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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5.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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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배.jpg
김풍배 본지 칼럼리스트

강원도 영월 하면 떠오르는 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방랑시인 김삿갓입니다. 영월에는 그의 유적지에 무덤이 있고 주거지가 있고 김삿갓 문학관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본명은 김병연(1807-1863)입니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 난 때 난을 평정하지 못하고 항복함으로 역적으로 몰립니다. 그의 아버지는 멸족의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곡산에 갔다가 2년 후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자 귀향하지만, 화병을 얻어 돌아가십니다. 어머니는 주변의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 김병연 형제를 데리고 광주로, 이천으로, 가평으로, 평창으로,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합니다. 김병연은 16세 때 영월 향시를 보았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선천 부사 김익순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글로 장원급제합니다.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나무위키) 기쁨도 잠시, 집에 돌아온 후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처자식을 남겨둔 채 그는 방랑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은 1863년 57세의 나이로 전남 화순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삿갓 문학관을 관람하는 사이에 먼저 그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입구 작은 공원 주변으로 김삿갓 시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어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묘 옆에는 ‘시선난고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 쓴 돌비석이 서 있고, 자빠질 듯한 두 돌기둥이 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김삿갓의 묘는 영월 향토 사학자 고 박영국 선생이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려 보았습니다. ‘아들이 찾아와도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하릴없이 묘지에 갇혀 꼼짝 못 하십니다. 이 후배 문안드립니다.’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생가를 찾아가는 표지판이 보였고 입구에서 1.8 Km 라 표시되어있습니다.

 

포장된 길을 걸어가다 가파른 언덕길이 나타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도로 아래 계곡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낭랑했습니다.

 

김삿갓 박물관에 들어섰습니다. 삿갓을 쓴 그의 모형이 기다렸습니다. 모형 옆에 앉아 기념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시, 김병연 일가 가계도, 전국을 떠돌아다닌 방랑 여정의 지도도 있었습니다. 곳곳에 새겨져 있는 그의 시는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고 막대기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눈으로 읽으면 점잖은 글이 되지만, 입으로 읽으면 지독한 욕이 되는 글도 보입니다.

 

<書堂來早知 내 일찍이 이 서당을 알고 찾아왔건만, 房中皆尊物 방안엔 모두 높은 분들 뿐이고, 生徒諸未十 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先生來不謁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세상인심이 보였고 뜬구름 같은 인생의 허무함도 보였습니다. 역사는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억울하고 서럽게 살다 간 영혼은 반드시 위로하고 한을 풀어 준다는 걸 여기 영월 땅에 와서 알았습니다.

 

영월은 비운의 땅, 슬픔이 깃든 땅이라 생각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날씨만큼 착각이었습니다. 거주인구의 열 배가 넘는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고장이었습니다. 날씨는 쾌청했고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식당마다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땅이었습니다.

 

내 고장 서산을 생각합니다. 하늘길, 땅길, 바닷길 훤히 뚫린 천혜의 땅입니다. 알프스 그림 같은 서산 한우 웰빙 산책로가 있고, 6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해미읍성이 있습니다. 무학대사의 혼이 깃든 간월암, 여기에 우리의 꿈 ‘청춘 예찬’의 민태원 생가가 복원된다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관광 자원이 될 것입니다. 강원도 영월을 다녀와서 역사는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편이란 것도 알았습니다./목사·시인·소설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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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을 찾아서[3] 내 고장 서산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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