치막 소매 속에서 하얀 간지 한 장을 꺼내 전한다. 지천이 얼른 받아보니 풀로 단단히 봉해 붙인 간지다. 피봉에는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다시 겉봉을 뜯어보니 간지 한 복판에 화(和)자 한자와 임경업 석자가 적혀 있을 뿐 다른 아무런 사연도 없었다. 지천은 머리를 끄덕이고 간지를 다시 접어 무릎 밑에 놓은 다음 청지기에게 말했다.
“자네도 오죽 섭섭하겠나? 나는 두 달 전에 뵌 것이 아주 영결이 되었네. 대감의 유언을 내가 잘 알아 듣겠네”
청지기가 물러간 다음에 지천은 방문을 첩첩이 닫고 간지를 껴안은 채 온종일 통곡해 울었다. 그 얼마나 절통한 울음이었을까?
이렇게 금남군 정충신 장군은 인조 14년(1636년) 5월 4일(음)에 숙환이 악화되어 61세로 별세했다. 광주의 한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일세의 명장, 일조의 충신, 겨레의 혜성이 병자호란이란 민족의 수난을 앞에 두고 가셨으니 얼마나 절통한 일인가? 임금이 크게 슬퍼하고 예장을 명하며 어의를 벗어 수의로 하사하였다. 그리고 숭정대부판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증직하였으며 숙종11년에는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내려 공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정충신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그가 저술한 ‘만운집’과 ‘백사선생북천일록’이 전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현재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 정충무공의 단아한 존영을 모신 사당 진충사가 있어 공(公)을 흠모하는 시민들과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고 참배객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